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의 고백

by 심지훈

라온이 반에는 권리우라는 여자친구가 있다. 내가 리우 얼굴(=실물)은 모르지만 이름을 아는 건 입학 전날 담임선생님이 올린 알림장에 유일하게 답장을 한 친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프로필 사진을 보니 아주 예쁘게 생긴 친구여서 ‘권리우’를 잊지 않고 있다.


지난주 금요일, 수업을 마친 라온이와 여느 날처럼 운동장에서 축구를 했다. 웬 여학생 하나가 “라온아!”하고 달려오더니 라온이 목을 뒤에서 냅다 감싸며 반갑다고 방방 뛰었다. 그러더니 축구를 같이 하자고 했다. 공을 패스했더니 “저는 잘 못차요”하며 라온이 순서의 공까지 뺏어서는 딴엔 힘껏 찼다. 순서를 지키자고 해도 알 빠진 강냉이 같은 이를 드러내고선 ‘소신껏’ 행동했다. 실로 천진난만한 여학생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라온이에게 들은 여자친구 이름은 3~5명인데 김채원은 생애 첫 짝꿍이어서 알고 있다. 그다음 김유나는 라온이가 초등학교 입학 전 태권도장에서 만났기로 입학하고서 낯선 교실에서 유일하게 낯익었다고 해서 기억한다. 유나는 한 달에 한 번씩 바뀌는 짝꿍제도에 따라 라온이의 두 번째 짝궁이 됐다. 유나는 인사성이 참 밝다. 짝꿍이 아닐 때부터 라온이한테도 “안녕”하며 손인사를 하고, 나에게도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건넨다. 자연스럽게 인사를 할 상황이 아닌데도 구태여 찾아와 인사를 하는 양이 우리 라온이를 좋아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 라온이를 의식하며 주변을 맴돌다가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면 라온이도 겸연쩍어하며 손인사로 답한다. “안녕.” 유나와 라온이 하는 양은 황순원 선생의 <소나기>를 연상케해 절로 미소지어진다.


내가 기억하는 라온이네 반 여학생은 이 정도다. 그런데 지난주 금요일 ‘뉴 페이스’가 등장했으니 그 아이가 라온이 목덜미를 껴안고 방방 뛴 권리우다. 학원 갈 시간이 되자 리우가 씩씩하게 인사를 건네고 떠나갔다. 날씨가 뜨거워 운동장 그늘에 앉아 잠시 쉬기로 했다. 입학하고 한 달 보름을 맞는 동안 유나는 10번 넘게 만났고, 리우는 딱 한 번 만났다.


“라온아, 저 아이는 누구야?”

“권리우.”

“아, 쟤가 권리우구나.”

“그런데 리우랑은 언제부터 친해졌어?”

“음, 3월 7일에.”

“응? 3월 7일에?”

“응. 그날 수업 마치고 나오는데 리우가 먼저 말을 걸더라고. 그래서 나도 답을 해줬지.”

“그래서 친해진 거야?”

“응.”

“뭐라고 말했는데.”

“응. 리우가 ‘라온이 가방이랑 내 가방이랑 똑같네’ 이랬어.”

“아, 가방이 똑같아서 친해졌구나.”

“그런데 라온아 리우가 다른 친구들도 껴안고 그러니?”

“아니, 그건 나한테만 하지.”

“그래? 왜?”

“우린 친하니까.”


라온이와 대화하면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짜식, 아빠보다 낫네.’ 나는 ‘3월 7일’을 정확히 기억하는 라온이를 보면서 깜짝 놀랐고, 동시에 엄마아빠의 굳어지고 제한된 머리로 묻는 질문 그 이상의 삶을, 그러니까 엄마아빠가 상상 못하는 라온이의 삶을 스스로 잘 꾸려가고 있다 싶어 대견했다. 나는 라온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라온아, 아빠가 아빠 옛날 이야기 좀 해줄까?”

“응. 뭐?”

“라온이가 초등학교 입학한 것처럼 아빠가 대학교 입학했을 때 말이야. 아빠는 라온이처럼 유나나 리우한테 ‘안녕’하고 손인사를 못해서 여자친구들한테 미움을 받았어. 아빠는 인사도 안 받는 못된 아이로 굳어진 거지. 그런데 아빠는 억울했어. 아빠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유나나 리우처럼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네는 여자친구도 없었고, 남학생이 여학생한테 먼저 인사하는 것도 참 이상한 거였거든. 그렇게 중학교, 고등학교를 순 남학생하고만 생활하다 대학을 갔더니 웬 여자친구들이 그리도 많은지. 아침마다 여학생들이 ‘지훈아, 안녕’하고 지나가는데 아빠는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는 거야.”

“그래?”

“응. 라온이처럼 ‘안녕’하고 손짓을 하면 되는데 아빠는 그게 죽도록 안 되더라고. 아빠가 유나 리우 라온이 인사하는 거 보니까 너희들이 아빠보다 훨씬 낫다 싶네. 우리 라온이 멋지다. 인기쟁이 심라온.”


나는 라온이 볼을 부비며 격하게 뽀뽀했다.

라온이 입학하고 3월 내내 조금씩 읽어 이제 종장을 남겨둔 책이 한 권 있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다. 1999년도에 나온 책인데 김진명의 <글자전쟁>에 이어 한자의 원형을 다룬 <갑골에 새겨진 신화와 역사>를 더듬다가 만났다. 상명대 중어중문과 교수로 있는 김경일 교수가 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출간된 지 25년이 넘었는데도 여적 솔찬히 팔리는 스테디셀러다. 김 교수는 대만의 갑골문 권위자로부터 갑골문 연구로 우리나라 최초로 박사학위를 딴 사람이다. 내처 그의 역작 <김경일 교수의 갑골문이야기>도 구입했다. 이 책은 절판돼 현재 중고서점에서 원가의 2배(3만원~34,000원) 이상에 팔린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모두 5장인데, 모르긴 몰라도 3장까지 읽는 동안에는 얼굴이 화끈거릴 것이다. 적어도 1985년생까지는 말이다. 내가 ‘1985년생’을 기준으로 한 것은 우리 사회에서 이 년도생까지가 유교 문화의 짙은 그림자 아래 있다 보여지기 때문이다. 김경일 교수의 글은 작금의 김난도 식의 날리는 글과는 깊이와 품격 면에서 비할 바 못 된다. 날카롭고 정확하고 적실하다. 25년이 지났어도 유효하다.


우리나라가 법치가 되지 않는 이유를 시작으로 유교의 그릇된 출발과 조상 숭배 의식의 기원, 공자의 거짓말, 한자가 아니라 Asia Sign이라고 해야 하는 까닭 등이 부끄러울 정도로 잘 묘사되고 분석돼 있다. 따지고 보면 당대의 우리는 모두 유교의 피해자들인데, 그리하면 내 부모, 내 조부모의 삶을 깡그리 부정하는 꼴이 되어 유교를 여적 찬양하고 있는 건 아닌지 되묻게 된다.


내가 초등학교 때 여학생이 남학생에 다가오는 것은커녕 남학생이 여학생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 건 놀림의 대상이었던 것 역시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유교 교시의 그림자 아래 살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유나나 리우가 내 아들 라온이에게 스스럼없이 인사를 건네는 걸 넘어 내 아들 뒷목을 잡고 방방 뛰는 풍경이 낯설고도 대견한 까닭은 나 스스로가 유교질서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울림의 타산지석, 반면교사를 더 중시하기로 김경일 교수의 일방적 유교 폐쇄주의에 100% 동의하지는 않지만 유교문화가 낳고 기른 숱한 폐단을 바로 보자는 데는 적극 찬동한다. 나는 유나나 리우의 인사법이 발칙하다거나 망동하다 느끼지 않는다. 다만 내게 낯설다고 느낄 뿐이다.


김경일 교수는 아들 신영이에게 매일 아침 이렇게 인사한다고 한다.(그 아들은 이미 서른은 넘었을 것이다. 어찌 자랐을까 무척 궁금하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그러면 아들 신영이는 이렇게 인사한다고 한다.

“학교 다녀오세요.”

뭔가 이상하다고 느낄 것이다. 어느 것이 어른 인사고, 어느 것이 애 인사인가 의아할 것이다.

그런데 김 교수는 자신의 아들에게 두 손 모아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먼저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한다고 한다. 왜 그렇게 하는가. ‘어린 아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이유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가르치기 위해서다’고 김 교수는 말한다.


이는 동학(東學)의 기본 사상인 시천주(侍天主) 사인여천(事人如天) 인내천(人乃天)과 같다. 시천주는 동학교조 수운 최제우가, 사인여천은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이, 인내천은 3대 교주 의암 손병희가 내세운 ‘인간다움(=인간내)’의 골수다. 제1법칙 내 몸을 한울님 대하듯 하라, 제2법칙 아이의 몸에도, 여자의 몸에도, 늙은이의 몸에도 똑같은 한울님이 있으니 함부로 대하지 마라. 제3법칙 사람이 곧 한울(하늘)이다! 1~3법칙은 공히 같은 말, 같은 뜻이다.


수운이 득도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이 자기 부인에게 큰절을 한 것이라고 전한다. 당시엔 여자는 남자의 발톱보다 못한 존재로 보던 시절이었다. 천지개벽은 수운의 이 큰절로부터 발현된 것이리!


며칠 전 아침, 나는 일어나자마 서재 옆 화장실을 이용하면서 아빠를 본체만체하는 라온이를 불러다가 “내일부터는 아빠한테 와서 인사를 하라”고 시킨 일이 있다. 이 역시 유교적 습속에 따른 것이다. 내가 아이들을 사랑한다면서, 아이들을 가르친다면서 유교적 습속에 따라 이상한 예절을 가르치려 든 것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가르치기 위해서’라면서 내 편의대로(습관대로) 한 것이다.


통통 튀는 축구공 같던 리우를 만난 그날, 나는 하굣길에 내심 불편한 일을 연거푸 겪었다. 축구공을 갖고 라온이를 마중한 그날은 스탠드에 웬 여자가 학생들 사이에 앉아 있었다.(사실 요즘은 고학년의 경우 여학생인지 어머니인지 가리기 쉽지 않다.) 처음에는 학생 어머니인가 싶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축구를 하다가도 몇 번 더 눈이 마주쳤다. 가만 보니 왼쪽 가슴에 명찰을 달고 있었다. 학교 선생이었던 거다. 젊은 여선생이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학부인 내게 인사를 받을 심산으로 있었던 것이다.


축구를 끝내고 후문 교사로 빠져나오다 이번에는 학교 수리 문제로 업자와 이야기 중인 교장선생을 만났다. 그가 교장이겠거니 짐작한 것은 입학식 때 얼핏 본 얼굴이기도 해서고, 옆에 부장으로 보이는 여선생이 굽신굽신 조심스러워하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앞서고 라온이가 축구공을 갖고 뒤따라 왔다. 교장선생은 라온이에게 인사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젊은 여선생과의 일이 없었다면 라온이에게 인사를 시켰겠지만, 어찌하나 두고 볼 요량으로 라온이를 그대로 두었다. 역시나 뭐든 받는데 익숙한 선생들은 교장이나 부장이나 평교사나 먼저 친절하게 인사하는 법이 없다. 교장이 인사를 받지 못하자 부장 여교사도 어정쩡하게 지나갔다.


우리는 이처럼 인사받는데 익숙할 뿐 인사하는 데는 인색하다. 이런 선생들(부모들) 아래 배운 아이들은 머리가 조금만 굵어지면 타인에게 웬만해선 인사를 하지 않는다. 김경일 교수도 그걸 지적해뒀다. “한국 아이들은 타인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다. 눈빛도 교환하지 않는다.”


나는 오늘부터 내 두 아들 라온이 바론이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공자의 수직질서 식이 아닌 사인여천(事人如天) 식으로 그야말로 평등에 입각한 인간내를 알려주고자 나부터 바루고자 한다.

keyword
이전 25화소풍과 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