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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질경이 Jun 24. 2024

이른 아침 인사동에서

 엄마는 김치를 담그면  배구공보다 작은 항아리에 조금 덜어 꼭꼭 눌러 담아  보자기에 싸서 내게 주며 언니에게 갖다 주라 했다. 그땐 플라스틱 밀폐용기도 비닐봉지도 없었다. 냉장고가 없던 때라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그 일을 했던 것 같다. 언니는 인사동에서 작은 편물점을 하고 있었다.   지금 서촌이라 불리는 필운동에서 중앙청 앞길을 건너 안국동 길을 지나 언니네 가게까지 걸어갔다. 인사동 길로 접어들면 골동품 가게들이 있어 어떤 양반집에서 나왔는지 모를 붓, 벼루, 오래된 책들과 그림, 그리고 항아리들이 유리창안에서 팔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니네 가게에는 예쁜 색깔의 털실들이 작은 유리 진열장안에 있었다. 여인들은 그중에서 실을 골라 아이들 것이나  자신의 스웨터를 맞추어 입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10년쯤 되었을 때고 그 사이 4 19와 5 16, 그리고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던 화폐개혁이 있었다.  엄마는 그 시절 연탄불에 퍼콜래이터를 올려놓고 아버지의 커피를 끓였고, 나는 그즈음 아버지가 사 온 라면이라는 음식을 생전 처음 먹었다. 60년 전쯤 일이다.





 이른 아침 호텔을 나와 인사동 길을 걸었다. 전날 저녁 붐비던 것과는 다르게 조용했다. 문을 연 상점도 없었다. 언니의 가게였던 자리는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기념품가게가 있다. 철봉 같은 막대기에 옷감 몇 점 걸어 놓고 맞춤옷을 만들던  언니 친구의 양장점은 떡집이 되었다.  커피를 한잔 마시고 싶어 밝은 색 그림들을 걸어 놓은 화랑들을 지나 수송동 쪽으로 걸었다. 아메리카노가 1000원이라는 간판이 붙은 커피집이 있어 들어갔다. 키오스크에서 주문을 하게 되어있다. 젊은이들이 출근하는 길에 줄을 지어 키오스크에서 주문하고 카운터에서 집어 들고 빠르게 나갔다. 해외카드로 1달러가 안 되는 천 원을 쓰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카운터에 있는 청년에게  현금 내고 커피 한 잔을 살 수는 없느냐고 물었다. 정확한 금액의 현찰만 받는다고 했다. 다행히 주머니에 천 원짜리 한 장이 있었다. 커피 한잔을 사들고 길로 나왔다.




 길에 학교 가는 아이들이 안 보였다. 내가 이 동네에서 학교를 다니던 1960년 대에는 서울 시내의 거의 모든 중 고등학교가 이 근처에 있었던 것 같았다.   나 다니던 학교를 비롯해 이 근처에 있던 학교들은 어디론가 이사를 가고  높은 빌딩들이 들어서 있다. 어깨를 부딪히며 걸어 다니던 학생들 대신 거대한 빌딩 안으로  젊은 사람들이 빨려 들어갔다.


 편의점이 있어 들어갔다. 호텔에서 먹을 라면과 김치 한 봉지를 샀다. 손바닥만 한 작은 봉지에 든 김치가 8900원이다. 내가 이 동네에서 중학교 다닐 때 한 학기 등록금이 1350원이었다. 계산을 하는데 점원이 봉지가 필요하냐고 물었다. 그냥 주는 거냐고 물으니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국가에서 정해준 가격이 490원이라고 한다. 그 중년 남자는 '국가'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아주 비싼 김치가 든 비싼 플라스틱 봉지를 들고 호텔로 돌아가다 무심코 바라본  화랑 유리창에 하얀 머리의 노파가 플라스틱 봉지를 들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 앞에 희미하게 얼굴이 가무잡잡하고 눈이 동그란 여자 아이가  보자기에 싼 항아리를 들고 엄마 심부름을 가고 있다.   


60년 세월이 이만큼이구나 느껴지는 나만의 시간여행을 해 본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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