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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질경이 Oct 02. 2022

오클라호마,괜찮니?


넓은 대지에는 유채가 끝없이 펼쳐져있었다.

여기는 옛날부터 텍사스에서 시카고까지 가는 소몰이 길이었다.

오클라호마 하면 생각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그 첫 번째가 어려서 신나게 들었던 

"오~~~ 클라호마 Where the wind comes sweeping down the plain...  "

"Oh, what a beautiful morning..." 하는 리처드 로저스와 오스카 해머스타인의 신나는 뮤지컬이다.


두 번째가 인디언 제거 작전으로 19세기 미국 동 남부에 살고 있던 인디언들을 강제로 몰아내어 

끌고 간 "눈물의 길(Trail of Tears)"의 슬픈 종착역이었다는 것이다.


1830년 고향에서 쫓겨나 맨발로 걸어온 사람들이 자기들만의 새 나라를 세워 보려 했던 곳,

1930년대 극심한 가뭄 "Dust Bowl"로  고향을 버리고 66번 길을 따라 떠나야 했던 존 스타인백의 소설 "분노의 포도"의 배경이 되었던 분노의 고장


1830-1850년 미 동남부 지역에 살던 6만 명이 몇 천년을 살아온 땅에서 쫓겨나 "눈물의 길(Trail of Tears)"을 맨발로 걸어 여기까지 왔다. 여기까지 오지 못하고 길에서 죽은 사람들을 헤아릴 수도 없었다.

1830년 미국이 독립한 후 30년,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이

"인간은 모두 평등하게 태어났다"라는 이 나라의 건국이념에 어긋나는 흑인 노예제도와 

원래 이곳에 살고 있던 이 땅의 주인 원주민들이었다.

예리한 칼이라는 별명을 가진 앤드류 잭슨 대통령은 모든 인디언들을 미시시피 강 서쪽으로 이주시키기로 결정하고 

체로키, 치카소, 크리크, 세미뇰, 촉타우족들을 오클라호마로 보냈다. 그 당시 오클라호마는 그들에게는 쓸모없는 땅이었다.


1831년 겨울 체로키 인디언들 17000명과 그들의 흑인 노예 2000명이 그들의 고향 스모키 마운튼에서 쫓겨나나 오클라호마로 가야 했다. 가는 동안 백인들이 살고 있는 마을을 만나면 인가를 지나지 못하게 해서 마을 주변을 돌아서 가야만 했다. 강을 만나면 나룻배가 태워 주질 않아서 기다리다 얼어 죽고 뱃삯을 내고 타길 원하는 인디언들에게는 10배 이상의 뱃삯을 받아 냈다고 한다. 그 사이 4000명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었다고 한다.

그 당시 이 광경을 보고 본국에 돌아가 "미국 민주주의"라는 책을 쓴  프랑스의 역사학자 토크빌은

"그 모든 광경은 거역할 수 없는 마지막 이별, 예컨대 파멸의 분위기가 담겨있었다. 그것은 목이 메어 차마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나라가 없고 민족으로서의 생명도 곧 다 하게 된 것이다" 


1890년 경에는 30 부족 정도의 인디언들이 모여 살게 되었다.

얼마 전  미국에서는 자기 개를 발로 찬 사람이 감옥에 간 일이 있다. 세상은 참 많이 변했다.

 그들은 150년 전 셀 수도 없는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그 사건에 대해서는 이미 다 잊은 듯해 보인다.


오클라호마로 간 인디언들이 겨우 자리 잡고 농사지으며 살려고 할 때 

유럽에서 온 백인들도 기회를 찾아 서쪽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1803년 "루이지애나 구입" 당시 프랑스로부터 이 땅을 사 드린 후  내 버려두었던 이 땅을 토지측량가들이 다시 측정하던 중 텍사스의 북쪽 경계와 캔자스의 남쪽 경계에 냄비 모양의 땅 중 손잡이 부분이 주인 없는 땅이라는 것이  발견되었다.

밀 농사가 잘 되는 이 주인 없는 땅에 사람들이 몰려왔다.  땅에 떨어진 돈을 "먼저 본 사람이 임자"인 것처럼  "먼저 본 유럽에서 온 사람들"이 임자가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오클라호마는 "Sooner State"이다. 쓸모없는 땅인 줄 알고 인디언들을 몽땅 이주시켰는데 쓸모 있는 땅이 되어 마음이 변한 정부는 이제는 백인들을 이 땅으로 이주시키기 위해 에이커당 $1.25에  인디언들에게서  땅을 사들여 백인들에게 $1.25에 되팔았다.  

땅의 소유권이라는 개념이 없던 인디언들은 작은 돈에 그냥 넘겨주었다.

주 전체를 "세코야"라는 이름의 인디언 국가로 만들어 인디언을 격리시키려던 정책은 바뀌어 이 땅도 기회를 찾아 밀려 들어온 백인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1907년  미국의 46번째 주로 승인되었을 때 인구가 150만이나 되었다.


1930년대, 경제 공황과 더스트 볼(Dust Bowl) 때문에 오클라호마의 많은 농부들이 66번 길을 따라 캘리포니아로 갔다. 

"우리는 인디언을 몰아내고 뱀들을 잡아 죽이며 땅을 일구었어..." 존 슈타인 백의 '분노의 포도'에서 할아버지가 한 말이다.


이런 차를 타고 

이런 길을 달리다

이런 주유소에서 기름을 채웠다.

그들도 가다가 캘리포니아까지 가지 못하고 길에서 죽는 사람도 많았다. 어느 마을에서는 '오키(오클라호마 사람을 비하하는 말)는 들어오지 말라'는 간판을 세워 놓기도 했다.





1995년 4월 19일 9시 01분

 티모시 맥베이라는 사람이 트럭 가득히 폭탄을 싣고 시청을 폭파했다. 168명이 사망했다.

목숨을 잃은 168명을 상징하는 빈 의자들.

폭파 당시 죽은 줄 알았던 나무가 다시 살아나 지금은 해마다 그 씨를 받아 미국 전역의 공원에 나누어 주고 있다.



40번 고속도로 위에 만들어진 오클라호마의 상징 가위...  "Scissortailed Flycatcher"라는 새 모양의 조형물이다.

1830년 고향에서 쫓겨나 맨발로 걸어온 사람들이 새 나라를 세워 보려 했던 곳,

1930년대 극심한 가뭄 "Dust Bowl"로  고향을 버리고 66번 길을 따라 떠나야 했던 존 스타인백의 소설 "분노의 포도"의 배경이 되었던 분노의 고장을 보고 복잡한 도심 한가운데서 점심 먹을 곳을 찾으려니 날은 뜨겁고 정신이 없다.

구글 맵에서 검색해 별점이 좋아 찾아 간 멕시칸 식당은 현찰만 받는 푸드트럭이었다.  남의 주차장 나무 그늘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번 여행 중 가장 가격 좋고 맛도 좋았다. 15불에 두 사람 점심 먹고 남아서 저녁까지 해결했다.


이 땅의 원래 주인이었던 인디언들의 눈물 위에 세워진 오클라호마주.

State Motto는 "Work conquers all things" 


"Is Oklahoma Really OK?"라고 물으신다면...

오클라호마의 모든 자동차 번호판은

"Oklahoma is OK"라고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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