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상물과 무정물

by 심지훈

즐겨 구경하는 물건을 완상물(玩賞物)이라 하고, 나무나 돌처럼 감각이 없는 물건을 무정물(無情物)이라고 한다. 취미나 애장품은 무정물이 대개 완상물이 되기 마련이다.


내년 여름을 기다리며 지난 9월 입양해 온 치자나무에서 2주 전 새하얀 치자꽃이 피어나자 나는 정말이지 뛸 듯이 기뻐 수시로 치자꽃을 찾았다.


열매 맺어야 할 때 기적처럼 피어난 딱 한송이 치자꽃은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것들보다 귀하고 예뻤다. 그런 나를 아내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그렇게나 좋아?”

“응!”


라온이도 초청하고, 바론이도 초청하고, 아내도 초청했다. 그 앞에서 향도 맡아보라 하고, 살짝 만져보게도 했다. 겉잎 안에 속잎이 이중으로 난 것과 그 잎들 속에 노란 씨앗이 뾰족 솟아난 것은 찬찬히 살피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다. 또 그 은은달콤한 치자꽃 향은 직접 맡아봄으로써 얼마나 황홀한지를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내게는 요즘 치자나무가 완상물인 것이다. 어느 다큐멘터리를 보니 산중 사찰에서 수백 년간 스님들이 지키고 가꾼 것이 어느 산의 거대한 솔숲이라고 한다. 그 솔숲 내력을 잘 아는 스님이 인터뷰에서 “산철(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수행하는 때)에도 이 무정물을 지키는 것이 우리들 소임”이었다고 술회했다.


나는 요즘 담백하고 잔잔하면서도 깊이 있는 수필 여러 종을 뒤적이는 것을 소일거리 삼는다. 법정스님의 ‘무소유’와 조지훈 선생의 ‘방우산장기’와 ‘속 방우산장기’ 그리고 강희맹 등이 지은 ‘아름다운 우리 고전 수필’이 그런 것들이다. 이 책들 역시 무정물이자 내 완상물인 것들이다.


치자꽃 구경하느라 반려식물들이 모여 있는 방을 자주 드나들다 보니 옹기종기 함께 앉은 다른 꽃나무들이 눈에 밟혔다. 치자나무만큼이나 귀한 생명들인데 그동안 너무 소홀하게 다룬 것 같아 하나하나 살펴 물 줄 것은 물을 주고 가지 칠 것은 가지를 쳤다. 관리를 너무 못해 꼴사납게 자라버린 몬스테라는 화분에서 네 잎과 두 잎으로 가지 3개를 잘라내 수경재배를 하기로 했다.


아버지 살아생전 행여 화분을 차거나 깨뜨리면 불호령을 내리곤 하셨는데, 그땐 정말 ‘울 아버지는 참 이상한 분’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 좁장한 마당을 오가며 화분을 건드리는 이는 주로 안주인인 내 어머니였기로 아버지가 더러 밉기까지 했다.


이번 추석을 전후해 경북 안동 콘텐츠 기획안을 회사에 제출해야 해 일전에 아버지 서재에서 가져온 ‘안동 양반의 생활문화(안동대학교 민속학연구소 편)’를 살피다 돌연 아버지의 꽃·나무 사랑의 기원을 얼추 짐작하게 됐다.


퇴계 이황 선생이 퇴계서원에서 학동들을 가르칠 때 일상을 어찌했다는 대목에서 ‘꽃 하나 나무 하나 함부로 뽑지 못하게 했다’는 지극한 유학자의 꼿꼿한 정신을 엿볼 수 있었다.


그젯밤엔 최근 재활용쓰레기 분리수거장에서 주운 법정스님의 ‘무소유’ 문고판을 첫새벽에 읽다가 무소유 정신이 간디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과 난(蘭)을 기르다 거기서 ‘집착함’을 깨달아 이 작품을 낳았다는 걸 알게 됐다.


법정스님은 한동안 무상물 난에 완상을 집착했다. 어미가 새끼를 기를 때 ‘어이구 내 새끼, 금쪽같은 내 새끼’하며 빨며 물며 곁을 지키는 그런 마음이랄까. 법정스님은 산철에도 난 곁을 떠나지 못했다고 한다.

내 마음이 무상물로 가고 완상물로 가고 성찰의 글로 쏠리고 있다는 것, 이것은 어떤 것일까. 이 가을이 익어가듯 내 마음도 좀은 익어가는 걸까. 아니면 날 선 성격이 점점 무뎌지고 세상 불의에 모른 체 눈을 감는 범부(凡夫)처럼 나도 별수 없이 그저 그렇게 늙어가는 걸까.


물들어가는 치자나뭇잎들을 어루만지며 오늘 새벽은 그런 생각을 해본다. 치자나무 위에선 엊그제 구해온 자그마한 분수대에서 연신 물이 흐르고, 생자필멸 회자정리(生者必滅 會者定離) 여덟 자도 같이 흐른다. 눈을 감으면 꼭 개울가에 선 것 같다. 차솥에선 차가 끓고 깊은 차향이 살포시 폭 안긴다. 낙원이 따로 없다.

가을 끝자락인 듯한데, 마침 동탁 선생이 ‘정야(靜夜)’로 말을 건다.

***

한두 개 남았던 은행잎도 간밤에 다 떨리고

바람이 밝고 차기가 새하얀데


말없는 밤 작은 망아지의 마판 꿀리는 소릴 들으며

산골 주막방 이미 불을 끈 지 오랜 방에서

달빛을 받으며 나는 앉았다 잠이 오질 않는다

풀벌레 소리도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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