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인터넷에서 겨울간식 심리테스트가 떠돌았다. 내가 어떤 겨울간식과 유사한 사람인지 보는 간이 테스트였다. 겨울간식하면 어떤 것이 떠오르는가? 붕어빵. 호떡, 군밤같은 친근하고 정겨운 것들부터 요즘들어 유행하는 타코야끼까지. 여러가지 간식들 중에 내게 해당한다는 것은 '귤' 이었다.
이 테스트도 요즘 인터넷에 유행하는 다른 간이 테스트들처럼 MBTI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귤은 ISFJ 란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본인에게 예민하고 불친절하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요 일주일간 내 고민거리가 딱 저거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왜 내게 불친절한가?
다른 심리테스트로 이야기를 잠시 옮기자면 애니어그램 테스트( 역시 90문항짜리 간이 인터넷 테스트)에서는 1w2가 나왔다. 개혁가라는데 거기서도 내게 엄격하다, 심지어 타인에게도 엄격하다는 말이 나왔다.
아니 왜 이렇게 피곤하게 사는거야?
요즘같이 너 자신을 사랑하라, 사랑해야 한다라는 것이 진리처럼 만연한 시절에 이렇게 시대에, 나 같은 사람은 너무나도 나에게 각박하게 굴고, 엄격하고. 불친절해서 마치 아무것도 모르고 유행에 한참이나 뒤떨어진 사람같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모든 건 이유가 있는 법이다.
내 어린시절을 톺아보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한참이나 묻어두었던 기억들을 다시 발굴해보았다. 처음에는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크고 무거운 기억들 때문에 너무 혼란스럽고 엉겁결에 다른 기억들이 묻혀 온데간데 없어지기도 했지만 어쨌든 어릴적의 기억들을 나란히 전시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전에 우리 부모님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나의 부모님은 1984년 4월, 중매로 소개받은 후 3년간의 장거리 연애 끝에 결혼 했다. 28과 30살의 두사람은, 처음에는 가난해서 월세를 사셨는데 심지어 두 삼촌들도 같이 살았다. 신혼부터 딸린 식구가 있었다니 참 엄마의 시집살이도 시작부터 파란만장했구나 싶다. (제대로 각방은 쓰셨겠지?ㄷㄷ)
엄마는 서울이 처음이었다. 충남 출신인 엄마는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는 아빠를 따라 서울에 자리를 잡으셨다. 아빠와 아빠의 두 남동생들까지, 세 남자의 뒷바라지와 집안일을 도맡아 하며 신데렐라처럼 살았던 것 같다.
아빠는 5남매 중 누나가 있는 장남이었다. 강원도 가까운 충북에서 나고 자란 아빠는 작은 체구에도 성깔 하나로 골목대장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시대 장남들의 미덕은 공부해서 집안살림 일으키는 것이었기 때문에, 아빠는 그 사명을 짊어지고, 17살때부터 서울에 계신 외삼촌 댁에 얹혀 살면서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엄마는 외가쪽에서 7남매 중 남동생 하나 있는 막내 딸이었다. 대단한 공부욕심에 고등학교 내내 전교 1등을 다투었지만, 여자는 공부시키지 않겠다는 외할아버지가 있었다. 엄마의 원망도 대단했지만 워낙, 그 시절에 7남매였다. 외할머니는 마음이 약하고 눈물이 많으신 분이었다고 기억한다. 엄마는 1년에 한 두번 정도만 친정에 가셨던 것 같다.
결혼한 그해 6월쯤 임신을 했고, 괴로운 입덧 기간을 지나 1985년 3월 나를 낳았다. 아빠는 맏이였고 나는 첫 친손주였지만 여자아이라서 생각보다 주변의 반응이 싸늘했던건 아닌가 싶다. 태몽은 빨간 백합꽃과 주렁주렁 감이 달린 감나무였기 때문에 딸 이라는 건 미리 짐작하고 계셨더랬다. 결국 아빠가 옥편을 뒤져가며 고민고민하신 끝에 며칠 후 이름을 지어주셨다 한다. 어질고 빼어난 사람으로 크라는 뜻의 이름을 그렇게 부모님께 첫 선물로 받았다.
내가 태어나고 본격 육아가 시작됐어도 엄마에게는 세 남자가 크게 도움이 되진 않았다. 도움을 주신건 아랫집에 살던 아주머니로, 종종 나를 엄마 대신 봐주셨다고 한다. 업어주고 낮잠재워주고... 첫 육아라 엄마도 많이 서툴렀을 것 같다. 백일쯤 지났을 때 내가 많이 보채고 울어서 병원에 가보니 폐렴이었다고 한다. 그날로 입원해서 일주일간 입원했다고 들었다. 아기한테 바늘을 찌르고 울고 하니까 엄마도 같이 많이 우셨다고... 아빠도 퇴근할때마다 병원에 들르셨다고 한다. 아마 그게 7월이었을 것 같다. 나는 그 이후로 한 달에 한번꼴로 밤에 울며 안자고 보챘다고 한다. 그러면 엄마는 거의 밤을 꼴딱 세우다 시피 하면서 나를 업고 밤새 걸어다녔다고 하셨다.
엄마는 맏며느리라서 어르신들 생신상을 다 직접챙겼고 내 백일상(6월 말)과 아빠 생일상(4월)도 챙기셨던 것 같다. 삼촌들 생일도 챙기셨을까 싶다. 명절 때마다 다같이 대중교통으로 시댁에 갔고, 가서도 엄마는 청소, 빨래, 부엌일 등 온갖 집안일을 다 도맡아 하셨던 것 같다. 그러니 나는 대부분 육아의 육자도 모르는 삼촌들과 별관심 없는 조부모님과 있어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단 추석이 지나고 10월쯤 엄마가 다시 임신을 했는데 11월쯤 김장을 도와준다고 조부모님이 올라오셨을 때 배가 아프고 피가 비쳐 병원에 갔더니 유산됐다고 했단다. 엄마는 그 때 굉장히 우울하고 힘들었다고 한다. 세상을 다 잃은 기분이었다고, 많이 울었다고 그때를 회상하면서 울먹이며 언젠가 말했다. 엄마 인생에 상당히 큰 상실이었던 것 같다.
시댁에서? 혹은 친정에서? 혹은 자신이? 누가 그렇게 큰 부담을 주었는지, 첫 아이인 내가 딸이어서 엄마는 아들을 낳으려고 온갖 수단을 다 써보셨다고 했다. 예를 들면 아빠를 단백질을 많이 먹이고 본인은 채식위주로 드시는 식이요법과 한약과, 배란일 세는 것도 하셨단다.
그 노력을 다 하고서 다행히도 엄마는 이듬해 7월쯤 다시 임신이 됐고 구렁이 꿈을 꿨으며 1987년 4월 아들을 낳는다. 조부모는 곧장 아이를 보러 어디선가 지어 온 이름을 들고 오셨고 그렇게 장손이라고 불리는 남동생이 생겼다. 그 시절의 기억이 없다보니 나의 반응이 어땠을지 궁금하지만, 들리는 말로는 3살 아이답지 않게, 동생을 질투하거나 미워하기보다 엄마를 많이 도와 동생을 돌보는 착한 누나역할을 착실하게 했던 것 같다. 심부름도 잘하고 같이 잘 데리고 노는.
엄마는 여전히 대학교 다니는 막내 삼촌과 회사 다니는 둘째삼촌과 아빠의 뒤치다꺼리와 집안일과 아이 둘에 치여살았던 것 같다 동생이 태어나기 전 월세를 새로 이사를 했고 전처럼 육아를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엄마가 가끔 화를 내셨던 것 같다. 주중에는 거의 볼 수 없던 아빠는 가끔씩 우리를 다같이 데리고 공원에 가서 사진도 찍어주고 그랬던 것같다. 그러다 내가 5살이 되는 해, 우리집은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 갔고 그때서야 삼촌들도 독립했다. 물론 그냥은 아니었다. 그들이 독립하는데 아빠가 돈을 보태줬던 것 같고, 그게 엄마에게는 또 큰 스트레스였다는 말을 들은 것 같다.
나는 심하게 친탁을해서 아빠얼굴 그대로에 아빠 식성도 닮았고 작고 마른 데다 허리가 안좋은것까지 닮았다. 초등학교 1학년 신체검사표에 18kg 이라고 적혀있던것을 기억한다. 어릴 때 나는 항상 마르고 약한 아이였다. 밥 먹는 걸 너무나 어려워했다. 밥맛이 항상 없었던 것 같다. 엄마가 해주는 밥은 늘 건강했을지 몰라도 정말 맛은 없었다. 아니면 매웠던것같다. 아빠, 삼촌들 입맛이 매운 걸 좋아했다. 어릴적에 삼촌들이 나한테 매운걸 먹여서 세상 고통스러워 울었던 기억이 있는 것도 같은데 그게 진짜인지 모르겠다. 아무는 밥 먹는 시간은 늘 곤욕이었고 보다못한 엄마가 먹이기도 초등 저학년 때까지도 먹이기도 했다. 밥 안먹고 미적거리다 아빠한테 혼나서 울기도 몇 번 울었던 것 같다.
삼촌들은 날 예뻐했던것 같긴한데 여시(여우의 사투리)라고 불렀단다. 눈웃음을 그렇게 쳤다고. 그러고보니 내게는 몇개월 차이 안나는 사촌 여동생이 있다 1986년 2월쯤 태어나서 나랑 같은 시기에 초중고를 나왔고 늘 비교대상이 되었던 막내 고모의 딸. 집안 누구나가 어릴 때는 키와 몸무게 같은 걸 비교하다가 그게 외모가 되고, 상장이 되고, 학업이 되고, 학교가 되더라. 그 비교는 내 인생 전반에 잔잔히 깔린 최대의 스트레스였다. 어릴땐 그래도 잘 놀았는데... 늘 심심했던 명절에 그나마 같이 놀 수 있는 사촌은 그 애라서 명절 마지막날에 오는 사촌을 늘 기다렸다. 초등 때까지는 그래도 무던하게 놀았던 것 같은데.. 그 이후부터는 참어려워졌다. 급기야 그 사촌의 남동생이 대학생 때 온집안 식구들 앞에서 대놓고 우리 둘의 외모비교를 하면서 나를 노안이라 칭한 것은 십여년이 지나도 나에게 외모 컴플렉스, 혹은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각설하고, 5살 이후 나와 동생은 같이 잤고 엄마는 우리를 책을 읽어주며 재워주고선 안방에 돌아가서 주무셨다. 우리 둘은 꼭붙어 잤던것같다. 가끔 너무 엄마랑 자고싶으면 한밤중에 엄마를 찾아가기도 했다. 그럼 같이 자기도 했던것 같다.
5살부터 나는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공부욕심이 많던 엄마는 나를 멀리 떨어진 사립유치원에 보냈다. 그 시기유행이었는듯 아파트에 사는 다른 아이들과 같이 커다란 버스를 타고 한참 달려 유치원에 갔다 가면서 늘 창밖을 봤고 6살 무렵에는 아침마다 간판을 읽으며 유치원에 갔던 기억이 난다.
5살때 여름 유치원에서 수영을 배웠다. 유치원에는 상당히 넓은 수영장이 있었는데 (광장동 어린이회관) 휴식시간이었나 그때 실수로 깊은 물에 들어갔다. 처음엔 크게 깊지 않았는데 한발한발 디딜수록 조금씩 깊어지더니 어느순간 발이 닿지않았고 놀라서 허우적대니 더욱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때의 공포감과 끔찍함 숨이막혀오는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다. 위로 보이는 물은 파랗지만 캄캄했고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 깊은 물에 들어가 있었다. 그 찰나에 누군가 나를 쑤욱 물밖으로 끌어내어 어깨인지 팔인지에 앉혀주었고 나는 정신없이 기침을 해댔다. 한참을 그러고나서야 남자선생님을 알아
봤다. 물은 그사람의 허리춤까지 왔던것같다. 그 후 겨울에 스케이트를 배울 때는 엄마도 동생을 데리고 오셨던것 같다.
그리고 동생은 6살에 유치원을 간다. 내가 가고싶던 과학반으로. 내가 다니던 유치원에는 여러 가지 반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내가 다닌 반은 체능반으로 체육활동을 중점적으로 하는 반이었다. 건강해지길 바라셨나 보다. 그렇지만 내가 늘 다니고 싶던 반은 과학반이었다. 과학반 천장에 알록달록 붙어있던 천체 모형들을 기억한다. 그 반이 훨씬 재미있어 보였고 다니고 싶었는데, 나는 안보내 주고 동생은 보내셨다. 이 비슷한 일이 초등 학교 때도 있었다. 나는 늘 태권도를 다니고 싶었는데, 피아노, 미술만 시키고, 동생은 태권도를 보냈다. 나는 너무 가고 싶어서 동생 태권도장에 따라갔던 기억도 있다.
7살때 얼추 한글을 혼자 읽자 유치원을 안보내고 동생을 유치원에 보냈다. 원래 엄마는 날 1년 일찍 학교에 보내고 싶어했으나, 애가 7살이 되어도 몸이 비실비실하고 작아서 피아노 학원만 보냈던것같다. 좀 엄격한 선생님께 1대1로 피아노를 배웠다. 그때 학원도 혼자다녔던 것 같다. 집에서 학습지도 했던것 같고.. 아이템풀 쿠폰 모으던 게 생각난다.
그리고 8살때 학교에 갔고, 잘 다녔다. 아마 가을 운동회에 단상에서 신랑각시 춤이었나 대표로 췄고 학교에 남아서 연습했던것도 기억난다. 그 때 만난 친구랑 2학년까지 잘 친하게 지내다 3학년때 내가 이사가서 편지를 주고받았다
8살 9살 때는 아빠가 무서웠다. 내가 5,6,7세 때 살던 집을 팔고 전세로 그 옆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 이유는 내가 7살 말쯤 아빠가 지인에게 부동산 사기를 당했고 아파트 판 돈 몇 천 만원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넓은 평수 아파트로 옮기려고했으나 하루아침에 사기를 당해 돈이 없어 전세를 살게 된 것 같다. 그래서였을까. 학교에서 필통을 잃어버린 벌로 아빠한테 방에 갖혀서 맞았다.
처음엔 회초리로 맞다 너무 아파서 울며 빌었는데도 여기저기 맞았다. 아빠가 화를 내며 뭐라고 소리친것 같은데 뭐라고 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너무 아프고 무서웠고, 아무것도 잘 들리지 않았다. 그날 아마 절망과 무기력을 배운 것 같다. 어떻게 애걸해도 매를 피할수가 없었다. 그 사건은 상당히 오래 남아 20대 후반까지 감정이 남아있었다. 여러 번의 상담 후에야 용서도 이해도 된 것 같다. 그 이전 이후에는 동생을 방에서 문 잠그고 때린 적도 있었다. 아빠의 화난 목소리와 동생이 막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데 나와 엄마가 울면서 문을 두드리고 그만하라 소리쳐도 소용이 없었다. 동생도 한 두어번 그런 일이 있었다. 7살 아이였는데 뭘 그리 잘못했을까.
내 기억에 엄마 아빠도 잘 싸웠다. 자주 언성이 높아졌다. 그러다 엄마도 아빠한테 한번 맞은 적이 있었다. 10살 때 였나... 뭔가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안방에서 들렸는데 아빠는 소리지르고 엄마는 비명을 질렀다. 나와 동생은 동생 방에서 오들오들 떨고 울면서 엄마아빠 말 잘 듣자고 약속했다. 그러고 아빠는 잠시 집을 나갔고 엄마는 화장대 앞에서 앉아 울었다. 그러면서 내게 넌 엄마처럼 살지 말라고 결혼하지 말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울면서 말하던 그 목소리가 생생하다
아무튼 그 이후엔 엄마가 아빠에게 회사로 전화해서 또 그러면 이혼한다해서 안하게 된 것 같다. 그 이후에 아빠는 우리에게 좀 냉담해지시고 일에 바빠 거의 얼굴을 못봤다.
어린 시절 내 7,8,9,10살 즈음, 이때 나는 동생과 집에서 인형 로봇을 조합한 역할극 놀이를 했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만들어가며 했던 듯 한데 재미있는 날도 있고, 없는 날도 있었다. 레고로 이것저것 만들고 놀기도 했는데, 나는 주로 집을 만들었던것 같다. 레고인형을 갖고도 역할놀이를 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호기심도 많고 좋아하는 것도 많았다. 순종적인 기질인건지 그리 강화된건지 눈치보고 그렇게 방어기제를 써서 행동양식이 그렇게 굳은건지는 모르겠다. 보내는 학원에는 다 다녔고 부모님이 하라는대로 한 것 같다. 지금도 엄마가 기억하는 어린 나는 말 잘 듣는 딸, 순종적인 딸이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나에게 작은 고모와 시어머니와의 갈등을 자주 나에게 이야기하던, 그래도 순종적인 엄마다. 그렇다. 나는 어릴 때 엄마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감정쓰레기통 역할?을 꽤 오랬동안 해 왔던 것 같다. 중, 고등학교 떄가지도.
어릴 때 엄마가 그랬다 아빠는 무조건 돈쓰는거 싫어하니까 말하지 말고 숨기라고 학교다닐 때 필요한 학용품?은 안 그랬나 싶긴 한데... 내가 갖고 싶은 인형이나 장난감을 하는 수 없이 사주면서 항상 그 말을 들었던 것 같다. 이것이 더 아빠를 무서워하게 만든 것 같다. 아니 실제로도 내가 어릴 때 아빠는 무서웠다. 내가 밥을 잘 못먹어도 화를 냈고, 동생이 편식을 해도 화를냈고, 내 물건 못챙겨도 화냈고, 아빠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친척들도 큰아빠가 제일 무섭다고 그랬다.
근데 생각해보니 남편과 아빠를 좀 겹쳐보고있던거 아닐까 남편을 제대로 알아보려 하지 않고 무조건 비합리적이고 이상하고 무서운 사람이라 생각했던거 아닐까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엄마도 그러면 안되는거였다 아빠에게 필요한거는 필요하다고 말하거나 내가라도 아빠에게 이게 갖고싶다고 말할 수 있었어야 하는거..근데 그 당시엔 어쩔수 없었나 싶기도 한게 엄마는 전업주부였고 아빠 외벌이에 형편이 크거좋지 않았고 아빠는 확실히 낭비는 싫어했던것같다 무서웠고
그렇지만 내 인생 가장 중요한 기억이라면 역시 피아노 사건이다 그때 친구가 기타를 좋아하고 잘 치던 애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그렇게 부러울수가 없었다 그래서였나 어째서였나 아님 다른 이유가 있었나 나는 5살때 시작해서 초등4학년때 피아노 그만두었는데 어느날 내가 방에서 엉엉 울고있었는데
내 피아노가 없었다 고모가 치던 30년 넘은 피아노를 할머니댁에서 가져와서 중학교때까지 쳤다 귀가 좋아서 청음이 되었다 듣고 피아노로 멜로디를 칠 수있고 반주도얼추했다 고등학교 들어가면서 그 피아노도 너무 오랫됐고 나도 입시해야한대서 다 분해해서 버렸다 엄청크고 무거운 피아노였다
그걸 버리고나서도 학교 강당에서 방과후에 치곤 했다
버릴때 아쉬워서 몇가지 부품과 열쇠를 챙겨뒀었다 피아노열쇠는 지금도 갖고있다...
어느날 대학생때였나 집에서 방에서 엉엉 울었다 뭐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부모님이 당황하셔서 왜우냐고 해서 둘러댄말이 자기 기타치는 친구가 부럽다는 말이었는데 그게 너무 내가 생각해도 진짜 같았다 다른 이유가있었던것같긴한데 근데 아빠가 그날 백화점에 나 데려가시더니 피아노를 골라보라고 하셔서 이것저것 쳐보았다. 혼란스러웠다. 진짜? 진짜? 정말 사주는 거야? 하다가 업라이트중 야마하의 체리목 피아노가 유난히 소리가 좋은 것 같아서 이게 좋다했다. 그랬더니 그자리에서 400만원짜리 피아노를 사주셨다. 그것이 2005년 즈음.
진짜 그 피아노 소리 좋았는데 아빠가 사주셔서 엄청 놀랐다. 그 이후로 결혼하고 피아노를 집에 가져오고 지금도 절대 못버린다.아빠의 애정이라는 것이 형태가 있다면 피아노일 것이다.
(나중에 더 수정할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