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하는 삶

by 심지훈

남명 조식은 퇴계 이황과 함께 영남학파의 거두로 알려져 있다. 퇴계가 성리학의 이론을 중히 여겼다면 남명은 수양과 실천을 중시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이른바 남명학파의 치적은 기인적인 측면만 부각, 값없는 것으로 격하됐지만 후대는 임진왜란 때 최대의 의병장을 배출하는 등 의병활동으로 구국에 온몸을 던진 상당수가 남명 문하생이었다는 점을 높이 사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이란 감투를 씌어주었다.


그런 남명의 핵심사상은 경(敬)과 의(義)였는데, 남명은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로써 경을,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 外斷者義)라고 새긴 칼로써 의를 드러내 보였다. 남명에게 방울은 ‘항상 깨어 있음’을 뜻하는 수양기요, 칼은 ‘안으로 자신을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과감히 결단하는 것은 의’를 뜻하는 실천기였다. 오늘날 남명하면 성성자와 경의검부터 떠올리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남명의 당시 모습을 상상하면 그에게는 일종의 벽(癖)과 치(痴)가 있었다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방울과 칼을 찬 선비 남명은 확실히 당시로선 별난 버릇과 불광불급(不狂不及)의 삶의 태도가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 남명은 대단한 성정을 가진 선비요, 스승이었다는 점은 거의 베일에 가려졌는데 오늘날 트렌드에 맞지 않기 때문일 터이다. 남명은 일종의 과격분자였다. “왜적이 설치면 목을 확 뽑아버려야 한다”고 했고, “그래도 티끌 먼지가 오장에 남았거든 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보내리라”고도 했다. 모두 오싹한 표현들이다.


남명의 경우를 차치하면 조선시대에는 17세기까지 몰입하는 삶, 이른바 완물상지(玩物喪志)를 터부시했다. 18세기 들어 몰입하는 삶이 일종의 풍조요 경향이 됐는데 그 유행을 이끈 이는 상고당 김광수였다. 상고당은 이조판서 아들이었는데 정해진 출세길을 마다하고 골동에 미쳐 고서화를 모으고 품평하는데 평생을 바쳤다. 그리고 “좋은 가문에 태어났으나 번잡하고 호사스러움을 싫어하여 법도와 구속을 벗어나 물정에 어둡고 편벽됨에 빠졌다”로 시작하는 장문의 묘미명까지 남겼다. 벽치의 역사를 기준하면 17세기까지는 몰개성의 사회였고 18세기부터는 개성 넘치는 사회, 끼가 충만한 사회였다.


헌데 조선을 개성 넘치는 사회로 인도한 이는 명말 문인 원굉도였다. 그는 “내뱉는 말이 무미건조하고 면상이 가증스런 세상 사람은 모두가 벽이 없는 사람들이다. 만약 진정으로 벽을 가지고 있다면, 그 속에 푹 빠져 즐기느라 운명과 생사도 모조리 좋아하는 것에 맡길 터이므로, 수전노나 관리 노릇에 관심이 미칠 겨를이 있을까 보냐?”라고 했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옳고 그름의 분별은 없고 제 편한 것, 제 좋은 것을 옳다고 빡빡 우기는 얼치기들이 판을 치고 있다. 대체 이 원인을 어디에서 찾아야할지 모르겠다. 두 쪽으로 갈라진 진영싸움을 보면 이 사회가 온통 심각한 벽치 세상인 것 같은데, 모두 상식 밖의 두 쪽 싸움이란 점에서 이 사회는 참 느슨한 한량 사회인 듯도 싶다. 광(狂)과 벽과 치가 없어도 이렇게 없는 사회인가 싶은 것이다. 정녕 그렇게들 매력적인 자기만의 세계가 없을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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