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것은 영화가 우리가 꿈꾸는 인간의 이상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상상을 해본다. 내가 일하는 공간에서 화재가 발생한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탈출에 성공하지만 아직 많은 동료들이 사무실에 갇혀있다. 살려달라는 외침이 건물 밖으로 울려 퍼진다. 화재현장을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움에 전전긍긍 하지만 누구도 쉽게 뛰어들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이 상황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동료들을 구하러 불구덩이 속으로 달려 들어갈 수 있을까?
나는 아마도 나 하나 살자고 뒤도 안 돌아보고 뛰쳐나왔을 것이고 탈출에 성공했다면 공포에 질려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나에게 아무리 영화라고는 하지만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아니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나를 정체 모를 불편함 속에 머물게 하였다.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릴 몇 번의 고비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정부의 무능함에 대한 답답함도, 나의 메마른 감정 때문도 아닌 영화가 끝날 때까지 나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인물들이 던지는 너무나 커다란 질문 때문이었다. 나는 저 사람들과 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누군가를 위해 나 자신을 내던질 수 있을까? 어느 누구도 희생하려 하지 않는 다면 재난은 어떻게 극복 될 수 있을까? 다른 한편으로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고현장을 지켜보고만 있는 이들을 누가 희생하지 않는다고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나는 바로 이점이 타인을 위한 자기희생의 위대함을 설명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며 상식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누구나 할 수 없는 것을 행하고 실천할 수 있을 때 우리는 탁월해지고 위대해 지는 것이다. 어쩌면 인류가 지금까지 멸종하지 않고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자신보다 타인을 위하는 이 이타적인 마음 때문이란 생각을 해본다. 나는 재난 영화 속 희생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저 밑바닥의 이유가 가족을(누군가를) 잃어버린 슬픔이 아닌 타인을 위한 한 인간의 희생에 있다고 생각한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내적 공포와 두려움을 이겨낸 용기와 자기승리의 순간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이다.
나는 타인을 위한 자기 희생에 대한 이유 없는 감동과 이상을 가지고 있다.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하기에, 나라는 사람은 그것과 상당한 거리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자신을 이겨내는 과정과 그것이 꽃피우는 장면을 접할 때면, 가슴 안으로부터 올라오는 알 수 없는 희열과 감동의 전율이 나를 휘감는 것을 느낀다. 이것이 영화 '판도라'가 순간이지만 나를 울컥하게 했던 이유이다. 이 감정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 같은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자기희생 또는 자기극복의 이상을 절대 행할 수 없는 이에게 밀려오는 '슬픔'인 것인가? 아니면 반대로 다수의 위한 희생 또는 나 자신을 이겨내 가는 삶을 꽃 피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덕목을 가지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인가?
‘대기 중에 노출 된 핵연료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한 방사능을 내뿜는다. 높아만 가는 방사능 수치로 구조활동을 위해 도착한 소방대원들의 투입이 어려워지고 오히려 현장의 희생자들만이 아직 탈출하지 못한 가족과 동료를 구하기 위해 고군 분투하고 있다. 이들은 피폭으로 인한 자신의 죽음보다 건물 잔해에 깔려있는 동료를 구하는데 더 필사적이다. 희생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해수의 사용으로 방사능 수치를 낮출 수 있는 길이 열린다. 하지만 해수 사용이 피폭 위험의 해소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순간 처참한 사고현장에서 지켜보던 소방대장의 짧고 단호한 외침이 들린다. "우리도 들어 간다." 이 말이 떨어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모든 소방대원들이 현장으로 뛰어들어간다.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과 사고현장에서 죽어가는 이들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는 이타심의 팽팽한 대립의 균형점이 깨지는 순간 것이다.’
이들이 사고현장으로 뛰어드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머리와 가슴을 헤집어 놓았을 수많은 갈등과 고뇌를 헤아리자니 사고현장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 세상 그 무엇보다 감동적으로 다가 왔다. 자신을 내려놓고 죽음 앞에 서있는 이들을 도우러 뛰어드는 그들의 진심이 그들의 행위를 통해 나에게 전해진 것이다. 나는 이들의 마음이 세상 무엇보다 아름답고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도울 수 있는 만큼 돕는 것이 아니라 내가 도울 수 없는 상황에서도 타인을 돕는 그 마음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작은 전율과 감동이 나를 다시 감싸 안는다. 나는 희망한다. 나 자신만이 아닌 우리를 위해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기를 갈망한다.
나 자신과 대적되는 것들 과의 싸움, 그것의 어려움과 고뇌를 맛보라
나는 레비제리블의 장발장이 자신의 누명을 쓰고 법의 심판을 기다리는 이를 향하는 길에서 흑발이 백발로 변하고 급격히 나이가 들어 보일 정도의 내적 갈등과 고뇌를 지켜보면서, 그것의 두려움과 고통을 그리고 그것의 위대함을 처음 맛볼 수 있었다.
우리를 위한 나의 희생, 그것의 이상적(영화적)해석과 현실의 차이 그리고 이 같은 딜레마적 상황을 간접적 체험함으로써 자신의 민 낯을 들여다보고 인지할 수 있지 않을까? 이 같은 시간을 누려본다면 우리는 좀 더 의미 있고 위대한 인생을 위한 준비를 해나갈 수 있지 않을까?
다수를 위한 희생이 필요하고 강요되는 상황에서 나는 감정적 또는 이성적으로 어떤 반응을 보이고 어느 쪽을 선택을 할 것인가?결론부터 말하자면 닥쳐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자기희생이 필요한 상황에 대한 가정 속에서의 개인적인 탐구와 자아성찰을 통하여 우리의 사고와 공감의 영역을 나를 넘어서 우리까지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렇게 죽기 싫다고 울부짖는 주인공처럼 아무리 위대한 것을 위한것이라 해도 나의 희생은 무엇보다 두렵고 무서운 것이다. 지금이라도 당장 살려달라고 문 밖의 사람을 향해 울부짖어도 어느 누구 하나 그것을 이상하지도 이기적이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이것은 거대한 것이다.
나의 일이 아니라면 누구나 주인공이 희생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입장이 바뀌는 순간 우리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과연 주인공의 희생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던 사람 중 주인공과 입장이 바뀌게 되는 가정 속에서 몇이나 자신의 정답을 고수할 수 있을까? 또, 그 중 얼마나 실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정답을 실천 할 수 있을까? 가장 합리적이라 생각 했던 정답이 나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가?
만약 "어차피 죽을 사람들인데 그들이 희생하는 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 아냐?" 란 생각을 한다면 이 생각을 내가 희생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고수할 수 있는가?
당신은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