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코리아 2023 - 네버랜드 신드롬 (상)
tvN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에는 종종 어린이 시민들이 출연한다.
어린이 출연자에게는 공통질문이 하나 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요?”라고 묻는 것이다. 어린이 출연자 대부분은 “어른이 되기 싫다”고 이야기한다. 어른이 되면 취업 준비도 해야 하고 할 일이 너무 많아 힘들다는 것이다. 어린이들이 “얼른 어른이 되고 싶어요!”라고 외치던 과거와 대조적인 모습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최근 국내 에세이 중 ‘어른’을 다룬 책이 눈에 자주 띈다. 『어쩌다, 어른』 『어른은 아니고, 서른입니다』 등 사회적으로는 ‘어른’이라고 부르는 나이가 됐지만 스스로를 어른이라 부르는 게 어색한 사람들의 마음이 느껴지는 제목들이다.
어린이와 청소년은 어른이 되는 것을 꿈꾸지 않고, 어른들은 마음속에 자리한 어린이를 꺼내며 자신을 ‘어른이(어른+어린이)’라고 부른다. 점차 우리 사회에서 ‘어른’이 사라지는 모양새다.
한 번쯤 ‘피터팬 신드롬(증후군)’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동화 속 주인공인 피터팬이라는 인물은 어른이 되지 못하는 마법에 걸려 영원히 소년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캐릭터인데, 몸은 어른이 됐음에도 정신적으로 영원한 어린아이로 남고 싶어 하는 심리적 부적응 상태를 가리켜 피터팬 신드롬이라 부른다.
유명인 중에서는 마이클 잭슨이 이에 해당했다고 한다. 너무 어린 나이에 스타가 되어버린 그는 '어린 시절'에 대한 결핍이 있었는지, 자신의 저택을 피터팬이 사는 땅, ‘네버랜드’라고 이름 붙였을 만큼 스스로 피터팬이 되기를 원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사례에서 나타난 우리 사회의 모습은 한두 명의 사람이 '피터팬 신드롬'을 겪는 정도가 아니다. 사회 전반적으로 어른이 되기를 꿈꾸지 않고 있다. 즉, 사회 전체가 곧 네버랜드가 되고자 하는 ‘네버랜드 신드롬’을 겪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다. ‘피터팬 신드롬’은 흔히 부정적 단어로 쓰이는 말이지만 ‘네버랜드 신드롬’의 경우 부정적 측면만 있는 건 아니다. 사회구성원들이 젊고 어리게 살아간다는 의미인 만큼 밝고 긍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현상들이 ‘네버랜드 신드롬’의 징후라 할 수 있을까?
지금부터 하나씩 살펴보자.
네버랜드의 첫 번째 징후는 사람들이 어린 시절을 되찾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올해 개봉영화 중 가장 화제가 된 작품을 꼽는다면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그중 하나일 것이다. 5개월 동안 누적 관객수는 약 467만 명으로 천만관객 정도는 되어야 흥행했다고 하는 시대에 압도적인 기록을 낸 것은 아니지만 독특한 문화현상을 일으켰다.
애니메이션임에도 1020세대보다 3040세대에서 열광했다는 것, 한정판 굿즈를 사기 위해 여러 상영관을 떠돌며 ‘N차 관람’을 하는 소비자들이 하나의 현상처럼 눈에 띄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슬램덩크와 관련된 단행본은 영화 개봉 후 250만 부가 판매되었다고 한다. 연재된 지 30년이 지난 만화로서는 엄청난 저력을 과시했다. 옛 콘텐츠의 부활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현상은 잠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3040세대의 마음을 대변한다.
장난감이 재해석되는 것도 하나의 현상이다. 글로벌 장난감 기업인 레고는 ‘어덜츠 웰컴(Adults Welcome)’이라는 마케팅 캠페인을 전개한다. 레고는 아이들을 위한 장난감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좋아하는 것에 돈을 아끼지 않는 ‘덕후’ 성인 소비자를 주요 고객으로 타겟팅하는 것이다. 이러한 어른을 위해 제작된 레고는 어린이용 버전과 달리 예술작품에 가까울 만큼 훨씬 정교한 게 특징이다.
미국에서 최근 나온 여행상품 중에는 ‘어덜츠 서머 캠프(Adults Summer Camp)’라는 게 있다. 흔히 미국에서 ‘서머 캠프’는 청소년들이 여름방학을 맞이해 숲속 산장 같은 곳에서 단체로 합숙을 하고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우리로 치자면 보이스카우트·걸스카우트 수련회와 비슷한 것인데, 최근에 이러한 서머 캠프가 어른을 위해 열린다는 것이다. 도시를 떠나 자연을 만끽하며 요가와 명상을 즐기기도 하고, 나이와 직업을 밝히지 않은 채 인간 대 인간으로 친분을 쌓는 자리가 마련되기도 한다. 어른으로서의 짐을 내려놓고 어린 시절 기분을 만끽하는 것이다.
네버랜드의 두 번째 징후는 무엇이든 ‘재미’가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어른과 어울리는 이미지, 어려움·진지함·무거움 대신 쉽고 재밌고 귀여운 것들이 우위에 선다. 특히 무엇이든 재미로 귀결되는 대표적인 현상이 ‘게임화(gamification)’의 확장이다. ‘게임화’라는 건 게임이 아닌 것에 게임의 요소와 원리를 적용해 이용자를 게임에 빠지듯 몰입(engage)하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미션을 수행하면 적절한 보상을 제공한다거나 이용자들 간에 랭킹을 매겨 경쟁을 촉진하고 성취감을 부여하는 것 모두 게임화의 방법이다. 게임화는 소비자들이 어렵게 느끼는 영역 및 행동에 접근성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게임화가 적극적으로 활용되는 영역은 금융업계다. 흔히 금융상품이라는 것은 어렵고 복잡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애플리케이션을 만들 때도 귀엽고 간단한 화면 구성을 한다거나 퀴즈·미션 수행 이벤트 등 게임 요소를 활용해 심리적 장벽을 낮춘다. 카카오뱅크의 26주 적금 상품의 경우 매주 소액을 납입하면 미션을 성공했다는 의미로 새로운 캐릭터 이미지가 차곡차곡 쌓인다. 타 브랜드 연계 이벤트가 있을 경우 중간중간 특별 리워드를 줘 끝까지 완주할 것을 독려한다.
무엇이든 재미가 중요해지는 것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현상은 귀여운 캐릭터의 점령이다. 식품, 유통, 지방자치단체 등 다양한 영역에서 유명한 연예인을 기용하기보다 자체 캐릭터를 개발한다. 예를 들어 신세계그룹은 ‘제이릴라’라는 고릴라 캐릭터에 이어 동네 동생이라는 설정의 ‘원둥이’ 캐릭터를 편의점 ‘이마트24’ 캐릭터로 내세웠다. 롯데그룹의 경우 ‘벨리곰’이 활약 중이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롯데월드타워 광장에 초대형 벨리곰을 설치해 인증샷을 찍고 굿즈를 구매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캐릭터가 브랜드의 얼굴이자 홍보대사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22년 콘텐츠 산업백서』에 포함된 ‘캐릭터 이용자 실태보고서’에 따르면 조사 대상인 3500명 중 64.2%가 “상품 구매 시 캐릭터의 영향을 받는다”고 답했으며, 53%는 “캐릭터 상품에 추가 비용을 지불할 의사가 있다”고 응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만큼 더 귀여운 것을 찾는 소비자들이 연령을 불문하고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다음편에서 이어집니다)
본 내용은 필자가 국방일보에서 연재하는 <병영에서 만나는 트렌드>글을 수정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