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찾기

by 심지훈

라온이가 학교전화로 제 엄마에게 전화를 건 건 어제 방과후였다. “엄마 나 라온이야. 이제 갈게.” “응. 라온아 조심해서 와.”


어제 아침 등교 전 라온이는 큰 결심을 한 듯 “아빠 오늘은 혼자서 집에 오고 싶어”라고 했다. “응. 그렇게 해.”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응답했다.


라온이는 두어 달 전 제 엄마 무릎 진료차 서울을 다녀오면서 이웃집에 맡긴 일 전까지는 혼자서 등원도 하원도 씩씩하게 곧잘 하던 아이였다. 그날 엄마아빠가 약속시간보다 늦게 온 뒤로는 라온이 마음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던 자주(自主)의 싹이 풀이 죽어 움츠러든 모양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아빠 껌딱지가 돼 손을 꼭 붙잡고 등하교한 지 얼추 한 달 만에 다시 독립의 기운을 뻗어냈다. 참으로 대견한 일이었다.


지난 토요일 로봇만들기 방과후수업을 다녀오면서 학교전화기가 눈에 띠어 엄마한테 전화걸기를 알려주었다. 그 일이 라온이에게는 큰 전기(轉機)가 되었던지 엄마한테 전화하고 집으로 올 거니까 아빠는 데리러 안 와도 된다는 거였다.


라온이 하교 시간이 되자 아내와 나는 라온이 전화를 학수고대했다. 5분 뒤면 오겠지, 10분 뒤 이제는 오겠지. 라온이의 전화는 좀체 울릴 생각을 안했다. 무더위가 시작됐다는데. 이 놈이 아침 약속을 잊어버렸나. 땡볕에서 아빠를 기다리고 있는 건가.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돼 바론이를 앞세우고 학교로 향했다. 아내가 달뜬 목소리로 대단한 경사(慶事)를 전해온 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아파트를 막 나왔을 때였다. 아내가 베란다 창가에 서서 외쳤다. “여보, 라온이 전화왔어!”


“바론아, 형아가 온다고 전화가 왔대. 우리는 올라가서 키즈카페 갈 준비하자.” “응!”


바론이는 라온이의 전화 때문이 아니라 제 형이 온다는 소식에, 키즈카페를 간다는 생각에 무척이나 좋아했다.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왔더니, 아내가 “어, 전화가 또 왔네”하며 전화를 받는다. “응. 라온아.” “엄마.” “응. 방금 전화했잖아.” “근데 아까 잘못 말했어.” “응?” “물을 먹고 지금 가는 거야.” “응. 라온아. 물 먹고 차 조심해서 곧장 와.” “응.”


“아까는 잘못 말했다고 다시 왔네. 물 마시고 오는 거래.”


그러니까 라온이는 물을 마시고 오느라 내 예상보다 조금 늦게 오게 된 것이었다.


라온이가 제 엄마에게 학교전화로 통화하는 걸 보고 내 초등학교 시절이 떠올라 설핏 웃음이 났다가 그날의 엄마 얼굴이 떠올라 가슴이 아려왔다.


나는 하교 후 집전화로 한국전신전화국에 다녔던 엄마한테 만날 전화를 걸었다. 내 기억으로 초등 3학년 때 엄마가 회사로 전화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엄마 전화번호를 가르쳐주고는 엄마 대신 다른 사람이 받으면 “이명희씨 부탁합니다”라고 하라 알려주었다. 그리 나는 만날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주로는 “언제 와”를 물었고 “빨리 와”라고 재촉했던 것 같다. 뭘 사오라, 사다 달라는 생떼는 딱 1개가 생각난다. 이따금 엄마한테 그 이야기를 하는데 참 죄송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400m 계주 대표로 뛰게 됐는데, 남들 신고 있던 스파이크가 부러워 사달라고 한 일이었다. 엄마는 퇴근 후 체육사를 들렀더니 내 치수는 없고 한 치수 작은 것뿐이어서 사오지 않았다.


나는 그날 밤 서럽게 앙앙 울어댔다. 한 치수 작은 것이라도 사왔어야 했다는 내 말에 엄마는 출근 전 꼭두새벽부터 체육사 문이 열기도 전에 버스를 타고 스파이크를 사러 갔다.


등교해서 운동장에서 계주 연습을 하고 있는데 엄마가 스파이크를 들고 학교 입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는 못됐게도 스파이크만 받아들고 콧등에 땀방울이 송송 맺힌 화장 뜬 엄마 얼굴을 외면하고 뒤돌아섰다.


엄마는 아마도 그날 지각을 했을 것이다. 그땐 삐삐도,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이라 따로 기별을 넣을 형편이 못됐을 것이다. 좀 늦는다고 기별을 넣었다면 체육사 전화기로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엔 지각이란 게, 반차라는 게 통용되지 않던 시절이라 아침부터 곤욕을 치렀을 것이다.


스파이크를 쥐었을 때 나는 엄마 속도 모르고 기쁨의 눈물이 찔끔 맺혔지만 막상 스파이크를 신으려니 너무 작아 잘 들어가지 않아 당황했다. 발가락을 구깃구깃 구부려 억지로 신었다. 이 채로 뛰어보니 스파이크를 신고 뛰나 운동화를 신고 뛰나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발가락이 아파 스파이크를 금세 벗어던졌다.


그 스파이크는 그리 수명을 다했다. 버렸는지, 잃어버렸는지, 집에 챙겨왔는지는 별다른 기억이 없다. 아마도 집 신발장 어딘가에 처박혀 있다가 어느 날 버려졌을 것이다. 엄마는 그 스파이크를 정리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엄마에게 전화걸기가 ‘엄마찾기’였다는 걸 알면서도 유달리 스파이크 사건이 기억에 남는다. 몇 번이고 엄마에게 내 철없음을 고백하고 사죄했지만 내가 직장생활을 해보니 그 금쪽같은 시간에 정말 말도 안 되는 요구를 엄마에게 한 것이란 걸 알게 됐다. 이제는 너무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제 막 시작된 라온이의 엄마찾기는 내가 그랬듯 신이 나서, 엄마가 정말 보고파서 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 순백색의 여정이 늘상 좋지만은 않을 것이다. 엄마 속이 타고 라온이는 분에 차서 우는 일도 생길 것이다.


서로 찾는 것, 서로 통한다는 것은 서로 안 찾는 것, 서로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는 여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서로 사랑한다는 것과도 같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원수처럼 여기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때는 깨닫게 된다. 그런 일들의 가운데(中)가 그중 아름답다는 것을 말이다.


관용과 배려와 포용은 그런 정반합 혹은 냉온차를 풍성하게 겪으면서 그 틈에서 몽실몽실 피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네 삶이다. 엄마찾기도 그런 삶의 하나다.


라온이가 씩씩하게 혼자 하교해서는 씩씩대며 제 엄마에게 말한다.


“엄마, 그런데 우리 학교 전화기 이상해. 엄마 전화번화를 제대로 눌렀는데도 자꾸만 잘못 눌렀대.” “응? 엄마번호는 010-0000-0000이잖아. 잘못 누른 거 아니야?” “아니, 아니야. 제대로 눌렀다니까.” “그러면 뒤에 팔팔이 제대로 안 눌러졌나 보다.” “아, 아, 그게 아니라니까.”


이런, 라온이와 엄마가 시끌시끌하다. 벌써부터 중(中) 찾기의 여정에 접어들었다는 신호다. 나는 바란다. 라온이가 나와 같은 엄마에 대한 시린 기억을 갖게 되지 않기를. 두 사람 모두 나보다는 현명하고 지혜롭기를.


동시집은 생동감 넘치는 그림이 흥을 더한다. 책은 아이 책, 어른 책이 따로 없다. 있다면 그런 편견이 있을 뿐이다. 문득 “무더운 여름엔 화장실에 앉아 아이들 도감을 본다”는 일본의 한 70대 독서광 말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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