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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질경이 Oct 14. 2020

 이겼다,     빼앗겼다,    도둑맞았다.

게이트웨이 국립공원

미주리주의 세인트 루이스, 미시시피 강가에 1965년부터 서 있던 이 아치는 2018년 7월 3일 60번째로 미국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미시시피 강의 서쪽에 위치한 미주리주의 세인트 루이스 시는 미국이 아직 영국의 식민지였을 1764년 미국도 영국도 아니었다. 프랑스어를 쓰는 사람들이 모피 무역을 하던 곳이다.

미시시피강 가에서 나오는 농산물이 멀리 유통되려면 배에 싣고 루이지애나의 뉴 올리언스를 통과해야 했다. 그곳은 프랑스 영토여서 프랑스의 허가를 받아야 통과할 수 있었다.

미국은 그 땅이 필요했고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과  영국과의 전쟁으로 자금이 필요했다.



가운데 하얀 부분이 1500만 달러에 사들인 땅이다. 


1803년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은 루이지애나에서 캐나다 국경까지의 땅을 나폴레옹으로부터 사 들여 미국을 두배로 크게 만들었다. 그 이전에는 미시시피강 동쪽만 미국이었다. 이 역사적인 일을 “루이지애나 매입(Louisiana puchase)”이라고 부른다. 그 당시는 비난도 많이 받았지만 지금은 제퍼슨의 가장 큰 업적으로 기록된다. 그런데 대통령뿐 아니라 어느 누구도 이 거래가 합법적인지 1500만 불을 주고 사들인 땅이 어디까지 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때 사들인 천오백만 불어치 땅은 루이지애나, 아칸소, 오클라호마, 미주리, 캔자스, 콜로라도의 동쪽, 와이오밍, 네브래스카, 아이오와, 노스, 사우스 다코다, 몬타나 그리고 캐나다의 일부로 214만 평방 킬로미터(828000 평방 마일), 남한의 21배나 되는 넓이다. 그 당시 이 넓은 땅에 인구가 6만 명이었고 그중 절반은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 노예였다. 

루이스와 클락이 제퍼슨의 지시를 받고 서부로 탐험을 시작한 곳이 바로 세인트 루이스다.  서부로 가는 개척자들이 모두 여기서 출발했다.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기 훨씬 전부터 개척자들은 캘리포니아를 원했다. 그곳은 태평양으로 가는 관문이고 아시아를 향해 첫발을 내딛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을 게이트웨이, 관문이라고 부른다.


1935년 역사적 특성을 살릴 수 있는 기념비를 세우기로 하고 디자인을 공모했다. 당대의 건축가 172명이 공모했다. 그중에는 유명한 건축 회사의 대표 사아리넨 (Saarinen )이 있었고 아버지의 그늘에서 그림자처럼 일 하던 젊은 아들도 있었다. 심사는 이름은  없이 응모 번호만으로 했다. 

당선자가 발표되어 사아리넨의 집으로 전보가 도착했을 때 가족은 당연히 아버지가 당선된 것으로 믿고  샴페인 파티를 열었다. 일설에는 사흘간 파티를 했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몇 시간이라고도 하지만.. 나중에 당선자가 아들이라는 소식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샴페인을 따라 주었다는 뒷 이야기도 있다. 루스벨트 대통령도 승인하고 아이젠하우어 대통령도 승인한 일이었지만 예산이 부족했다. 기념재단은 록펠러와 포드 재단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국립공원을 위해 언제나 큰 도움을 주었던 록펠러재단에서 이 일에는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 의외다.


1965년 토마스 제퍼슨의 업적을 기념하는 아치가 완공되고 

2018년 7월 3일 국립공원으로 지정될 때까지 이곳은 제퍼슨 영토확장 기념관( Jefferson National Expansion Memorial)이었다.


이 아치의 높이는 192미터, 2 에이커의 땅에 역사적 특성을 살려 지었다.


양쪽 기둥은 동 서로 서있고 기둥의 맨 밑은 16미터, 맨 위는 5.2미터이다.

바람이 세게 불면 46 센티미터 정도로 흔들리고 시속 150마일에도 견딘다고 한다.

양쪽 다리에 0.4 밀리미터의 오차만 있었어도 맨 윗부분이 만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트램을 타고 맨 위까지 올라갈 수 있다.


일 년에 백만 명이 이 트램을 타고 맨 위까지 올라간다.

트램은 다섯 명이 탈 수 있는 작은 케이블카처럼 생겼다.

올라가는데 4분 내려오는데 3분 걸린다. 꼭대기에 올라가면 좁고 긴 방이 나온다.



강 건너는 일리노이 주.


바로 아래는 세인트 루이스 시내,

정면에 보이는  법원이 드레드 스콧 판결을 내린 역사적인 장소다.

드레드 스콧은 노예였는데 자신이 노예 금지 주에서 4년을 살았으니 자유를 달라고 법원에 고소를 한 사건이다.

법원에서는 그가 미국 시민이 아니라서 고소할 자격조차 없다고 판결했다.



1840년에서 1860년 사이 미국은 영토확장을 위해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원래부터 살아온 인디언들은 "도둑맞았다(STOLEN)"라고 한다. 

 콜럼버스의 뒤를 이어 멕시코와 미국의 서 남부를 차지하고 있던  스페인 사람들은 "빼앗겼다(ROBADO)"

 그다음에 와서 다 차지한 사람들은 "이겼다(WON)"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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