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글방 궁고재(窮考齋)의 다관(茶館)은 여름에 폐장했다가 가을에 개시, 이듬해 여름에 다시 폐장한다. 그러니까 봄, 가을, 겨울에만 여는 것이다. 여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아내 성정이 워낙에 담백한지라 잠자리에 들기 전 식탁 위에 자질구레한 것들이 놓여있는 꼴을 두고 보지 못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한여름에는 차 생활 자체가 염천마냥 구살머리쩍기 때문이다. 성가시고 자질구레한 일들은 대개가 강퍅한 구석이 있어서 고집을 피우면 필시 분란이 된다. 때문에 아무리 취미농처럼 하는 일이라 해도 1년 4계절 중 1계절은 눈치껏 행동해야 할 요령을 지녀야 한다. 그것이 더불어 사는 지혜요, 자기 몸과 정신을 조화롭게 하는 첩경이다.
올가을 궁고재엔 지난 20년간 마셨던 보이차를 뒤로 하고, 녹차와 홍차를 준비했다. 차를 마시는 까닭은 본디 조물주의 화, 조화(造化)에 있다. 그걸 모르고 음료라고 마시면 오줌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는 ‘차 한잔 하자’라고 하면 곧잘 커피를 떠올리지만, 차는 중국어 ‘차(cha)’ ‘데(te)’ ‘테이(tay)’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국의 차는 하도 유명해서 해로와 육로를 통해 고루 전파됐는데, 전자는 ‘차’로 후자는 ‘티’로 굳어졌다. 러시아 몽골 이란 터키 일본 한국에서는 “차(cha)”라 부르고, 영국 독일 네덜란드 등지에서는 “티(tea)”라는 까닭이다. 특이하게도 해로로 전파된 포르투갈에서는 “티”가 아니라 “차”라고 부른다.
차(혹은 티)는 커피와 같으면서도 결정적 차이가 있다. 이 결정적 차이 때문에 차는 많이 마셔도 되고 커피는 많이 마시면 몸에 해롭다. 둘 모두 카페인이라는 성분이 함유돼 있다.
그런데 차에는 커피에는 없는 ‘테아닌’이라는 성분이 존재한다. 아미노산의 일종인데 차에는 소량의 아미노산이 함유돼 있고, 그 아미노산 안에 다량의 테아닌이 들어있다. 이 테아닌의 역할 중 하나가 몸속 카페인을 배출시키는 것이다. 카페인은 수돗물 염소가 우리 몸으로 불식간에 흡수되듯 혈액 속에 빠르게 침투한다. 그런데 차의 테아닌은 카페인의 혈액 침투를 막아내고 단시간에 몸 밖으로 내보낸다. 대소변, 호흡, 땀을 통해서다.
1908년은 ‘차의 해’로 기념해도 좋을 법하다. 그전까지는 인간의 혀로 느낄 수 있는 맛은 단맛 쓴맛 신맛 짠맛 등 4가지뿐이라는 게 상식이었다. 1908년 일본에서 또 다른 맛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맛은 100년 뒤에야 ‘우마미(旨味)’라고 명명됐다. 우리말로는 감칠맛이라고 한다.
이 감칠맛의 전거는 다름 아닌 차다. 차가 감칠맛을 내는 비결은 바로 테아닌에 있다. 이 지점을 파고들면 조물주의 화, 조화가 도드라진다. 테아닌은 원래 느끼한 맛인데 카페인의 쌉싸름한 맛과 어우러져 감칠맛을 내는 것이다. 한편 국어사전에는 감칠맛을 ‘입에 당기는 맛’이라고 돼 있는데 모호하기 짝이 없다. 백문불여일미(百聞不如一味)! 차를 음미하면 감칠맛의 진상은 절로 규명된다.
우리 속담에 ‘개똥에 약에 쓰려면 없다’는 말이 있는데, 세상 만물은 연결돼 있고 저마다의 쓸모를 갖고 있다. 이 심오한 뜻을 자각하고 각성하는 것을 일러 구한말 동학도인들은 “한울님의 조화”라 했다. 현대에 들어 조화 정신은 ‘국민교육헌장’에서 맥을 발견할 수 있다. “(…)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하는 대목에서다.
차를 일상다반사로 즐기지 않는 이라 해도 차를 마시면 “차분해진다” “평안해진다”는 말을 곧잘한다. 심신의 안정과 긴장감 완화(뇌의 이완) 역시 테아닌이 주는 효과다. 과학적으로도 증명된 바, 차를 마신 후 30분이 지나면 테아닌이 소장을 통과해 대뇌에 도달한다. 그 상태로 10분이 지나면 몸과 마음이 안정되고, 긴장감이 해소되며, 집중력이 향상된다는 게 실험의 결과다.
그러니까 차는 커피처럼 번갯불에 콩 볶듯 10분 만에 마시는 게 아니라 일기일회(一期一會)의 마음으로 차분하게 기본 40분은 마셔야 효과를 볼 수 있다.
궁고재 다관에선 전남 보성의 명인 기산 최창돈 선생의 기산차(세작)과 블렌딩하지 않은 대만산 스트레이트티를 준비했다. 손님 접대를 위해 청초한 녹차와 어울리는 순백의 백자 5인 다기도 새로 마련했다. 대만산 홍차는 인도의 다즐링, 스리랑카의 우바와 함께 세계 3대 홍차로 손꼽히는 중국의 기문 홍차처럼 특유의 깊은 향과 맛이 일품이다.
올가을 첫 손님은 아내였다. 첫 녹차와 홍차를 아내에게 ‘지금 이 순간이 생애 단 한 번의 시간’이란 마음으로 대접했다. 두 번째 손님은 라온이 어린이집 동기 조준희네 가족이다. 이번 금요일 궁고재에선 다연(茶宴)이 열린다. 일기일회의 지극한 마음은 아내 때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인(茶人)에게는 그런 향긋한 정(情) 봉긋 피어올라야 한다. 정은 예(禮)다. 예는 다(茶)의 알파요 오메가다, 골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