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삼경(四書三經)

by 심지훈

올해로 내 나이 마흔다섯. 내 나이쯤 되면 가을벼가 누렇게 익어 고개를 숙이듯 중년 남성들은 서서히 고전에 관심을 보인다.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을 비롯해 <서경>과 <주역> 같은 고전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물론 서양의 고전을 찾는 사람도 적지 않다. 출판사에서는 <마흔에 읽는 논어>, <오십에 읽는 주역> 같은 책을 전략적으로 펴내기 바쁘다.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


올해 나는 ‘지니 뮤직’의 ‘랜덤듣기’처럼 ‘무작위독서’를 하면서 제 분야의 책을 동시다발로 읽고 있다. 이렇게 한 까닭은, 아니 이렇게 된 까닭은 이제쯤 뒤섞어 읽는 것이 내게는 훨씬 편하고 유용한 독서이기 때문이다. 마치 교향악단의 지휘자가 단원들의 소리를 조율해나가듯 내가 지휘자가 되어 이 책 저 책을 변주하며 읽어나가는 것이다.


물론 중심에 두는 책은 있다. 그 책을 읽다가 관련 책을 찾아보고, 관련 책을 찾아보다가 호기심이 동하는 책을 보태고, 또 어떤 계기가 되어 다른 책을 추가로 펼쳐 읽는 식이다. 내가 읽는 책들은 대개가 1990년 전후로 발행된 것으로, 누런 종이에 깨알 같은 글씨가 빡빡한 것들이다. 내 지적 관심이 그 시대의 저작들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지금 중심이 되는 책은 해방 정국과 이승만 정부의 주요 사건을 다룬 실록 역사소설 <산하1~4>이다. 모두 2000쪽이 넘는데다 사건들을 일별해 찾아보느라 느릿하게 진도를 빼고 있다.


염천에 읽기 시작한 <산하>는 이제야 3권에 들어섰다. 제주 4.3에 이어 여수반란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이승만의 심경이 입체적으로 잘 그려져 있다. 해방 전야에는 남북단일 정부수립이 이슈였다가 해방이 되자 본격적인 좌우 이념 대립으로, 또 소련과 북한의 농간으로 허송세월하다 유엔의 결의로 남한단일정부가 서고, 그렇게 선 남한단일정부는 친일파 청산 대신 빨갱이 소탕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 그리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소위 반민특위는 유야무야된다. 암세포처럼 퍼져 제 분야에 똬리를 틀고 앉아 국가 근간을 뒤흔드는 공산당을 색출하기 위해 친일 고문 경찰로 악명이 높았던 노덕술 등이 애국자로 소환된다. 우리네 현대사는 굽이굽이 그리 흘러왔다.


이 스토리는 사흘 전 새벽 우연히 눈에 띠어 펼쳤다가 내리 읽은 <재벌신문>과 닮은 구석이 많다. <재벌신문>은 ‘재벌언론의 실상을 파헤친 국내최초의 언론소설’이란 부제답게 가상의 재벌언론 광명신문에서 벌어지는 한국 재벌언론의 실상을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경향신문 해직기자 출신의 윤덕한 씨. 1995년 문민정부 때 나온 책인데, 이승만 정부 때 ‘친일파 vs 공산당’ 틀은 ‘전두환 군부정권 vs 문민정부’ 틀로만 교체된다. 과거사 청산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우리 언론의 약사는 대강 이렇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그해 7월 언론사 1도 1사 정책, 소위 언론사통폐합에 따라 전국의 언론사들이 강제 폐간되고, 7년이 흐른 1987년 6.29 선언으로 언론자유화가 이루어지고, 이듬해 폐간됐던 언론사가 재창간을 선언하고 해직 기자 다수가 복직된다.


재벌언론 ‘광명신문’ 내부에서 승승장구하려면 안으로는 회장에게 줄을 잘 서야 하고, 밖으로는 신군부에 줄을 잘 대야 한다. 그리 차장이 부장되고 부장이 편집국장 되고 편집국장이 사장되는 순을 밟는다. 그 시절 청와대 출입기자 인사는 청와대 2급 비서관이 쥐락펴락했다. 출세욕에 눈먼 기자는 물론 도생에 능한 기자는 줄대기와 협잡으로써 자기 안위에 능해야 했다.


그랬던 그들이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이번에는 문민정부 찬양자, 수호자로 변신한다. 신문사 편집국 내부에선 신군부를 등에 업고 설쳐댔던 ‘사이비 기자’들을 정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그들은 힘이 없다. 친일파가 공산당을 처치하는 최고의 일꾼이 되어 영예를 이어가듯, 신군부의 술과 돈을 꼬박꼬박 받아 먹어가며 부역하던 친군부 기자들은 저마다 ‘죽은 넉살 좋던 강화년’에 접신되어 문민정부에도 짜웅을 잘한다. 자리 유지는 물론 승진도 척척 이어간다. 비비는 것도, 짜웅도, 회장 심부름도, 기사 빨아주기도 이들에게는 모두 ‘능력’이다.


이 책은 29년 전에 나온 것이지만 지금 보아도 이만큼 신문사 실상을 낱낱이 드러낼 수 없다는 점에서 수작이다.


어떤 책은 끝맺음이 궁금해 부여잡게 되는 것이 있다. 이 책이 그런 류였다. 도대체 드라이이한 이야기의 끝을 어찌 맺을까가 궁금해 끝까지 읽었다. 끝도 말끔했다. 소설이라고 하지만 기자가 쓴 것이어서 차라리 ‘(가상) 르포’라 해도 좋겠다. 드라이하면서도 리드미컬하게 독자의 호기심을 잘 유도해 놓았다.


신문사의 적나라한 실상을 알고 싶은 분들, 언론사를 상대해야 하는 기업인과 조직의 대표들, 언론사를 지망하는 지망생들이 읽어두면 참 유용할 책이다.


내가 대학 때 이 책을 읽었어도 무식이 용감하다고 그래도 신문기자가 됐을까 싶다.


다음으로 소개할 책이 오늘의 주제 <사서삼경>과 직결된다.


여기 책 2권이 있다. <어느 할아버지의 평범한 이야기>라는 에세이집과 <사서삼경을 읽다>라는 교양서다.


앞서 내 독서는 ‘무작위읽기’ 지경에 이르렀다고 했는데, 이 경지는 배우는 학인에게는 배우 중요한 단계라고 생각한다.


배운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교과서 지식 단계를 넘어 오리지널을 지향한다는 것이고, 그 기본지식과 오리지널을 분별해 자기화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요즘 세상은 정보가 흘러 넘친다. 해서 관건은 많은 것을 읽는 것보다 잘 분별해서 읽는 게 될 것이다. 이를 ‘지혜롭게 읽기’라고 해두자. 무분별하게 아무 책이나 마구 읽어대다간 잘못된 상이 뇌리 속에 박힐 수 있다. 우리네가 잘못된 유교 질서에 사로잡혀 살아온 것처럼 말이다.


이 사실은 시골에서 나고 자란 마흔다섯 나에게도 이런저런 영향을 끼쳤다. 결혼해 심한 부부싸움 끝에 나는 아내에게서 “당신은 조선시대 남자야!”라는 악다구니를 들은 적도 있다. 내가 조선시대 남자라고? 밥하고,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음식물쓰레기 버리고, 주말 분리수거를 도맡아 하는 내가? 참담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어느 할아버지의 평범한 이야기>와 <사서삼경을 읽다>는 둘 다 유교 질서의 옛 고전을 다룬다. 그런데 그 결은 정반대다.


<어느 할아버지의 평범한 이야기>는 육사 출신에, 대구가 고향인 박정기란 분이 쓴 책이다. 초판은 1989년에 나왔다. 원래 태어난 손자 손녀,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손주들을 위해 가족들만 돌려보기 위해 지은 책이다. 일종의 ‘가내지침서’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책 내용이 너무 좋아 입소문을 타면서 미국 중국 일본 등지로도 번역됐다. 국내에서만 30만 권이 팔렸다고 한다. 나는 이 책을 6년 전 쓰레기분리수거장에서 주워 소장했다. 책 표지는 옛날 것이라 볼품이 없는데, ‘어느 할아버지가 대체 무슨 평범한 이야기를 썼다는 건가’ 궁금해서 주워왔다.


서지정보가 찢어져 있어 처음에는 지은이를 확인할 수 없었다. 네이버에 검색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흔친 않지만 가정에서 자녀들을 위해 돌려볼 심산으로 집안 어른이 쓴 책이겠거니 하고 말았다.


그런데 책 내용이 너무 좋았다. 인생, 마음, 학문, 몸, 사회, 사랑, 교육, 예절, 가정경제 등 인간사를 총망라한 이 책은 일단 문체가 아주 정갈하다. 아마도 박정희 대통령 저서를 한 권이라도 읽어본 분이라면 ‘정갈하다’가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할 것이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의 육사 후배인 박정기란 분의 가슴에는 박 대통령처럼 권(權)만 있는 게 아니라 몰캉몰캉한 정(情)도 있다. 그의 글은 그래서 정갈하면서도 정겹기까지 하다.


이 책은 손 가는 대로 펼쳤다가 내용이 너무 좋아 자세를 고쳐잡고 처음부터 읽어나갔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시대에 이런 책을 왜 부여잡고 있는 건가.’ 유교에 바탕한 고법을 그리 귀히 여기고 실천하라고 시종 이야기하고 있는 거였다. 얼마나 독서력이 강하던지 처음 보는 흥미진진한 고법도 접할 수 있다. 그만큼 에세이로는 깊이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고 한 50쪽 남기고 팽개쳐두었다. 서늘한 가을바람 불기 시작하던 며칠 전 밤, 서재 북창을 열고 덩그러니 앉았다가 이 책이 눈에 밟혔다. 다시 집어 들었다. 내 관념은 지나간 지 오래고, 책 내용은 내용으로써 너무 좋아 그대로 다 읽어나갔다.


‘이런 훌륭한 책이 왜 소개가 안 돼 있지?’ 하며 구글에서 제목을 다시 쳐봤다. 오, 구글! 구글에는 이 책이 소개돼 있다. 저자 이름과 책 내력을 그리 알았다.


요즘은 자전거 타기가 좋은 날씨다. 마침 <사서삼경을 읽다>가 당근마켓에 저렴하게 올라왔다. 바람도 쐴 겸 이웃 아파트로 사러 갔다. 저자가 반갑다. 김경일 교수. 1999년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화제작을 낸 그 분이다. 이 책은 아직도 꾸준히 팔리는 스테디셀러다. 공자를 아주 자근자근 밟아놓았다.


그런데 공자를 ‘밟았다’가 중요한 게 아니라 밟을 수 있는 그의 내공이 중요한 것이다. 그는 대만에서 갑골문을 연구했다. 우리나라 한문 전공자 중 갑골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유일한 사람이다.


한자의 ‘조상’을 공부한 그는 공자의 허상과 치부를 너무나도 잘 알게 됐다. 그리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를 썼다. 이 책을 읽어보라. 조선이라는 나라가 허접스레 보일 것이다. 그 허접스레한 조선이 바로 조선의 실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김경일은 진짜 학인이고 학자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뒤집기에 능하다는 것이다. 자기 색을 갖고, 자기 주장을 펼치고, 자기 신념을 떳떳하게 밝힐 수 있어야 학인이고 학자다. 앵무새처럼 남 얘기만 도돌이표 찍으면 그건 학인도, 학자도 아니다.


그런 면에서 <어느 할아버지의 평범한 이야기>는 적이 아쉽다. 자기 견해가 아니라 앵무새 견해를 시종 밝혀 놓은 것이다. 남의 이야기를 끌어오고 주워다 놓았다. 그것이 박정기 할아버지의 삶에 짙게 투영된 것들이라고 해도 그건 남의 삶을 산 것이고, 남의 삶을 자손에게 살라 잘못 알려준 것이 된다.


그럼에도 이 책은 높은 점수를 받을 까닭이 있다. 용사(用事)의 전범이 되기 때문이다. 용사, 옛글을 시의적절하게 인용함으로써 뭇 대중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글쓰기의 한 기법이다.


반면 김경일 교수의 <사서삼경을 읽다>는 이렇게 전제한다.


‘이데올로기서의 공자를 버리는 것과 옛 기록으로서의 고전을 가치중립적으로 읽어내는 일은 전혀 별개의 작업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이 책은 오리지널의 냄새가 날 수밖에 없다.’


그리 알려준다. 동양사회의 뿌리 깊은 ‘족보 타령’의 기원이 공자에 있다는 것을, 조선 당쟁의 코어였던 상복 싸움의 출발이 일찌감치 죽은 공자의 주검 옆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또 한나라 때 희대의 모사꾼 동중서에 의해 공자의 수직 윤리가 부활했다는 것을, 청백리는 가난의 논리이며 움츠림의 처세술일 뿐, 백성들의 실생활을 실제적으로 개선시킨 일은 없다는 것 등을 말이다.


이 책이 매력적인 것은 희귀하게 ‘오리지널’에 맥을 댄 신의(新義)의 대표가 능히 된다는 점이다. 신의, 글은 모름지기 창작적이고 새로워야 한다는 뜻이다. 용사와는 다른 글쓰기 기법이다.


그는 같은 전고를 두고도 파격적인 해설을 독자에게 들려주고 있다. 김경일 교수 식의 <사서삼경>이라면 한문을 한문투로 되풀어 쓴 기존 사서삼경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도 속속 쉽게 들어온다.


여느 해보다 매력적으로 다가온 이 가을, 김경일 교수의 <사서삼경을 읽다>를 곁에 두면 어떨까. 물론 <산하1~4> <재벌신문> <어느 할아버지의 평범한 이야기> 일독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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