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고민거리가 하나 생겼습니다. ‘어찌 하면 라온이에게 바둑을 이길까’하는 것입니다. 방과후수업에서 배워온 라온이의 바둑 실력은 저보다 월등히 낫습니다.
실력자가 보기에는 둘 다 오십보백보라 하겠지만 우리 둘의 승부에선 라온이가 거의 2배의 돌을 더 잡아먹으며 아빠 코를 납작하게 만듭니다.
바둑하면 생각나는 게 신문사에 다닐 때 편집기자로 수요일 자 바둑 면을 편집한 것입니다. 지면 편집은 편집부장이 매일 할당하는 것이어서 제 의사나 기호와는 무관합니다.
바둑에 바 자도 모르던 제가 1년 넘게 바둑 면을 편집하면서도 별 탈이 없었던 것은 바둑 면 담당 데스크가 바둑에 상당한 조예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전 바둑 면 편집기자가 짜놓은 지면을 3개월 정도 참고해서 제목을 달았고, 수정사항은 담당 데스크 지시를 따르면 됐습니다.
요즘 라온이에게 고배를 마시면서 그때 바둑을 좀 배워둘 걸 하는 아쉬움이 뒤늦게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때는 바둑에 대한 나쁜 인상과 인식이 있어 영 관심이 가지 않았습니다.
나쁜 인상 1가지는 마감하러 들어온 선배들 다수가 컴퓨터 바둑을 두던 모습이 신입사원인 제 눈에는 그리도 불편해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근무시간에 저런 짓을 할까 싶어 실망스러웠습니다.
나쁜 인식 1가지는 사주가 사적 관심에 따라 바둑팀을 만들고 그 당시 최고의 바둑선수인 이창호 고수와 대국을 벌였다는 ‘자랑’이 편집국에 나돌면서 정상은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그 또한 아주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리 바둑과 가까워질 수 있던 시간이 있었지만 저는 바둑을 더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비슷한 이유로 골프도 배우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골프와 기자가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저는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작가로 사는 제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골프채를 잡겠습니까.)
아무튼 요즘 라온이와 대국에서 번번이 대패하면서 ‘내가 아들 덕에 바둑을 다 배우는구나’ 싶어 참 묘하다 싶습니다.
바둑은 바둑알 하나의 네 살길을 막는 걸 기본으로 누가 많이 상대의 돌을 잡느냐(혹은 죽이느냐) 하는 게임입니다. 초보자 입장에선 그리 파악됩니다. ‘살길’을 활로(活路)라고 하더군요.
바둑에는 인생사가 깊숙이 녹아있다는 말을 한번쯤 들어봤을 것입니다. 죽고 사는 길이 바둑판 안에는 무수히 들어있습니다.
그 때문에 바둑용어가 일상용어로 안착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강수, 자충수, 무리수, 승부수, 대마불사 등이 대표적입니다. 수 읽기, 복기, 꽃놀이패 등도 마찬가지지요. 드라마 <미생>도 바둑용어 미생(未生)에서 따왔지요. 미생은 ‘집이나 대마가 아직 완전하게 살아 있지 않은 상태’를 뜻합니다.
이밖에 수순을 밟다 할 때 수순(手順), 착수하다 할 때 착수(着手), 꼼수 부리다 할 때 꼼수, 호구 잡히다 할 때 호구(虎口), 사활을 걸다 할 때 사활(死活) 등도 모두 바둑용어가 일상용어처럼 변한 것들입니다.
라온이는 매주 목요일 2시간씩 바둑을 배워옵니다. 신기술을 배워와서 아빠와 대국을 합니다. 처음 몇 번은 제가 이겼습니다. 2시간씩 두 번을 배워온 뒤로는 제가 번번이 졌습니다. 그것도 크게 졌습니다.
제가 라온이한테 바둑을 배워 같이 둬보니 활로를 바로 막는 법은 썩 좋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막는 것이 초보자에게는 곧 크게 죽는 길이었습니다.
자꾸 지니 은근 울화통도 터지고 스스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골몰하다 집을 크게 짓는 전략이 라온이를 이기는 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전략대로 뒀더니 라온이에게 크게 이겼습니다.
그런데 라온이가 억울하다며 씩씩대다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어른도 지는 건 싫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어린애야 오죽하겠습니까. 그제 낮에는 두 번 다시 아빠와 바둑을 두지 않겠다고 목청을 높였습니다.
하지만 어린애의 강점이 있지요. 라온이는 뿔이 나서 태권도장을 갔다가 금세 환해져 돌아왔습니다. 밤 9시에 대국을 청했습니다. 영민한 라온이는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낮에 했던 방법으로 두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빠 바둑알을 라온이 바둑알 옆에 바로 붙여두라는 주문이었습니다.
그리 두면 또 대패할 게 뻔해 그럼 한 번은 라온이가 원하는 대로 두고 아빠가 지면 아빠가 원하는 대로 한 번 더 두자 약속하고 첫 대국을 시작했습니다.
라온이는 신명나게 바둑을 두어 설욕전에 성공했습니다. 마지막 큰 집은 잘 막았다 생각했는데 순간 크게 잃자 얼굴이 다 화끈거렸습니다. “아빠 바보!” “이 멍청이!” “어떻게 거기에 둘 수가 있지?” 하며 내내 조롱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한판 두자고 했더니 라온이는 놀리면서 싫다고 했습니다. 성질이 확 났습니다. “매너 없는 놈, 다시는 너랑 바둑을 두지 않겠다”고 언성을 높였습니다. 그땐 정말 화가 치솟았습니다.
잘 시간. 먼저 침대에 누웠습니다. 라온이가 미안해하며 은근 아빠 몸을 비벼댑니다. “얌마, 저리가 귀찮게 하지 말고. 치사한 자식.” 그날 밤, 라온이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침대 2층으로 슬그머니 올라갔습니다. 혼자 자겠다며. 아빠가 화가 많이 났다는 사실을 안 거지요.
이날 밤 라온이는 밤을 설쳤습니다. 새벽 1시에 깨어났습니다. “라온아, 내려와서 자.” 마음은 덜 풀렸지만 아직 애기인 라온이에게 쓸데없이 가혹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화장실을 한번 들렀다가 라온이 방에 가서 홀로 몸을 누였습니다. 이날 따라 선풍기 바람도 선선할 정도여서 큰방 에어컨을 꺼도 좋겠다 싶어 다시 아내와 라온이, 바론이 자는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라온이는 엄마 품에 안겨 아직 잠에 들지 못했습니다. 아빠가 혼자 나가버린 게 마음에 걸린 거였습니다.
다음 날 아침, 라온이는 평일인데도, 밤새 잠을 설쳤는데도 일찍 일어났습니다. 저는 순간 늦었다 싶어 놀라서 깼는데, 라온이가 자기 방에서 홀로 잠든 아빠를 우두커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라온아, 엄마는?” “엄마? 씻고 있는데.”
시계를 보니 서둘러야겠습니다. “라온아, 먼저 씻자.” 머리를 감기고 세수를 시키고 옷방으로 옮겨오자, 라온이가 말합니다. “아빠, 어제는 내가 미안했어.” 순간 맥이 딱 풀렸습니다.
감정은 지나가는 바람과도 같은 것인데 이 순간의 감정을 아직도 다스리지 못해 초등학생 1학년 아들과 감정싸움을 벌인 제가 참 한심스럽다 생각되었습니다. “괜찮아.”
라온이와 함께 등굣길에 나서면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말했습니다. “라온아, 아빠도 감정을 가진 인간이야. 라온이도 아빠랑 게임하다 지면 억울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고 화가 나서 울잖아. 아빠도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있어. 매번 지는 것도 싫고, 아빠가 두고 싶은 대로 두지도 못하는데, 라온이가 아빠는 바보다, 멍청하다 하고 놀리면 화가 나겠니 안 나겠니?” “나겠어.” “응. 그러니까 다음부터 놀리는 건 하지 말자.” “응.”
주변에 아들 키우는 아빠 얘기를 들어보면 엄마가 보기에 티격태격 그리 다툰다는 얘기를 어렵지 않게 접한다. 그런 얘기의 엄마들 결론은 아빠가 참 유치하다는 것이다.
부자지간 싸움을 심리학적으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때문이라고 보는데, 그런 거창한 분석이 아니라도 싸움은 인간사의 기본이다. 중요한 건 정확한 심정을 상대가 이해하는 데 있다고 나는 본다.
나는 내 유치한 감정을 반성하지만, 내 감정의 나쁜 상태를 내 아들들이 잘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심연을 너무나도 잘 파헤친 니체는 말했다. 인간은 3단계 성숙과정을 거친다고. 낙타-사자-아이의 단계다. 순종하는 인간에서, 반항하는 인간으로, 다시 순수한 인간으로.
니체 선생의 말은 그럴싸하다. 그런데 니체 선생의 말은 적이 유감이다. 모든 인간이 이 과정을 거치며 성장하지도, 성장할 수도 없다. 그저 니체 선생이 보기에 인간은 그런 과정을 거쳐 죽는 게 좋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그만이다.
심보통(*내 필명) 내가 보기에는 애에게도 어른의 깊이와 시근이 있고, 어른에게도 아이의 유치함과 순수함이 있다.
인간은 그리 불완전한 존재로 머물며 세월의 바다를 따라 흘러간다. 머물러 흘러가다 어떤 것을 경험하고 인식함으로써 불완전성이 조금 보완된다. 그러나 인식도 환경 따라 사정 따라 시절 따라 변한다.
결국 인간은 불완전성을 뛰어넘을 수 없다. 그저 그때그때 보다 좋은 쪽, 보다 아름다운 쪽을 택하고 실천하는 가짓수를 늘리면서 불완전성을 보완하며 살면 된다. 그리 살아도 이 시대엔 성인 축에 낄 것이다. 보통의 삶을 살아내기란 기실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나는 ‘보통의 삶’을 이룩하려 남들보다 열심히 책을 보고 글을 짓고 아이들과 함께한다. 이제 얼마간은 바둑책을 보고 연마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드는 연마 없이 되는 건 단 하나도 없다. 연마? 이것도 왠지 바둑용어 냄새가 솔솔 난다. 아닌가? 서예용어 같기도. 아무튼 갈고닦는 연마는 중요하다.
불교에선 경험을 업(業)이라고 하고 업의 결과를 보(報)라고 한다. 업의 보는 업에 이어 바로 일어날 수도 있지만 한참 지나 일어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보가 한참 뒤에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보를 낳을 힘을 업력(業力)이라고 하는데, 업력은 연마 없이 생겨날 리 만무하다.
업력을 간직하고 있는 걸 불교에선 종자(種子)라고 한다. 종자는 씨앗이다. 씨앗은 아무 때나 발아하지 않는다. 시와 때에 맞춰 싹을 틔우고 줄기를 뻗쳐 가지를 낸다. 그다음 실한 열매를 맺는다. 우리 안의 종자도 그런 과정을 거친다.
연마가 업보고 업보가 종자다. 종자가 결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