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과 밥

by 심지훈

라온이가 오늘 아침 공주 치즈마을로 봄소풍을 떠났다. 초등학교 입학하고 갖는 생애 첫 소풍이다. 오늘은 공원에서 체조 중인 13층 할아버지를 보고 여느 날과 달리 큰 소리로 장난스레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다. 그 달뜬 기분을, 그 신명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라온이 소풍가방에는 소풍의 낙인 김밥이나 과자가 없다. 그런 세상은 이미 ‘아, 옛날이여’가 돼버렸다. 물통과 치즈를 받아올 작은 크로스가방이 전부다. 치즈마을에서 피자와 스파게티로 점심을 해결한다.


그제 집사람 무릎 진료차 서울에 갔다가 대전에 도착하자마자 아내가 바론이가 그날 먹은 점심과 아침 간식 메뉴를 알려줬다. 한국인은 예로부터 ‘밥’을 중히 여겼다. 그 때문인지 어린이집 알림장에는 매일매일 아이들이 먹는 음식들을 사진과 함께 자세하게 설명해 준다. 어린이집의 다양하면서도 건강한 식단을 보면 늘상 느끼는 거지만 ‘참 아름다운 대한민국’이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나는 부모 세대에게 감사함을 표한다. 부모님들 노고가 없었더라면 이 나라는 그야말로 ‘거지 국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나는 아내에게 내가 유치원 다닐 때는 요구르트 하나랑 멸치 몇 마리 먹은 게 전부라고 했더니 “그걸 기억해”라고 신기해했다.


소풍의 추억이 누구에게나 아름답고 즐거운 건 아니다. 우리 집에는 아픈 기억이 여적 유랑한다. 내 어머니는 두고두고 그 슬픈 추억을 되뇐다. 누나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첫 소풍을 가서 도시락을 못 열어 점심을 쫄쫄 굶고 왔다는 얘기를 듣고, 직장맘이었던 어머니는 그다음부터는 만사를 제쳐두고 누나 소풍을 따라다녔다는 이야기다. 어머니에게는 단순히 밥 한 끼의 문제가 아니라 ‘그 어린 것이 가졌을 슬픔’이었고, 어머니에게 그 슬픔은 정작 누나 슬픔의 백배 천배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지독한 가난이 골수로 흘러내린 어머니에게 밥은 달리 슬픔이요, 슬픔은 어머니에게 아픔인 것이다. 누나도 어느덧 반백 년을 살았는데 어머니는 그 아픔이 아직도 엊그제인 양 그리도 시린 모양이다.


오늘 아침 ‘대구 최초의 법무고시 법무사’란 타이틀 갖고 있는 전재우 법무사가 밀린 [글밥*] 3회분을 아침에 읽었노라 전하며 내일부터 연길을 통해 백두산 여행에 오른다고 알려왔다. 그 결에 <백두산 성자를 찾아서>를 책장에서 빼냈다. 본문 앞부분에 잔잔한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이런 이야기가 소개돼 있다.

[글밥*]=필자 매일 아침 지인 100명과 나누는 글.


산간벽지의 티베트 노승이 한국에서 온 명상 수행자들을 맞으며 벽장 위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는 장면인데, 그런 곳에서는 정말 구하기 힘든 미국산 비스킷이다. 저자는 이 느낌의 이렇게 적었다. ‘어이구! 내 새끼 먼길 오느라 고생 많았지. 그래 어서 먹어.’


나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 3남매를 키워주신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외할머니는 뒤안 붉은 ‘다라이’에 이런저런 간식을 꼭꼭 재어두었다가 우리가 조르면 하나씩 가만가만 내어다주셨다. 그중에서 ‘수리미(오징어)’는 어디서 나오는지 조르면 고구마줄기처럼 계속계속 나오곤 했다. 내가 유치원 때 멸치 몇 마리 먹은 것이나 외할머니가 간식을 남몰래 감추어두었다가 준 일은 돌이켜보면 그만큼 살기가 팍팍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라온이 바론이는 부엌 장마다 제 엄마가 먹을거리를 가득 재어 놓는다. 그러면 아직 ‘아가’인 바론이도 어디에 무엇이 인는 줄 알고 의자를 놓고 올라가 척척 내다가 먹는다. 내가 2002년 캐나다로 연수를 가 캐네디언 홈스테이를 했는데 그 집 창고를 보니 탄산음료를 종류별로 어른 키만큼 재어 놓고 먹고 있었다. 참으로 진풍경이었다. 요즘 우리 가정이 그런 식으로 산다.


나는 먹는 거에는 별 취미가 없는 사람이다. 그에 반해 집사람은 맛집 애호가다. 그런 집사람이 엊그제 멸치 추억담 끝에 이렇게 말했다. “자기는 좋겠다. 먹고 싶은 게 딱 정해 있어서.” 식도락(食道樂)도 좋지만 나는 간편한 게 좋다. 나는 된장찌개 하나에 밥 조금이면 세상 행복한 사람이다. 여기다 막걸리 한 잔이면 세상 부러울 게 없는 사람이다.


소풍 세태가 간소하게 바뀐 것처럼 먹는 풍속도 질적으로 바뀌면 좋으련만, 공중파나 유튜브나 아직도 옛적 고봉밥 먹듯 양으로 승부하는 게 대세이니 문화유전자의 힘이 참으로 세차다 싶다. 하긴 우리 라온이, 바론이도 무지 먹는다. 엄마 쪽 유전자가 뿌리내린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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