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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질경이 Sep 09. 2022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의 집,
몬티첼로

 토마스 제퍼슨은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서도 가장 존경받는 전직 대통령 중의 한 사람이다.

서른셋의 나이에 독립선언문을 썼다.

버지니아 주지사일 때는 종교의 자유를 법으로 제정했다. 정부가 기독교를 지원하던 시기 대단히 하기 힘든 일이었다.

프랑스 대사,

1대 국무장관을 

2대 부통령을,

3대 대통령을 지냈다.

    대통령이 되어서는 나폴레옹으로부터 루이지애나 구입을 해서 그 당시 미시시피 강 동쪽만 가졌던 미국 영토를 두배로 늘였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말을 독립선언문에 썼던 그는 노예 수입을 법으로 금했다.

대통령직에서 은퇴한 후, 76세에 인간이 자유시민으로 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교육이라고 늘 믿었던 그는 버지니아 대학을 설립했다.


이만하면 참 위대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의 업적을 기려 조지 워싱턴, 링컨, 시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들과 함께 마운트 러쉬모어의 큰 바위에도 올랐다.



워싱턴 디씨, 제퍼슨 기념관에서 자신이 쓴 독립선언문이 새겨진 벽에 둘러싸여 


워싱턴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가 직접 설계하고 40년 동안 정성껏 지어 사망할 때까지 살았던 집, 몬티첼로에 갔다.

오래전부터 와 보고 싶던 곳이다.


 그는 건축에 관해 이야기하면 건축가가 되고,

농부와 이야기하면 농부가 되고,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면 음악가가 되었다.

책을 좋아하는 그는 "나는 책이 없이는 살 수가 없다"라고 말할 정도로 책을 좋아했다.

그의 서재는 흐린 날도 책을 읽을 수 있도록 그 당시로서는 드물게 천정을 유리로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에 대해 한마디로 표현하기를 어려워한다.

그와 친했고 같은 날 사망한 존 아담스 대통령은 

"그는 깊은 강물 같은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그 속이 너무 깊어 무엇이 있는지 알기 힘들고, 소리 내지 않고 조용히 흐른다고 했다.


 정치적으로 위대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그는 사랑하는 것들을 모두 잃어갔다.

사교적이지도 않고 수줍어하는 그가 마사라는 여자를 만나 결혼했다.

 아이 여섯을 낳았는데 성인이 되도록 살아남은 아이는 딸 둘 뿐이었다.

그리고 마사도 1782년 사망,  그는 나이 서른아홉에 홀아비가 되었다.

계모 손에서 자란 마사는 죽기 직전 제퍼슨에게 재혼하지 말 것을 약속해 달라고 했다.

자기 자식들이 계모와의 갈등을 겪는 것이 두려웠다.

제퍼슨은  약속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재혼을 하지는 않았다.


마사가 시집올 때 친정에서 노예들을 데려왔다.

그중 샐리 헤밍스라는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마사의 친정집 여자 노예와 그녀의 아버지 (그러니까.. 제퍼슨의 장인)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의 이복 여동생이다.

제퍼슨이 프랑스 대사로 가 있을 때 열네 살의 샐리 헤밍스는 엄마가 없는 그의 어린 딸을 돌보는 일을 했다. 그리고 제퍼슨의 아이를 낳았다.

 파리에서 자유인이 될 수도 있었는데 아이가 자라면 노예신분을 풀어 주겠다는 제퍼슨의 약속을 받고 몬티첼로에 돌아와 제퍼슨의 방에서 가까운 지하방에서  노예로 살면서  그의 아이 다섯을 더 낳았다. 둘은 일찍 죽고 둘은 21세가 되어 자유의 몸으로 어디론가 사라졌고 둘은 토마스 제퍼슨이 사망할 때까지 같이 살다가 사망 후 자유인으로 이곳을 떠났다. 샐리와 아이들에게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던 홍길동보다 더 잔혹한 세월이었다.

 제퍼슨이 대통령 재직 시 한 언론인이 우체국장을 시켜 달라고 청탁했다.  제퍼슨이 거절하자 그는 노예와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다는 기사를 신문에 실었다. 제퍼슨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DNA 검사라는 것이 없었을 때는 설마 하던 이야기가 이제는 제퍼슨 재단에서 공식으로 인정하는 제퍼슨의 자손으로 판명되었다.

그는 살아 있을 동안 단 한 번도 샐리 헤밍스나 그의 6명의 아이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

자신의 아이가 21세가 되었을 때 둘을 풀어 주고 난 후  그의 노예 장부에는 "도망갔음(Run Away)"이라고 적어둘 만큼 철저했다. 

위대한 정치인이었던 제퍼슨의 어두운 뒷모습이다. 

요즈음 같으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말한 제퍼슨에게는 많을 때는 600명의 노예가 있었다. 

자기 땅 5000 에이커와 장인에게서 물려받은 5000 에이커의 땅과 농장을 운영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인력이었다.

노예제도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해 노예의 수입은 금지했지만 자기 자신이 노예를 포기하지 못하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했을 것으로 상상된다.




이런 집에서 노예들이 살고 일했다.


멀베리 로드에는 못을 만들던 대장간, 옷감을 만들던 집, 노예들이 일하던 집들이 있다.

그는 그 당시 노예들을 채찍질하는 일을 직접 하거나 하라고 시키지는 않았지만 관리인이 하는 것은 묵인했다고 한다.



"Privy Vent"가 무언지 궁금했는데...

집안의 간이 화장실에서 냄새를 뽑아내는 환기통이란다.

그의 건축 솜씨가 엿보인다.

그는 서재와 침실 사이에 침대를 두고 언제라도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했고  천정에서 자연광이 들어오도록 지붕을 유리창으로 만들었다.

미국의 독립 헌장을 발표한  독립기념일 50주년 되던 날 아침 "오늘이 7월 4일인가?" 묻고 그렇다고 하자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는 죽기 전 자신의 묘비를 직접 디자인하고 묘비에 새길 글도 직접 지었다.





독립 헌장을 쓰고,

버지니아에 종교의 자유법을 제정하고,

버지니아대학을 설립한 토마스 제퍼슨 여기 묻히다.... 


이것만이 그가 남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은 일이었나 보다.

대통령을 지냈다거나 다른 정치적인 업적은 새기지 않았다.


제퍼슨은 그 화려한 이력에도 불구하고 멋쟁이 생활을 하느라 말년에 빚에 시달렸다. 

그는 그토록 아끼던 그의 장서 6500권을 국회 도서관에 23,950불에 팔았다. 

그가 사망한 후 그를 돌보던 딸과 사위는 땅과 집과 노예들을 모두 팔아  남은 빚 10만 7천 불을 갚고 이곳을 떠났다. 그 후 몇 사람의 손을 거쳐 지금은 그와 아무 상관없는 사립재단이 소유해서 관리하고 있다


그의 무덤에서 비지터센터까지는 버스로 내려올 수도 있고 걸어 내려올 수도 있다.

 한 인간으로서의 그를 생각하며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위대하다는 건 과연 무얼까?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약한 부분은 있게 마련이지.




자신의 집을 보러 온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토마스 제퍼슨.


그 옆에 다가가 서 보았다.

마운트 러시모어에서 멀리 위대하게 느껴졌던 그가 

여기서는 한 인간으로 느껴졌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All men are created Equal)"라고 그가 말했으니까. 그에게 묻고 싶었다. "지금의 미국은 당신이 설계했던 대로 가고 있나요?"



몬티첼로에서 나와 그가 설립한 버지니아대학에 들렀다.

날씨가 좋은 날은 몬티첼로에서 이곳이 보인 다고 한다.

노후에 그는 망원경으로 이 건물을 보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학생 기숙사. 이 방은 에드가 알란 포우가 한때 살았던 기숙사 방이라고 한다.


이 날, 개학을 앞두고 

미국 역사로 보면 아주 오래된 학교 기숙사에 젊은 학생들이 이사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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