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균, 쇠>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제레드 다이아몬드 교수의 <어제까지의 세계-문명사회는 전통사회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읽다가 아침식사가 늦었다.
내 아침상은 소박하고도 담박하다. 밥 반공기와 반찬 한 가지면 족하다. 요즘은 엄마표 막장에다 시골서 가져온 상추를 싸먹는 게 아침의 낙이다. 고소하면서도 적당히 맵고 싼 막장은 울 엄마의 특별 레시피로 만든 것이다. 대중식당에서는 만날 수 없는 진기한 반찬이다.
상추는 시골 텃밭에서 직접 기른 것인데 고소한 맛이랄까, 싱싱한 단맛이 난다. 마트에서 파는 상추에는 이런 고소한 단맛이 없다. 텃밭 상추의 힘을 느낀 이라면 마트 상추가 얼마나 형편없는지 금방 알 것이다.
엄마 막장과 텃밭 상추는 아무리 먹어도 물리지 않는다. 참 신기한 일이다. 막장과 상추를 대신하는 건 엄마표 물김치다. 물김치는 여름 별미다. 대전 반찬집 몇 군데에서 물김치를 사먹어봤지만 죄다 실패했다. 내 입맛에는 안 맞았다.
엄마표 물김치는 막장처럼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속이 불편한 것도 없고 활력을 돋운다. 아침엔 막장과 상추, 점심엔 물김치. 하루 2끼면 생존에 필요한 영양섭취는 끝이다.
오늘 늦은 아침 땐 밥솥을 무심히 열었더니 총총 썰은 가지가 놓인 가지밥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아내의 깜짝 선물이다. 잘 익은 가지를 한쪽으로 옮겨놓았다. 아이들은 잡곡밥만 먹을 테니까 말이다. 꼬슬꼬슬한 가지밥을 반공기 떠서 물김치를 조금 덜어 식탁 위에 올렸다.
그리고 지난 주말 엄마한테 받아온 마법의 비빔장을 티스푼으로 한 수저 떠 비볐다. 비빔장은 집간장을 기본으로 고춧가루와 잘게 쓴 파와 다진 마늘 등이 들어가는데 여름철 가지냉국, 오이냉국을 할 때나 오이나 상추를 버무려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다.
비빔장은 콩나물밥이나 가지밥에도 찰떡 궁합이다. 엄마표 비빔장에 ‘마법’이란 감투를 씌운 건 웬만한 음식과 절묘한 합을 이루기 때문이다.
마침 아내가 밥을 먹었냐고 카톡을 보내왔다. 맛있게 잘 먹는 중이라고 답을 했다. 사랑의 하트를 날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찐가지가 밥도둑인지 마법의 비빔장이 마법을 부린 것인지 이 아침엔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웠다.
요즘 우리 집 식단은 극단으로 갈려 있다. 엄마아빠는 감자 고구마 옥수수 오이 당근 상추 가지 호박을 먹는다. 두 아들은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오리고기 등 주로 육류를 돌아가며 먹는다. 돈가스 통닭 피자 초밥은 별식이다. 막내는 제 엄마 식성을 꼭 닮아 김과 멸치를 좋아한다.
제철 음식을 즐기셨던 아버지는 생전 곧잘 말씀하셨다. “짜식 진짜 맛을 몰라.” 문득 인간은 나이 따라 입맛도 땅속을 향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골골 40~50년인 걸 감안하면 100수는 언감생심이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본 옛 기준으로 하면 인간은 45세를 전후해 땅속으로 산화할 준비를 하는 것 같다. 급격하게 바뀌는 몸 상태는 둘째치고 당장 입맛이 그걸 증거한다. 나는 요즘 고기는 쳐다도 보기 싫다.
제철 음식 먹고 제때 가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서울 시청역 앞에서 9명의 사망자를 비롯해 모두 15명의 사상자를 낸 역주행 사고를 보니 그런 생각이 퍽 더 든다.
▲사족
<어제까지의 세계>에서 제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현대인은 전통사회에서 복된 삶의 정수를 뽑아 실천해야 한다는 논지를 줄곧 펼친다.
전통사회는 “인간의 삶을 체계화하기 위해 수만 년 동안 지속된 자연적인 실험들이 집약된 공간”이라는 게 다이아몬드 교수의 주장이다.
전통사회에서 먹거리는 거개가 제철 음식과 제철 과일들이었다. 현대사회의 3대 성인병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은 전통사회에는 꿈도 못 꾸던 것들이었다. 현대인들은 일면 천국이 아니라 지옥에 산다.
다이아몬드 교수가 건강한 삶, 지속가능한 삶의 묘안이 전통사회에 있음을 지적한 것은 인과율과도 같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불교의 인과율을 나는 지지하고 믿는 쪽이다.
한 세상 살면서 사필귀정 인과응보(事必歸正 因果應報), 이 여덟 글자만 가슴에 새기고 살아도 지옥 같은 삶에서는 비켜설 수 있지 않을까.
아내의 가지밥이, 엄마의 막장이 비빔장이 물김치가, 시골의 상추가 천국이다. 나는 이 숱한 천국이 좋다. 그리고 이 천국을 선사한 아내와 엄마가 무척 고맙고 감사하다.
아내와 엄마가 내겐 신(神)이요 우주요 조물주요 한울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