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아 Apr 04. 2024

천장에서 비가 내리는 집

자고로 비는 창 밖에서 내릴 때 낭만 있는 법

2023년 6월 27일 화요일 일기

요즘 안 좋은 일이 많이 생겨 마음이 어렵다. 오빠랑 둘이라 버티고 있는 것 같다. 얼른 이 시기가 지나고 다 추억이 되었으면 좋겠다.




출근하기 위해 샤워를 하고 나왔는데 부엌 식탁 위에 물이 흥건했다. 누가 물을 쏟았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행주로 물을 쓱 닦아내고 출근 준비를 마저 했다. 신발을 신으러 현관으로 향하는데 식탁 위에 물이 또 고여 있었다.


물의 출처는 바로 식탁 위 전등. 불이 켜져 있는 전등을 타고 물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람… 알고 보니 윗집에서 싱크대 물을 잠그지 않아 물이 바닥으로 흘러넘친 것이었다. 내가 윗집에 방문했을 땐 윗집 분도 물로 흥건한 바닥을 닦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분도 우리와 같은 세입자인지라 집주인에게 상황을 전달했고, 윗집 주인은 일단 물을 닦고 상황을 지켜보자고 했다. 


그때만 해도 몰랐다. 우리가 6개월간 끔찍한 누수에 시달리게 될 줄은...


누수의 시작


본격적으로 문제가 발생한 건 그로부터 일주일 후였다. 누수의 시작이었던 식탁 위뿐만 아니라 냉장고 앞 천장에서도 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누수의 정도가 약했기에 빈 홈런볼 플라스틱 통과 컵라면 용기로 떨어지는 물을 받았다. 윗집 주인은 고였던 물이 떨어지는 것일 수도 있으니 물을 닦고 마를 때까지 기다려보자고 했다. 하지만 물방울은 우리의 속도 모른 채 밤낮 열심히도 떨어졌다. 누수의 범위는 점점 넓어졌고 결국 10평대의 코딱지만 한 집 천장 세 곳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윗집 주인은 사람을 불러 누수의 흔적을 찾겠다고 했다. 우린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기다렸다. 나중에서야 알게 됐지만 윗집 주인이 부른 건 누수 탐지 전문가가 아닌 그냥 아는 사람. 그분은 누수의 원인을 찾지 못한 채 윗집 화장실 바닥을 뚫고 방수처리를 했다. 공사는 끝났지만 비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빗줄기가 더 거세진 듯했다. 당분간은 천장에 고인 물이 떨어질 수 있으니 한 달만 기다려보자고 했다. 그렇게 똑똑- 빗소리와 함께 시간은 흘러만 갔다.


이쯤 하고 문제가 해결됐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인생은 자신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침실에마저 장대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컵라면 그릇으로는 더 이상 감당이 안돼 마라탕 그릇을 사용했다. 침대와 책장 위에도 물이 샐까 걱정돼 집에 있던 온갖 천과 수건을 꺼내와 침대와 책장을 덮었다.


침실 천장은 슬슬 우리에게 물폭탄을 던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윗집 주인에게 새로운 업체를 불러 달라고 하자 일단 벽지를 칼로 잘라내 물을 빼보라고 했다. 네? 저희 가요?... 사람을 기다리고 싶었지만 볼록 튀어나온 천장을 보니 달리 방도가 없어 보였다. 칼로 벽지를 잘라내자 벽지에 물이 고인 것이 아니라 천장 합판 자체에 물이 고여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곧 떨어지려 한다는,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됐다. 합판을 칼로 뚫자 이럴 수가… 냄새나는 물폭탄이 쏟아졌다. 짝꿍은 그 물폭탄의 희생양이 되었다. 윗집 주인은 멈출 기미가 없어 보인다는 우리의 말에도 물이 마를 때까지 몇 주만 더 기다려보자고 했다. 그렇게 천장 합판이 훤히 드러난 폐허 같은 집에서 우린 또 기다려야 했다.


이 비가 마른다고요?...


자려고 거실에 누웠던 어느 날, 고요한 밤의 정적을 뚫고 들려오는 빗소리 ASMR에 헛웃음이 났다. 언제 경매에 넘어갈지 모르는 깡통 전셋집이라는 타이틀도 모자라 천장에서 비가 내리는 집이라니. 집이라는 공간에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당장 어디로든 떠나고 싶었다. 마라탕 그릇을 커다란 플라스틱 박스 두 개로 바꾸고 집에 있는 모든 걸레를 꺼내와 깔았다. 만반의 조치 후 그날 새벽, 우리는 계획도 없이 강원도로 떠났다.


4박 5일, 박스에 물이 차오르는 속도를 감안해 세운 최대의 일정이었다. 새로운 곳에서 물이 또 새기 시작하면 어쩌지? 불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그래도 잠시나마 집에서 해방되니 행복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한 법. 집으로 돌아오니 물바다가 된 침실이 우리를 맞이했다. 정말로... 새로운 곳에서 누수가 발생한 것이다. 침실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던 물건들이 물에 잠겨있었다. 캐리어도 풀지 못한 채 우린 잠시 서서 실성한 듯 웃었다

하하하하...


윗집 주인은 돈을 들이지 않고 어떻게든 이 문제가 해결되었으면 했겠지만, 우리도 참을 만큼 참았다. 우린 당장의 해결을 원했다. 그날 밤 윗집 주인에게 전화해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으니 우리가 직접 누수 업체를 부르겠다고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해결을 더 지체하시면 물건에 대한 배상까지 청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제야 윗집 주인은 '일주일 후' '진짜' 누수 업체를 불렀다. 누수 업체 봉고차에 적혀있던 '누수의 신'이라는 문구를 보자 안심이 됐다. '누수의 신이시여, 제발 저희를 누수의 늪에서 구원해 주시옵소서!' 절로 기도가 나왔다. 그날 누수의 신께서 가여운 우리의 기도를 들으셨는지 빗방울은 점차 잦아들기 시작했다. 


우리를 괴롭히던 비는 멈췄지만 폐허가 되어버린 집에 새로 도배를 하기까지 정말이지 피로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집주인은 누수 상황을 알렸음에도 끝까지 잠수를 탔다. 윗집 주인은 걱정 말라며 다 해결해 주겠다는 말로 우릴 안심시켰지만 돈을 아끼기 위해 전문가 대신 지인을 불러 일을 더 크게 만들고 매번 기다려보자는 말과 함께 우리를 고통 속에 방치했다. 누구도 고통의 당사자가 아니었기에 해결을 미루고 미뤘다. 세입자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다리는 것뿐이라는 현실이 슬펐다.




회사-집-회사-집의 반복인 평범한 직장인 부부에게 '전세사기 + 누수'라는 집 문제 2단 콤보는 삶을 너덜너덜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나머지 절반인 회사생활이라도 즐거웠으면 좋았으련만. 안타깝게도 회사에는 번아웃이라는 무서운 녀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ps. 혹 집에 누수가 발생하거든 처음부터 '누수 전문 업체'를 부를 것을 추천한다. 물이 잠시 멈추더라도 꼭 전문가를 불러 점검하시길.

이전 02화 결혼 1년 차, 신혼집 전세사기를 당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