트렌드 코리아 2023 - 공간력 (하)
미국 뉴욕에는 ‘쇼필즈(Showfields)’라는 백화점이 있다. 이곳은 일반적인 백화점과 달리 색다른 쇼핑 경험을 제공한다. 이름처럼 물건을 진열해 놓는 게 아니라 공연(show)을 통해 상품을 즐길 수 있게 한다. 홈페이지에서도 보통 백화점들이 진행 중인 할인행사 배너를 띄우는 것과 달리 ‘○월 ○일 ○○시, 브랜드 이름’이 적힌 공연 안내를 홍보한다.
공연 외에 공간을 꾸며 놓은 것도 다르다. 일반적인 백화점의 경우 정형화된 구획에 각 브랜드가 입점돼 있는데, 쇼필즈는 각 매장이 전혀 다른 느낌의 테마룸처럼 꾸며져 있다. 소비자들은 만져 보기도 하고 향기를 맡기도 하며 오감을 활용해 브랜드를 경험할 수 있다. 판매원들은 배우(actor)라고도 부를 정도로 상품을 활용하는 법을 꿰고 소비자들을 즐겁게 한다.
지난 글에 이어 공간력을 갖기 위한 소비공간의 두 번째 변화는 ‘소비공간의 테마파크화’다. 테마파크는 입장하는 순간 일상적인 공간과는 단절된 비일상의 세계로 건너가는 듯한 경험을 제공한다. 환상성 짙은 테마와 함께 신나는 음악, 퍼레이드 같은 장치들로 언제나 축제 같은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공간적 경험의 핵심은 유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소개한 ‘쇼필즈’ 역시 테마파크화된 소비공간의 대표적 사례다. 돌아다니는 것 자체를 하나의 즐거운 경험으로 만들며, 놀이공원의 안내원처럼 점원들이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한다.
백화점과 같은 유통업뿐만 아니라 전 범위에서 소비공간의 테마가 중시되고 있다. 가장 자주 접할 수 있는 것은 콘셉트가 뚜렷한 식음료점들이다. 일식집이라면 일본에 온 듯한 착각이 들 만큼 식기 하나까지 일본에서 공수해 오는 등 디테일을 살린다. 민트초코맛 메뉴를 강조하는 집이라면 멀리서 시야에 들어올 만큼 음식점 외관부터 내부까지 민트 색깔로 칠한다. 이렇다 보니 최근 잘 나가는 음식점을 만들고 싶다면 셰프가 아니라 디자이너부터 구해야 한다고 할 정도다.
의류매장도 엔터테인먼트 요소가 강해진다. 의류는 온라인 구매가 활성화돼 있지만 오프라인 매장 방문의 욕구가 여전히 큰 품목이다. 사이즈나 질감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직접 입어 보고 만져 보는 게 가장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의류매장에서 피팅룸이 핵심 공간이 되는 것이다.
최근 2030 젊은 소비자를 주요 고객으로 하는 의류 브랜드들은 피팅룸에 유희적 요소를 강조한다. 예를 들어 ‘무신사 스탠다드 강남’은 마치 촬영 스튜디오 같은 인테리어를 선보였다. 옷을 입어 보고 사진을 찍으며 놀 수 있게 공간을 구성한 것이다. 피팅룸 내부 조명을 원하는 색깔로 바꿀 수 있으며 휴대전화 화면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TV도 설치돼 있다.
소비공간의 세 번째 변화는 ‘피지털(physi-tal)화’다. 물리적 공간을 의미하는 피지컬(physical)과 디지털(digital)의 합성어로, 디지털 기술이 접목돼 물리적 공간의 경험을 편리하고 다채롭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글로벌 패스트푸드 체인 ‘맥도날드’는 주문과정에 인공지능(AI) 기술을 접목하고 있다. 대부분의 주문을 키오스크로 처리하는데, 이때 키오스크에서는 날씨나 시간대를 고려해 메뉴를 추천하기도 한다. 앱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주문자의 이전 구매기록을 분석해 선호할 만한 메뉴를 먼저 띄우거나 맞춤형 쿠폰을 제공해 1인당 구매금액이 늘어나도록 유도한다. 또한 미국에서는 차를 운전해 들어가는 드라이브스루 매장의 비율이 높은데, 이 경우 음식이 준비되는 시간이 더욱 중요하다. 따라서 해당 매장의 주방 상황을 고려해 빠르게 조리 가능한 메뉴를 추천하기도 한다.
이러한 피지털화는 소비자들의 스마트폰 앱과 연결을 통해 강화된다. ‘아마존 스타일’은 온라인 쇼핑몰인 아마존에서 만든 의류매장이다. 이곳에서는 매장을 둘러보며 앱에 옷을 담으면 잠시 후 피팅룸으로 안내된다. 피팅룸에는 이용하는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고 앱에서 고른 옷을 입어 볼 수 있도록 준비돼 있다.
만약 다른 사이즈를 원하거나 어울리는 옷 추천이 필요하면 피팅룸 안에서 바로 요청할 수 있으며, 곧 피팅룸 한쪽에 새 옷이 준비된다. 번거롭게 점원을 부르거나 피팅룸을 나갔다 오지 않아도 된다. 구매하고 싶은 옷이 있을 경우 앱에서 결제하면 계산대 줄에 서거나 무겁게 들고 갈 필요 없이 집으로 옷이 배송된다.
이와 같이 공간력 트렌드에 박차를 가한 것은 코로나19다. 비대면 생활이 발달하면서 역설적으로 오프라인 공간이 생존을 위해 공간력을 갖추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오프라인의 변화는 인류에게 찾아온 예측불허의 사건 때문만은 아니다. 바탕에는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이라는 시대적 흐름이 존재한다. 생산과 소비의 전 과정에서 디지털 기술이 아날로그 시대의 방식을 대체하며 파급력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공간력 트렌드가 던지는 시사점은 공간을 만들고 활용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크게 다가온다. 무엇이든 물리적 공간을 통해 이뤄지는 게 당연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많은 기능적 측면을 온라인 채널이 담당하기 때문에 명확한 목적하에 물리적 공간을 설계하고 운영하는 것이 필요해졌다. 예를 들어 오프라인 매장에서 소비자를 맞이하는 자영업자라면 특별한 경험에 초점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이 매장에서만 가능한 경험을 제공할 것인지 고민이 필요하다.
판매에서 벗어난 목적으로도 공간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최근엔 홍보와 고객관리 차원에서 오프라인 매장을 운영하는 온라인 업체들이 늘어나고 있다. 온라인 채널에서 도저히 충족할 수 없는 경험을 제공하고자 한 것이다. 예를 들어 온라인 라이프스타일 편집숍 ‘29CM’는 팝업공간 ‘29맨션’을 운영한 바 있다. 상가 한 곳을 임대해 29CM에서 소구하는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가상의 인물들이 거주하는 맨션을 꾸몄다. 이곳은 판매 목적이 아니라 해당 브랜드를 좋아하는 소비자들을 위한 경험공간이었다.
소비자를 관찰하고 브랜드에 필요한 데이터를 수집하기 위해 공간을 운영할 수도 있다. 매장에 소비자 행동분석용 카메라를 설치해 방문한 소비자의 성별·연령대·체류시간 등 정보를 수집하고 신제품이나 진열방식, 홍보형태 등에 따라 소비자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AI 분석을 통해 인사이트를 도출한다. 이전까지 온라인 채널에서 장바구니·결제 전환율이나 웹페이지 체류시간을 분석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프라인에서도 이러한 데이터 분석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러한 비즈니스를 ‘RaaS(Retail as a Service)’라고 부르기도 한다.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개인 소비자들 또한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공간의 변화에 주목해 본다면 트렌드를 이해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본 내용은 필자가 국방일보에서 연재하는 <병영에서 만나는 트렌드>글을 수정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