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사(紫沙) 소독

by 심지훈

뭇이에게 가을은 독서지절(讀書之節)이라지만 내게 그것은 다반사요, 특별히 다도지절(茶道之節)이다.


마침 어제 아침 당근마켓으로 보이차 우리는 찻주전자 자사(紫沙)가 착한가격에 나왔다. 자사를 찻주전자라고 했지만, 우리네 녹차 우리는 그것과 달리 다기(茶器) 이상의 예술품이라 해야 맞다. 자사만 수집하는 수집가가 있을 정도로 자사는 사람을 홀리는 황홀한 예술품이다.


자사는 중국 장쑤성(江蘇省‧강소성) 남부에 자리한 유명한 도자기 도시 이싱(宜兴‧의흥) 것을 쳐준다. 의흥자사를 보면 새삼 자연의 신비에 감탄하게 된다. 지층마다 모래의 색이 달라 붉고, 노랗고, 푸르고, 녹빛과 자줏빛을 띤다. 붉은 모래로 만든 자사를 홍니(紅泥), 홍니보다 옅은 색의 자니(紫泥), 노란 모래로 만든 자사를 단니(緞泥), 녹색 모래로 만든 자사를 녹니(綠泥)라고 한다. 검은 빛깔의 흑니(黑泥), 검은 녹빛의 묵록니(墨綠泥)도 있다.


의흥지방에서 특유의 니료(泥料)로부터 일단 다양한 색의 자사가 나오고, 그다음은 누가 만드냐에 따라 저가와 고가의 자사가 된다. 이름난 작가가 만든 자사는 100만원을 호가한다. 자사 크기에 따라 겨우 50~300ml의 물을 담을 뿐인 걸 감안하면 가격이 상당한 것이다. 하나 예술의 값이 어디 크기로만 가늠될까. 되레 녹차 주전자에 비해 자사는 크기가 작기로 화려한 예술성이 더욱 도드라진다.


나는 한눈에 봐도 물건이다 싶은 자사를 지체 않고 구매했다. 실제 받고 보니 20만원 상당의 자사였다. 이걸 단돈 1만원에 득했으니 아침부터 횡재수가 아닐런가. 게다가 판매자는 “중국대사에게 선물받은 새것”이라고 했다. 룰루랄라 집으로 가져와 신명에 겨워 자사 소독을 시작했다.


그러다 이내 인연법(因緣法)을 생각하고, 물유각주(物有各主)의 오묘함을 떠올려야 했다.


새 자사는 팔팔 끓는 물에 굵은 소금을 한 수저 넣고 30분간 끓인 뒤 사용하는 게 좋다. 자사 안에 있는 불순물을 소독하는 과정이다. 소금을 터무니없이 많이 넣으면 소금 성분 때문에 자사에 소금의 허연 색이 들어 변질된다. 그럼 과유불급의 우를 범하는 꼴이니 안 하니만 못하게 된다.


내가 횡재수로 얻은 자사는 홍니(紅泥)다. 바닥은 평편하고, 몸통은 문양 없이 매끄럽다. 키가 조금 낮은 편인 것이 마음에 든다. 200ml 물이 들어가는데 출수(出水)도 좋다. 소리는 ‘탁탁’이 아니라 ‘챙챙’한다. 고급 자사는 뚜껑으로 입구를 가볍게 두드리면 날카로운 유리 맞닿는 소리가 난다. 이만하면 빠질 게 없는 자사다.


문제는 소독을 마치고 차를 우리기 직전에 벌어졌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다가 자사 뚜껑을 개수대에 떨어뜨렸고, 개수대에 있던 물잔과 부딪치면서 뚜껑의 이가 날아갔다. 무척 속이 상했다. 하나 이왕지사 벌어진 일, 어쩌겠는가.


‘홍니야, 니야, 너와 나의 인연은 이리 시작되는구나. 안타깝고, 미안하다. 그나마 네 머리(뚜껑)가 두 동강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구나. 홍니야, 니야, 물유각주라 했니라. 물건에는 저마다의 주인이 따로 있는 법이랬다. 너의 주인이 내게 너를 넘겼으니 이제 내가 주인인바 창졸간 이가 하나 빠져 흠이 생겼지만, 너는 너인 채로 참으로 어여쁜 아이란다. 우리 잘 지내보자꾸나.’


나는 어여쁜 홍니로 30년 된 보이주차(普洱柱茶)를 우렸다. 이 보이주차로 말할 것 같으면 내 보이차 스승 양보석 선생님께서 5~6년 전 “귀한 차를 구했다”며 무려 톱으로 잘라 한지에 싸서 큰 검정봉다리에 담아준 것이다. 무게는 2kg.


보통 보이 병차(餠茶) 1편의 무게가 357g인 걸 안다면, 보이주차가 얼마나 범상치 않은지 짐작할 것이다. 원 보이주차는 높이가 1m50cm다. 선생님은 이 보이주차를 <보석다관‧대구 수성구 2군사령부 맞은편>에 kg당 1억원에 내놓았다. 선생님 말씀으론 소장한 보이차 중 최고급이다.


보이주차는 세월의 힘을 과시하듯 9탕을 우려도 탕색에 숙질 기미가 없다.


나는 이 보이주차를 오늘 아침 청‧홍색 자개텀블러 2개에 담아 아내에게 주었다. 이달 1일부로 아내 직장이 통계청에서 국가데이터처로 승격한 기념으로, 매일 야근인 아내에게 약성(藥性) 좋은 주차를 마시고 힘내시라고 타주었다.

/심보통 2025.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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