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거문화의 변화를 예고하다
최근 금리가 가파르게 오르며 세입자들은 전세보다 월세를 선호하고 전세 임대인들은 세입자를 구하지 못하는 역전세난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세입자들이 전세 대출 이자를 내는 것보다 월세를 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집은 오랫동안 사거나(매매) 돈을 맡겨 놓는 대신 빌려 거주하는(전세) 형태가 주를 이루었다. 이 중 전세 제도는 전 세계에서도 한국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주거 방식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단기적인 금리 인상 요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전세는 점차 사라지고 사용료의 개념으로 돈을 지불하는 월세가 장기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사실 월세는 본질적으로 구독 비즈니스 모델에 해당한다. 집을 '소유'하지는 않지만, 거주 공간을 쓸 수 있는 '권한을 매달 구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거 구독의 영역은 이미 월세를 넘어선 다음 세대로 향하고 있다. 월세를 주거 구독의 1.0 버전이라 한다면 최근 변화하고 있는 주거 라이프스타일은 한 차원 다른 주거 구독의 2.0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오늘은 ‘주거 구독 2.0’ 트렌드를 통해 사람들이 집에 기대하는 바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먼저 주거 2.0은 이전의 주거와 어떻게 다를까? 앞서 언급한 월세의 경우, 개인이 머무르는 공간만을 빌리는 반면, 2.0 버전에서는 개인 공간과 더불어 운동시설, 집무실, 영화관 등 부대시설 및 서비스도 함께 구독한다. 공용 공간을 함께 사용한다는 점에서 ‘코리빙’ 혹은 ‘공유주거’라 불리기도 한다. 개인이 소유한 것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눈다기보다는 대체로 구독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 주체가 따로 존재하고 개인은 서비스를 매달 이용하는 소비자가 된다는 점에서 핵심은 ‘공유’보다는 ‘구독’에 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국내에서 가장 대표적인 주거 구독 브랜드로는 SK D&D에서 만든 ‘에피소드’가 있다. 현재 서초, 강남, 성수, 신촌, 수유 등 시내 여러 지점이 운영 중이며 입주자는 자신의 취향에 맞게 룸타입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물론, 가구와 인테리어 소품도 추가로 구독할 수 있다. 에피소드가 주거 구독의 2.0인 이유는 개인 거주 공간을 얻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주방이나 업무 공간, 루프탑과 라운지 등 공용 공간도 이용할 수 있게 된다는 점 때문이다.
특히 에피소드가 독특한 점은 지점별로 각기 다른 라이프스타일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에피소드 ‘신촌 369’점은 대학생과 사회초년생이 많이 거주한다는 지역적 특색을 고려하여 ‘플레이그라운드’를 콘셉트로 다양한 문화적 경험을 누릴 수 있도록 지식 콘서트, 영어 고민 상담소 등 커뮤니티 이벤트를 마련한다. 에피소드 ‘서초 393’ 지점은 반려동물 가족에 특화되었다. 내구성이 강한 마감재를 사용해 긁힘을 방지한다거나 반려동물과 같이 운동할 수 있는 펫 플레잉 존, 반려동물 전용 주방시설, 미용 및 스파 시설 등을 마련하여 주거의 다양성을 선사한다.
‘호텔 같은 집에서 살고 싶다’는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주거 구독 상품도 등장했다. 코로나19로 인해 폐업 위기에 놓인 호텔업계에서 장기 숙박 상품을 내놓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가장 화제가 된 사례는 13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일본 ‘제국호텔’의 변신이었다. 호텔의 3개 층을 개조하여 생활에 필요한 전자레인지, 다리미 등 공용 공간을 마련했으며 한 달 숙박(30박) 금액은 36만 엔(약 350만 원) 수준이다. 장기숙박 상품의 예약을 받기 시작한 첫날 바로 완판되었는데 의외로 고소득의 개인 사업자나 기업 임원뿐만 아니라 일반 직장인에게도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몇 달 후 장기 숙박용 객실 수를 2배로 늘리기에 이르렀다. 호텔을 통한 주거 구독 모델은 국내에도 도입되어 최근 ‘호텔 한 달 살기’ 체험 후기가 온라인상에 속속 올라오고 있다.
기존의 주거 공간에 다양한 생활 서비스를 더하여 주(住)생활에 변화를 꾀하는 것 또한 주거 구독 문화의 외연을 넓히고 있다. 아파트 브랜드인 ‘힐스테이트’를 만드는 현대엔지니어링은 아파트 내 공용 공간에 미술 작품을 전시하는 ‘힐스테이트 아트라운지’ 서비스를 고안했다. 미술 작품을 대여하는 ‘오픈갤러리’와 협업해 로비나 엘리베이터 앞과 같은 공간에 국내 유명 작가의 미술 작품을 전시하는 것이다. 사는 곳에 호텔 라운지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에 더불어 주기적으로 변화를 줌으로써 생활을 다채롭게 하는 효과가 있다.
베이비시터, 도서관, 카 셰어링 등 생활 편의 서비스를 더하는 아파트도 등장했다. GS건설이 만든 주거 커뮤니티 서비스 ‘자이안비’는 다양한 업체와 제휴하여 입주민 전용 서비스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단지 내에 독서 문화 공간을 만들고 입주민의 취향과 트렌드에 맞는 도서를 추천해주는 큐레이션 서비스를 제공한다거나, AI 셰프가 실제 유명 셰프의 음식을 똑같이 재현하여 제공하는 다이닝 서비스 프로그램 같은 것이 있다. 이처럼 주거 생활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구독 모델은 결과적으로 주거가 ‘서비스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거 구독이란 단순히 물리적 공간을 사용한다는 개념을 넘어, 거주하는 데 필요한 일련의 기능을 포함한 서비스를 제공받는 개념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주거 구독 2.0 트렌드의 배경에는 사회 구조적 변화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트렌드모니터의 ‘1인 가구의 공유주택에 관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공유주거를 이용하고 싶은 이유의 1위는 ‘경제적 이유’였지만 ‘외롭지 않음’(41.7%) ‘재미있음’(36.8%)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느낌’(35.6%) ‘서비스가 있음’(32.4%)에 동의한 응답자도 상당히 많았다. 이는 점차 1인 가구가 주요 가구 형태가 되면서 주거 서비스에 대한 요구도 많아질 것임을 나타낸다.
또한 코로나19를 계기로 원격근무를 할 수 있는 문화·기술적 여건이 갖추어졌다. 재택근무나 워케이션도 가능한 선택지가 되면서 집은 출퇴근이 가능한 곳이어야 한다거나, 한 곳에 계속 살아야 한다는 생각조차 깨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보다 앞서 재택근무와 워케이션 문화가 보급되고 있는 일본에는 이와 같은 주거에 대한 생각 변화를 바탕으로 ‘거점 생활’이라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주거가 ‘정주’에서 ‘향유’로 개념이 변화하는 것이다.
다양한 곳에서 살아보고 싶은 사람들을 지원하는 대표적 사례로는 ‘어드레스’ 브랜드가 있다. 여기에서는 월 4만 엔(약 39만 원) 정도를 내면 전국 60여 개 숙박 시설 어디에서나 머무를 수 있으며 한 곳에서는 최장 14일까지 체류할 수 있는 주거 구독 상품을 제공한다. 프리랜서나 시간적·물리적인 제약이 적은 개인 사업자들이 주 이용자일 것 같지만 코로나19를 겪고 난 후 일반 직장인의 이용이 빠르게 늘고 있다고 한다.
장기적으로 주거의 개념 자체가 변화한다면 이제 ‘어느 동네 사세요?’라는 질문이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인구학자 조영태 교수는 앞으로 주중에는 도시에 살다가 주말에는 바닷가에서 지내는 ‘오도이촌(五都二村)’과 같이 여러 권역을 이동하며 사는 사람이 늘어남에 따라, 한 행정구역에 '주민등록'을 한 인구보다는 ‘생활인구’라는 개념이 필요해질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생활의 기본이라 이야기되는 의식주에서 ‘주’의 변화가 몰고 올 파장이 인구 정책을 만드는 공적 영역은 물론, 개인과 기업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은 자명하다.
본 내용은 국방일보 <병영에서 만나는 2022 트렌드>에 연재한 내용을 수정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