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선(신성) 찾기

by 심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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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낮에 라온이와 도서관을 다녀왔다. 지난주에 이어 두 번째다. 라온이가 도서관을 가는 것은 마실이다. 아빠와 자전거 타고 킥보드 타고 10분 거리의 도서관으로 마실가는 일이 즐거운 거다. 지척의 슈퍼에 들러 군것질을 사는 것이 즐거운 거다. 도서관에 앉아 있는 시간은 지난주엔 10분, 어제는 5분 정도였다. 그래도 어린이집 때부터 배운 게 있어선가 이 책 저 책을 펼쳐보는 신통함을 보이긴 한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는 수업 전 매일 20분간 독서를 한다. 30년 관록의 담임선생의 ‘강추’에 따른 것이다. 담임선생 왈 “공부는 독서가 기본입니다.”

라온이 덕에 지난주에는 <헤세의 인생공부>를, 좀 어려운 소설 <왕의 남자>와 좀 두껍고도 단어와 표현이 설어 진도가 잘 빠지지 않는 소설 <북간도>, 매우 고루한 연구서 <우리말로 본 단군신화>를 읽는 중에 빌려다가 짬짬이 보았다. 헤르만 헤세의 문장을 추려 곱게 치장한 에세이집인데 이런 걸 책으로 만들어 수익을 챙길 자격이 편집자에게 출판사에게 있는가 싶으면서도 옹골지게 헤세의 생각과 자세와 문장을 잘 먹었다.


그 결에 <헤세의 인생공부>를 반납하면서 문득 ‘문장들’에 관한 책을 읽고 싶어졌다. 검색대에서 ‘문장들’이라고 쳤다. 그리 찾은 게 동향 출신이자 이웃 형님 되는 문태준 시인의 산문집 <나는 첫 문장을 기다렸다>였다. 아침에 일어나 첫 장을 펼쳐 읽고는 [글밥-나의 신선(신성) 찾기]를 짓기로 마음먹었다. 글을 짓는 것은 이처럼 억지로 짓겠다고 지어지는 게 아니라 내심이 잔잔하게 진동해야 그 파동으로 흘러 내려오는 것이다. 내가 짓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신성이 짓는 것이다. 태준 형도 그걸 알고 있어 반가웠다.(위 책 20~22쪽)


오랜만에 두 아들 이야기다. 우리 나이로 라온이는 8세, 바론이는 5세가 됐다. 요 며칠 아내가 야근이라 꼼짝없이 두 아들을 도맡아야 했다. 그렇잖아도 막둥이 바론이에게 미안한 감정이 슬금슬금 피어오르는 요즘이었다. ‘잘 되었다. 이참에 사랑을 담뿍 주자.’ 두 아이를 키우면서 느끼는 거지만 막내는 ‘뒷전’일 때가 많다. 부모 사랑은 첫째에게 쏠리기 마련이다. 둘째가 없을 때는 당연히 첫째에게 모든 사랑이 가게 되고, 둘째가 생기면 첫째가 그새 자라 할 일이 많아져 신경이 더 쓰인다. ‘묘한 첫째 바라기’ 현상이 가정사에 도도하게 흐르는 것이다. 3남매 중 막내인 나는 그리 ‘막내란 이것이구나, 막내는 이리 자라는 것이구나, 나도 이리 자란 것이구나’ 짐작하고 알아가는 중이다.


바론이 중심으로 놀이 계획을 짰다. 바론이에게 뭘하고 싶냐고 물었다. 킥보드를 타고 싶다고 했다. 아이들은 여러 개를 원하지 않는다. 킥보드를 원하면 그게 최소 사나흘은 간다. 그리 자연사박물관을 갔다가, 한밭공원 광장을 갔다가 장소만 바꿔서 연이틀 킥보드를 타러 다녔다. 라온이가 협조를 잘해 주었다. 간식이 빠지면 아이들은 심란하다. 슈퍼마켓에 들러 각자가 원하는 과자와 음료를 고르게 한다. 그래야 놀이가 신난다. 전장에 나간 병정들의 든든한 총알이랄까.


라온이와 바론이는 주거니받거니 만담도 잘한다. 양보도 해가며 놀이 순서를 조정하기도 한다. 저녁 메뉴를 상의해서 결정하기도 한다. 주로 쿨한 쪽은 동생 바론이다. “짜장면을 먹자, 돈가스를 먹자” 팽팽히 맞서다가도 바론이가 먼저 “좋아 내가 양보할게” 한다. 그러면 라온이는 “그럼 과자는 바론이가 먼저 먹고 싶은 걸 먹자”고 한발 물린다. 이 모습이 전부가 아니다. 야외에서 놀 때는 라온이가 바론이를 끔찍이도 위한다. 바론이가 처음 사용해 보는 놀이기구나 잘못하는 것은 라온이가 쏘 스윗하게 알려준다. 라온이는 ‘스윗가이’다. 아비의 눈으로 보면 대찬 쪽은 바론이, 진중한 쪽은 라온이다. 사내의 눈으로 보면 차근차근한 일은 라온이가, 굵직굵직한 일은 바론이가 잘하겠다 싶다.


아빠는 두 아들 하는 양을 흐뭇하게 바라만 보면 된다. 이것이 두 아들에게 알맞은 예의와 대우다. 예수(禮數)다. 아빠는 울울창창한 숲으로 다가가 진기한 나무를 관찰하기도 하고 아이들과 멀찍이 떨어져 높고 푸른 하늘을, 그 터를 유유히 흐르는 구름을 한창 감상하기도 한다. 아빠의 감상시간을 빼앗는 건 주로 바론이다. “아빠, 이리로 와봐!” 그러면 감상을 접고 두 아이에게 달려간다. 그 시간쯤은 주로 간식먹을 시간이다. “이제 뭘 좀 먹고 놀까?” 라온이가 그런다. “그래, 그래 그게 좋겠다. 간식 고고!” 그 시간에도 숲은 바람을 머금고 나풀대고 하늘은 환장하리 만큼 높고 푸르다. 구름은 흐뭇하게 우리 삼부자를 내려다보며 유유자적이다. 들판은 신록으로 넘실대다 더러 출렁인다. 얼마나 평화로운 시간인가. 감사한 순간인가. 나는 이 감사의 순간순간을 두 신성(神聖) 라온이와 바론이에게서 얻는다.


아내는 이런 내 마음을 속속들이 간파하지 못한다. 그 많은 유쾌발랄한 사진들도 보고서다. 아내는 간밤 ‘오늘도 아이들을 돌봐줘서 고맙다’는 메시지를 남겨놓았다. 내 신선과 신성을 깨뜨리는 문자다. 불필요한 문자다. 태준 형은 이리 써놓았다. ‘바깥의 신선함이 마음에 들어와 살고, 그리하여 내면이 물 흐르는 듯하고, 과잉에 이르지 않는 것, 이것이 우리가 가꾸어야 할 영혼의 한 면모가 아닐까 한다’고. 태준 형이 신선한 마음을 얻는 방법은 만물을 관찰하며 그것들 또한 우리네 삶과 다르지 않다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태준 형의 시각과 관점은 특유의 관찰과 사유의 결과물이다. 어떤 시는 더없이 탁월하다. 그런데 어떤 글은 그의 관찰과 사유가 작위적이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건 다분한 의도적 노력의 산물이기 때문일 터다. 진짜 신선함은 두 신성을 모시고 노는 데 있다. 나는 그리 믿는다. 태준 형에게도 어린 신성들이 있었을 거다. 그 시절 태준 형은 신성들을 만물 바라보듯 했을까, 아니면 일하고 시짓기 바빠 시종 만물보기만 했을까, 나는 이 아침 그것이 궁금하다. 내가 작위적이란 느낌을 받은 글은 형의 제주살이 감상기였다.(연초 중앙일보 칼럼에서 ‘해바라기’ 관찰 부분이 그랬다.) 너무 감아쳤다는 느낌.


오늘 우리 부부는 두 신성을 모시고 강원도 여행을 떠난다. 신선함이 샘솟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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