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뜻밖에 행운을 만난다. 급전(急錢)을 구하는 이에게는 뜻밖에 돈이 행운이겠지만, 나 같이 책을 구하는 이에게는 뜻밖에 좋은 책을 만나는 게 아주 큰 행운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그야말로 운수대통한 날이다.
오전에 우연히 근간 <난중야록 1>을 손에 넣었다. ‘이순신 밤에 쓴 일기’라고 어깨 제목이 달려 있고, ‘이순신 탄생 480년 만에 공개되는 숨겨진 이야기’란 부제가 달렸다.
두세 달 전 영남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김신곤 선배님께서 <임진왜란과 모명 두사충>을 보내주어 단숨에 다 읽었다. 기자 특유의 단문에 적재적소에 역사적 사실을 넣어 쉽게 읽혔다. 그 기억이 있어 <난중야록>이 눈길을 잡았다. <난중일기>가 정사라면 <난중야록>은 야사라는 건데, 무슨 이야기일까 호기심이 동했던 것이다.
이 책은 맥락 없게도 <나는 이불 속에서 콘텐츠로 월급 번다>와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감성 장인 임영웅의 힘>과 함께 5,000원에 당근마켓에 올라왔다. 책은 대체로 사람의 어울림처럼 유유상종이기 마련인데, 이렇게나 간극이 큰 판매자는 처음 보았다.
그렇거나 말거나 싸게 나온 책값을 더 깎거나 1권만 사겠다는 건 책과 글을 다루는 사람으로서 몰염치 아닌가, 해서 나는 아예 아니 샀으면 아니 사지 책값과 책 종류를 갖고 흥정하려 들지는 않는다.
묶음 중 2권은 내 관심사와는 거리가 멀어 살까 말까 고민하다, 대개 고민하다 만 경우는 사는 게 좋았던 경험이 더 많아 2권은 나누더라도 사기로 했다.
임영웅은 훑어는 보되, 임영웅을 좋아하는 아주머니나 할머니를 만나면 넌지시 선물로 줄까 싶고, 콘텐츠로 월급 본다는 목차 정도 보고 그 쓸모를 따져볼 심산이었다.
책을 받고 보니 임영웅은 작년에 나온 것이고, <난중야록>과 <콘텐츠로 월급 번다>는 근간이다.
<난중야록>을 펼쳐 읽으며 오랜만에 등골이 찌릿찌릿한 감흥을 느꼈다. 몰입감이 상당했다. 이런 이야기는 우리 라온이가 3학년이 되면 매일 조금씩 자주 읽어주면 좋겠다 싶었다. 아빠가 쓴 라온이 이야기를 라온이가 자라서 읽도록하는 것보다 <난중야록> 1,2권을 초등학교 내내 읽도록 하면 훨씬 영양가가 있을 것 같았다.
문장을 보면 편저자 조강태 선생님이 궁금해진다. 표지에 ‘이순신 15대 외손’이라고 돼 있는데, 이 분의 문장력이 비범하다. 어쩌면 이 이야기를 세상에 공개하지 않은 까닭이 나쁜 의미로 <난중일기>에 폐가 될 것 같아서라기보다 <난중일기>보다 더 대단한 문장력 때문에 원작의 가치를 반감케 할 수도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조강태 선생님은 <난중야록>을 소설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의 14대손인 그의 어머니(이순열 여사)가 시집오면서 집에서 챙겨온 <야록(전7권)>을 어려서부터 귀가 닳도록 들어 그걸 거의 다 외우고 있다고 한다.(서문 중)
이 <야록>은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에는 참아 기록하지 못한 ‘오리지널’ 일기이면서 더 풍성한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조강태 선생님은 어린 시절 숱하게 어머니로부터 듣고 자랐다. 안타깝게도 그 원본은 유실됐다. 이 책 출판을 기회로 잃어버린 <난중야록>을 다시 되찾게 되기를 선생님은 간절히 바란다.
이제 고희를 넘긴 조 선생님이 살날이 많지 않다고 느껴 이 이야기를 세상에 공개한다고 밝히고 있다.
장르는 소설이고, 형식은 일기다. 아마도 <난중야록>은 <난중일기>와 함께 나란히 더 깊이 읽히는 일기류의 대표작이 되지 않을까 싶다.
<난중야록> 1장 ‘귀선’에는 거북선을 만드는 과정이 건조한 사실을 넘어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집안의 먼 조카뻘인, 그러나 직급은 훨씬 높은 율곡 이이. 이순신은 이이가 주창한 십만양병설의 실상을 직접 묻고 이이의 의견을 듣는다.
당시 조정에선 북쪽 오랑캐와 남쪽 왜놈의 침략에 대비해 군을 양성하자는 이이의 주장에 대소신료들이 입을 모아 반대했다. 그 까닭이 기가 찬데, 군을 양성하면 대소신료들의 노예들을 내주어야 해 가산이 축나기 때문이다. 이 현실을 이이와 이순신은 “아저씨” “조카님”하며 대화 중에 개탄한다.
이 대화 뒤 얼마 안 가 이이는 운명을 다한다. 이순신은 이이가 준 아이디어를 잊지 않았다.
임진왜란의 ‘주역’ 거북선은 이이가 준 아이디어였다.
“아저씨 송곳을 꽂은 철갑배에서라면 백병전에 능한 왜놈들과 붙어도 승산이 있을 겁니다.”
그 아이디어를 실천하는 이순신이지만, 거북선을 완성토록 추동한 건 이야기 속 주인공 임단(任丹)이다. 임단은 이순신의 부엌 시종 질임(質任)의 딸이다.
임단이 저녁상으로 들인 거북탕으로부터 이이의 아이디어는 이순신을 통해 구체화되고 실현된다. 이 과정에서 독자는 임진왜란의 주역이 또 한 명 더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거북의 특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임단!
이순신은 영특한 임단에게서 거북의 특성을 요모조모 들어 거북선을 거북의 등뼈와 등의 연결에 착안해 만들었다.
사실과 상상이 조화를 이뤄 이순신 장군의 15대 외손이자 소설가인 조강태 선생님의 손에서 <난중야록>은 빼어난 또 하나의 일기로 탄생했다.
이제 대한민국엔 <난중일기>와 <백범일지>와 함께 <난중야록>이 ‘3대 K-다이어리’로 불릴 것이다.
나는 조강태 선생님을 수소문했다. 마침 롱런을 예상한 듯 다음카페를 열었다. 거기에 뵙고 싶다고 짧은 글과 함께 연락처를 남겼다.
이런 분은 죽기 전에 꼭 한번 만나봐야 한다. 조강태 선생님에게는 책 밖의 ‘이순신 후손 70년 인생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강태일기>는 <난중일기>에도 <난중야록>에도 없다. 그 일기는 또 누군가가 새로 정리해야 한다. 내가 하고 싶다.
/심보통 2025.9.10.
*글을 마감하는데, 조강태 선생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오늘 카페를 연 것이라고 한다. 내게 카페운영자를 제안하셨다. 일단 <난중야록> 1,2권을 읽고 인천 부평 작업실로 찾아 뵙기로 했다.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대통령실에서 잃어버린 <야록> 전7권을 찾는 데 앞장서기로 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