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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기억한다

기억 속에 아버지를 찾아서 몇 자 적어 봅니다..

by 행복가진
"네가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니?"라는 질문을 들을 때마다
난 주저 없이 "나의 아버지와 엄마"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어느 해 여름 남해로 갑자기 떠난 날..

우리 가족은 남겨진 사진이 거의 없다.

오래전 홍수로 가족의 대부분의 추억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간직한 이 사진은 성인이 되고 가족이 함께한 유일한 남해 여행에서 찍은 것이다.

그마저도 아버지의 뒷모습만 남아 있다. 마치, 아버지를 그렇게 기억하라는 듯이.


아버지는 몹쓸 병에 걸려 6개월 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시다 떠나셨다.

그 병이 아버지의 잘못된 습관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보다도 가족을 힘들게 했던 주변의 스트레스가 더 큰 원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술을 하지 않으려 한다.

다른 사람을 쉽게 믿지도 않으려 한다.


아버지를 닮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날카로움에 쉽게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나만의 보호막을 만들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거울을 볼 때마다 문득 내 안에서 아버지를 발견하곤 한다.

아니, 내가 기억하고 싶은 아버지의 모습을 따라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에게 감사해야 할 기억들이 있다.


집안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나는 대학 4학년이 되었다. 학비를 어렵게 마련해 주셨는데, 그때 중국으로 교환학생을 갈 기회가 생겼다. 하지만 140만 원이 필요했다. 망설이던 나에게 아버지는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걱정하지 말고 준비해."


며칠 후, 통장에 입금이 되었고 아버지의 전화가 걸려왔다.


"네가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해. 아들 너를 믿는다."


그러나 철없던 나는, 고맙다는 말 대신 그저 기뻐하기만 했던 25살짜리 어린애였다.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의 내 뒤통수를 몇 대 후려갈기고 싶다.


2007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2008년,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부를 이어갔다.

40만 원으로 방세와 한 달 식비를 해결해야 했던 시절.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걷던 어느 날, 밤 11시쯤 걸려온 전화.


약주가 섞인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아들, 힘들지? 꼭 공무원이 아니어도 되니까,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라. 돈 좀 넣었다. 아들, 사랑한다."


서른이 넘어서야 처음으로 아버지와 나 사이에 '사랑한다'는 말이 오갔다.


"아빠, 저도 사랑해요."


전화를 끊고 돌아오는 길, 얼마나 울었는지 아직도 기억한다.


2008년 마지막 공무원 시험을 치르고, 고향집에서 쉬고 있던 날.

필기시험에 합격하고 면접 결과를 기다리던 중, 엄마와 아버지 앞에서 전화를 걸었다.

"합격이래요."

그 순간, 아버지는 두 팔을 번쩍 들고 외쳤다.


"만세!"


그리고 나를 꼭 안아주셨다.


"고생했어."


그로부터 몇 년 뒤, 아버지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 병원과 집을 오가며 휴식과 치료를 병행하던 어느 날,

아버지가 나를 부르셨다.


"아들,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네가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해."

공무원 생활이 힘들어하는 나를 보고 하신 말씀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아버지는 병원에서 우리 곁을 떠나셨다.


지금도 문득 아버지를 떠올린다. 뒷모습만 남은 사진 속 그 순간처럼.


아버지가 내게 남긴 말들, 남긴 마음들, 그리고 사랑.


나는 오늘도 아버지를 기억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언젠가, 나도 누군가에게 같은 사랑을 남길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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