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그리운 캘리포니아

by 질경이

봄비가 가늘어서 방울도 짖지 못하더니

한 밤중에 가느다란 소리가 들려온다

눈 녹아 남쪽 시내에 물이 불어나니

새 싹들이 많이도 돋아 났겠다.

-정몽주-


고개 위의 꽃

"붉다"는 한 단어만 가지고

눈앞의 모든 꽃을 말해서는 안 된다.

꽃술에는 많고 적은 차이가 있으니

꼼꼼히 하나하나 살펴보아라.

-박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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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버들 빛은 실마다 푸르고

복사꽃은 점점이 붉다.

-김부식-



복숭아나무가 비 온 뒤 꽃을 피웠다.

비가 개인 후 이른 아침 공기가 맑다.

맑은 공기, 붉은 꽃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다.



김훈은 자전거 여행에서 "봄의 흙은 헐겁다"라고 표현했다.

봄의 흙을 살금살금 밟으면 그 말을 실감할 수 있다.

정말로 봄날의 땅은 보드랍고 솜이불처럼 폭신폭신하다.

몸을 낮추어 자세히 보면 서서는 볼 수 없는 아주 많은 것들이 땅에서 올라온다.


해마다 봄 꽃이 피지만 해마다 그 모습이 다르다. 노란 꽃이 온 땅을 덮는 봄도 있고

보리같이 까슬까슬한 풀이 온 땅을 덮을 때도 있다. 유난히 많은 꽃이 온 땅을 덮어 봄이면 하루에도 몇 번씩 할 일 없이 마당을 서성이며 봄을 온몸으로 느꼈다.

추위가 가시기 전 2월에는 연보라 꽃들이 피어났다.


그 뒤를 이어 녹두알 만한 하얀 꽃들이 눈이 내려앉듯 살포시 퍼져 나갔다.

새벽에 창문을 열고 눈이 왔나.. 하고 잠시 착각하기도 했다.

그러더니 캘리포니아 파피가 불꽃처럼 산 위에서 언덕 아래로 밀려 내려왔다.


산에 주황색 물감을 뿌려 놓은 것처럼 하나하나의 존재감은 없어 보이는데 자세히 보면 작은 꽃송이 안에 또 다른 세상이 들어앉아 있다. 일주일이면 이 화려한 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다.


다음은 샛노란 꽃들 차례다.

며칠 전 집에 왔던 손님이 발을 내 딛기가 미안하다고 했다. 나도 그렇다

이 작은 꽃에도 꿀이 있는지 벌들이 날아든다.

단지 숫자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이름도 없이 피었다가 사라지는 작은 꽃들이

잠시 세상에 다녀 가면서도 좋은 일 하나 하고 간다.

이 꽃들은 땅 속에서 여름의 뜨거운 햇살에도, 지독한 가뭄에도 오래오래 참고 기다렸다가

흙이 적당히 헐거워진 어느 봄날 기적처럼 헐거운 흙을 비집고 세상으로 나왔다.

지금도 이 땅속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저한테 맞는 때를 기다리고 있을까?

꽃들만 봄을 맞은 것이 아니고 짐승들도 봄을 맞았다.

문밖을 나가 신발을 신으려는데 신발 속이 뭉클했다. 이 녀석이 내 신발 속에 들어앉아 있어 하마터면 저는 압사할 뻔, 나는 충격 사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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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이 열심히 입으로 물어 날라 집을 짓고 알을 품었다.

토끼도 그 숫자가 마구 늘어났다.

사막의 봄은 이렇게 아름답다가 한순간 사라져 버린다.


무지개처럼

그리고 급하게 땅속으로 들어가 또 다른 때를 기다릴 것이다.

짧은 봄을 보내고

나는 땅속에 숨어 버린 수많은 생명들이 다시 나올 날을 또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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