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회생활은 누구에게나 녹록지 않다. 사회생활은 3년차 미만의 신입사원 때 흘린 눈물의 양에 비례해 만족도, 자존감, 행복감 등이 높아진다. 가장 순수한 마음과 열정으로 조직과 사람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을 가진 이때, 가장 진정성 있는 눈물을 쏟아내며 조직과 인간을 이해하고 그전과 달리 볼 수 있는 눈과 마음이 새로 자리잡히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 자아와 타자 간 괴리, 현실과 이상 간 격차로 눈물을 쏟아내지 않았다면, 그건 큰 실수고 잘못이다. 사회생활을 진중하게 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하나 이 안타까움과 분노, 절망 등의 감정이 뒤범벅이 된 눈물을 몇 번이고 토해내듯 쏟아내고도 밥벌이를 위한 생계수단으로써 사회생활은 저마다의 애로사항으로 점철된다.
조직과 사회를 마주하고 살아가는 동안은 숱한 문제들이 미숙한 채로 지속된다. 아랫사람은 아랫사람대로 윗사람은 윗사람대로 고충은 늘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겉으로 얼마나 드러내고 살아가느냐만 다를 뿐이다. 포커페이스가 되느냐 되지 않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2.
그러면 우리는 왜 밥벌이를 해결하는 위대한 노동 행위를 하면서 행복보다 잦은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걸까. 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할까. 왜 우리 사회가 무질서하다고 느끼는 걸까. 통찰력, 문제 해결력, 상상력 이 세 가지 공부가 미천하고 미숙해서다. 한 번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통찰력: 사람과 사안을 꿰뚫어 보는 힘
사회가 무질서한 것은 사람이 무질서해서가 아니다. 본디 사람은 여러 질(質)이다. 그런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서투르고, 각자가 처한 문제해결 능력이 부족해서다. 한 부모 아래 난 형제자매도 생긴 것이 다르고 생각하는 바가 다르다. 인간은 한마디로 제멋대로 생겨먹었다.
사회생활의 절대 다수의 문제는 바로 이 저마다 생겨먹는 인간을 대함으로써 시작된다. 인간이 인간 때문에 스트레스를 덜 받고 안 받으려면 통찰력이 필요하다. 통찰력은 사람과 사안을 꿰뚫어 보는 힘이다.
통찰력을 기르는 방법은 전통적으로 둘이었다. 정체성이 꼿꼿하게 확립되기 전부터 가능한 여러 사람을 대함으로써 경험칙을 넓고 높게 쌓는 것이다. 이른바 두 발로 뛰며 인간군상의 실체를 확인하는 ‘실전형 인간 꿰뚫기’다. 시대적으로는 1세기 전 품앗이, 두레가 일반적이었던 농경사회가 유리했다. 직업적으로는 영업사원, 기자 등 다방면의 사람을 대하는 이들이 통찰력을 쌓는데 유리하다.
통찰력을 쌓는 다른 하나는 주역을 공부하는 것이다. 주역은 미신이나 단순 점술 도구가 아니다. 주역은 동양인들이 과학이란 걸 모를 때, 어떡하면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행복한 삶을 일구어갈까를 고민한 끝에 다양한 인간의 삶들을 자연법칙에 대입해 풀어낸 정밀한 사람 공부의 결과요, 자연 공부의 결과다.
안타깝게도 주역 공부가 당연한 시대는 지나갔다. 여러 질의 인간들 사이에서 인간의 실체를 온몸으로 알아가던 농경사회도 끝이 났다. 디귿자 형태의 좁장한 책상머리에서 8시간을 보내는 현대인들의 편협한 패턴으로는 애로사항의 묘법이 좀체 시원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이건 나이가 든다고 나아지고 해결된다는 보장도 없다.
머릿속 대우주에 작은 행성 하나만 죽을 때까지 돌고 돈다.
‘인간들은 대체 왜 이렇게 생겨먹은 거야!’(고민, 스트레스)
문제 해결력: 갈등을 해소(돌파)하는 힘
문제에 봉착한 ‘문제적 인간들’은 허둥지둥 불나방이 된다. 직관으로 문제를 돌파하려 든다.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단 한 번도 배워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문제를 그저 깜냥대로 이해하고 해결하는 걸 능사로 여긴다.
그래서 자기 잣대가 해법이 되는 우를 범하기 일쑤다. 인간 문제에 기인한 누적된 스트레스는 알고 보면 거개가 “내 맘대로 안 돼서”다. 왜 내 맘대로 돼야 하는가?
그러니 마음대로 안 되면 조급해하고 짜증을 낸다. 심하면 편두통을 앓는 등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문제는 풀라고 있는 것인데 달리(differently) 생각할 줄 모른다. 상대가 있는 문제는 내 정답과 상식이 매번 정답이 될 수 없고 상식이 될 수 없다. 인간 갈등 문제 해법은 ‘그때그때 달라요’가 정답이다.
문제 해결력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시작할 때 상승한다. 세상에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다. 조잡하고 조악하고 심지어 비루한 구석이 있는 내 정답과 상식을 내려놓고 해체해야 비로소 해법이 드러난다. 이때 중요한 것이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경험칙, 주역의 대안으로 문제 해결력을 강화시키는 제3의 방법이다.
상상력: 정신 건강에 도움 되는 힘
상상력(imaginative power)은 ‘개인이 일상과 처한 상황 그 너머를 보는 힘’이다. 요즘엔 창의력(creativity)과 동의어로 쓰이는데 이는 잘못이다. 창의력은 ‘남들이 하지 못하는 생각을 생각하고, 그것을 가능하면 현실화하는 힘’이다. 상상력이 사적 영역이라면 창의력은 공적 영역이다.
상상력의 예는 개인 갈등 문제를 달리 생각함으로써 푼 것이고, 창의력의 예는 “누군가가 나서서 로켓 기술을 발전시키지 못하면 인류가 지구라는 행성에 영원히 머무를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민간 우주여행시대 개척자 일론 머스크다.
개인사적인 문제에 갇히면 대의적인 공적 문제 해결은 언감생심이다. 상상력은 머리 회전에 여력이 있어야 하고, 마음이 풍요로워야 제 기능을 발휘한다. 상상력은 동서남북 사방을 살필 줄 하는 힘이다. 답은 서남북쪽에 있는데 동쪽만 정답이고 상식이라 믿고 머리를 굴리는 순간 블랙홀에 빠져들어 헤어날 수 없게 된다.
개인 갈등 문제에서 잘못된 나만의 정답과 상식을 버리고 나면 남는 선택지는 상대를 젖히기(제끼기), 놔버리기, 거리두기, 다가기기, 포용하기로 좁혀진다. 남은 문제는 해피엔딩이냐 새드엔딩이냐를 결정하는 것이다. 자신이 어떤 상상력을 발휘하고 추구하느냐에 따라 엔딩은 달라진다.
설령 새드엔딩이라고 해서 의기소침할 이유는 없다. 또 그건 나쁘다고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느낌과 언행은 옳지 못하다. 새드엔딩은 숱한 삶의 결에 종지부라는 작은 점 하나 찍는 것이기 때문이다. 점을 찍어야 다음 행보가 가능하다. 현대인들의 결정적 문제는 그 작은 점 하나 찍고 나아가지 못하고 그 문제가 자신의 모든 문제인 양 착각하는 데 있다.
일단 상상력은 복잡다단한 머리에 다른 생각이 들어갈 여지를 주는 일이 먼저다. 멍때리기, 다른 일에 정신팔기, 차 마시기, 악기 연주, 운동, 메모(습관) 등이 머리 틈두기의 방편이 될 수 있다. 이런 일과 함께 마음을 잘 살펴야 한다. 심신 안정은 만사형통의 근본이다.
상상력으로 사람 문제, 위기 상황을 극복하는 게 능통해지면 창의력이 샘솟는다. 내가 하는 일이 이 사회에 어떤 도움이 될까를 고민하고, 내 재주로 우리 사회에 무엇을 이롭게 할 것인지 고민하는 소위 사명감을 갖게 된다. 우리 사회가 “창의력이 없는 사회”라고 진단되는 건 개인사를 스스로 해결하는 능력의 부재에 있다.
이 글을 읽고 ‘나는 사명감을 갖고 사는가’라는 의문이 든다면, 지금부터 사람 공부, 문제 해결 공부, 상상 공부를 시작하자. 세 공부는 각기 하나면서 모두 하나다. 누구나 어떤 마음을 품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자기 분야의 머스크가 될 수 있다.
*오늘 글은 근자에 마음 아프다, 괴롭다, 힘들다는 사람이 부쩍 늘어 내 경험칙을 바탕으로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