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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질경이 Apr 24. 2023

키웨스트와 헤밍웨이




플로리다의 에버글레이즈 국립공원 입구에서 출발해  산호초로 만들어진 섬 마흔두 개와  그 섬들을 이어주는 마흔두 개의 다리를 건너  세 시간쯤 차로 달리면 미국에서 가장 남쪽 끝, 섬이면서  섬 같지 않은 키웨스트가 있다. 




자동차 내비로 보면 이렇게 생겼고 

비행기 타고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이렇게 생겼다 



 키 웨스트는 그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세상에서 제일 작은 술집도 있고 일 불짜리 돈을 빈틈없이 붙여놓은 카페도 있다. 그리고 꽤 유명한 사진작가들의 갤러리도 있어 걸어 다니며 볼 것이 다양하다. 


키 라임파이를 잘 만드는 카페도 있도 헤밍웨이가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면 술을 마시던 슬라피 조(Sloppy Joe)도있다. 지도를 들고 걸어 다니다 잠시 서서 두리번거리면 누군가 다가와서 "어딜 찾니?" 하며 묻기도 한다.


걷다가 다리 아프면 지나가는 자전거가 끄는 인력거를 타도 되고 아무 카페에나 들어가 콩크를 안주 삼아 시원한 것 한잔 마시며 잠시 쉬어 가도 된다. 

그곳에 가면 살고 있는 사람이나 여행 온 사람이나 다 농담하는 것 같다.

우리가 묵었던 호텔은 이름이 "Not Your Average Hotel",  농담 같은 이름이다.




 해 질 녘 바닷가에서는 선셋 축제가 벌어진다.


바퀴가 하나뿐인 높은 자전거에서 아슬아슬하게 불놀이를 하는 남자는 손뼉 치는 관중에게 박수만 치지 말고 돈을 놓고 가라고 소리 지른다. 줄타기를 하는 사람도 있고 긴 작대기 위에 올라서서  걸어 다니는  청년도 있다. 해가 바닷속으로 살그머니 내려가는 순간에는 달콤한 키스로 사랑을 확인하는 연인들도 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헤밍웨이가 30대에  살았던 집이 있다.


별채에는 그가 읽던 책들과 글을 쓰던 타이프라이터가 그대로 책상 위에 놓여 있다.

 그가 30대에 두 번째 아내와 살던 집은 그 당시로는 호화 저택이었다. 방마다 유럽에서 가져온 귀한 가구들로 꾸며져 있고 방 하나에는 그의 네 명의 부인들과 아이들의 사진이 걸려있다.  사람들은 만져 볼 수도 없는 식탁과 침대 위로 그가 키우던 고양이의 후손들이 자유롭게 날아다녔다. 고양이들 위해  특별히 주문해 만든 자기 그릇도 진열되어 있다. 

그는 아내의 삼촌이 8000불을 지불하고 결혼 선물로 사준 집에 2만 불 들여 수영장을 지었다. 그 당시로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그의 주머니에 있던 마지막 일전까지 털어 지불했다고 한다.  


 1930년대는 미국의 경제 공황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직업도 없이 가난에 허덕이던 시절이었다. 

CCC라는 뉴딜정책의 하나로 17세에서 28세 되는 청년들이 집을 떠나 텐트에서 합숙하며 험한 곳에 길을 내고 국립공원이나 주립공원에  캠핑장, 전망대, 계단을 건설하며 한 달에 30불 받았다. 그 30불에서 5불만 본인이 쓰도록 허용되고 나머지 25불은 무조건 집에 있는 가족에게 송금되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헤밍웨이는 철물점 주인, 술집주인, 자동차 정비공, 요리사 등 다양한 친구를 만들어  "Mob"이라고 부르며  같이 술 마시고 아프리카로 사냥 가고 스페인에 가서 투우를 즐기는 등 거친 취미를 즐겼다.

그는 마초처럼 행동했다.

스무 살에 남의 나라 전쟁에 뛰어들어 앰뷸런스 운전 두 달 하고  부상을 당해 여섯 달을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아그네스라는  연상의 간호사와 사랑에 빠져 구혼을 했으나 거절당하고 어린 나이에 전쟁의 부조리와 실연을 경험했다. 그는 아그네스와 아주 비슷한 여자를 만나 결혼했지만 얼마 안 가 새 여자가 생겨 이혼한다. 두 번째 부인과 미국에 돌아와 와이오밍과  키 웨스트를 오가며  "무기여 잘 있거라"를 썼다. 아내가 난산으로 제왕절개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그는 무기여 잘 있거라의 마지막 부분 캐더린이 아기를 낳다가 죽는 대목을 썼다고 한다.


집안에 있는 작은 기념품점에서 "노인과 바다" 한 권 사 가지고 나왔다. 



그가 낚시를 갔었다는 드라이 토투가스 섬에 갔다. 


지금은 두 시간 반이면 가지만 그 당시에는 10시간이 넘게 걸렸다. 내가 가던 날도 파도가 높아 상당히 고생스러웠다. 1930년대의 낚시 배로 그 섬에 간다는 것은 목숨을 건 모험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풍랑을 만나 17일 동안 날 생선과 비상식량으로 견디어 내었다.




그가 자주 가던 술집 "슬라피 조"에 갔다. 무대에서는 4인조 밴드가 흥겹게 노래하고 연주한다. 벽에는 온통 헤밍웨이에 관련된 것들이다. 그가 낚시하는 사진들과 사람보다 더 큰 말린 이 걸려있다.


벽에서 헤밍웨이가 내려다본다. 이 동네에 살 때 그는 30대였을텐데 50대의 노인 헤밍웨이가 내려다본다. 노인과 바다를 발표한 라이프 잡지의 표지에 나왔던 사진이다.

왠지 우울해 보이고 무언가  못 마땅한 표정이다.


무기여 잘 있거라에서 전쟁에 회의를 느끼고 탈영한 그는 이렇게 독백한다.

"나는 한나라의 군대가 후퇴하고 또 다른 나라의 군대가 전진하는 현장에서 배를 깔고 엎드린 채 그 공허함을 목격했지"

"나의 분노는 그동안의 의무감과 함께 강물에 씻겨 사라졌다"

"나는 생각하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었다. 나는 먹도록 만들어진 존재였다.

아, 정말 그래 먹고 마시고 캐더린과 함께 잠들고 싶다."

키 웨스트에서의 헤밍웨이는 "무기여 잘 있거라"에서 그가 한 독백처럼 그렇게 살았다.



 집에 돌아와  "노인과 바다"를 읽었다.

 노인은 오두막에 살며 우유 깡통에 커피를 마시고 소년이 식당에서 얻어오는 신문을 읽는다.

신문과 입고 있던 바지를 둘둘 말아 베개 삼아 잠을 자고 먹을 것이 없으면서도 소년에게는 먹을 것이 있다고 걱정 말라고 허세를 부린다.  


색 바랜 아내의 사진을 보면 더 외로워진다고  벽에서 떼어낸다.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85일 만에 큰 고기를 잡아 배에 매달고 오며 "고기를 죽이는 건 죄가 될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하다가 "아니야 그건 내가 살기 위해서이고 사람들을 먹이기 위함이니까 괜찮아 그게 만일 죄라면 모든 것이 다 죄가 될 거야.. " 혼자 중얼거린다.


상어고기를 날로 씹어 먹으며 소금이 있었으면.. 레몬 한쪽  있었으면.. 하는 소박한 생각을 한다. 

어부의 자존심을 다해 잡아온 자신의 낚싯배 보다도 더 큰 마린을 보며 잠시 부자가 되는 상상도 해 보았지만  상어에게 다 빼앗겼다. 


30대에 그가 쓴 "무기여 잘 있거라"에서는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인 캐더린과 비 오는 밤  전쟁을 피해  밤새 노를 저었다.

캐터린과 아기는 죽고 그는 혼자 남았다. "아무것도 변한 건 없었다"


나는  그 책을 편한 의자에 앉아 남의 사랑이야기, 전쟁 이야기 읽듯 읽었다.


50대의 그가 쓴 노인은 고기를 잡아 4일 동안 죽도록 노를 저어 집에 돌아왔으나 남은 건 머리와 뼈와 꼬리뿐이었다. 

 "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be defeated."  

나는 내가 노인의 작은 낚싯배에  같이 타고  거대한 물고기와 배 고픔과 목마름과 싸우듯이 읽었다.


키 웨스트의 사람들이 왜 늙은 헤밍웨이를 가는 곳마다 걸어 놓았는지 이해할 것 같다.

그가  "노인과 바다"를 발표했을 때 내가 한 살이었다.

지금 내가 노인이 되어 헤밍웨이의 노인을 생각하며.

나는 지금 무엇을 움켜쥐고 힘들게 항해하고 있는지 돌아본다


 헤밍웨이는 키웨스트에서 살던 허영심과 욕망에 방황하던 갱단이 아닌 젊은 시절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모든 것을 잃은 겸허한 노인으로 생을 마감했다.


젊은 헤밍웨이를 읽은 후 그의 저택을 보고 그의 젊었을 적 행동으로  잠시 가졌던 조금 불편했던 마음이 노인과 바다를 읽고  그를 이해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지금의 나보다 젊은 나이에 스스로 마감한 그의 죽음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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