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기 05 : 이탈리아 베네치아
시원한 생맥주를 한 잔 마실 때마다 떠오르는 도시가 있다. 그 도시는 유난히 빛이 물 위에 오래 머물렀다.
여러 매체를 통해서만 접했던 베네치아는 상상보다 훨씬 더 크고 깊었다. 좁은 골목을 따라 늘어선 집들과, 수로 위를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곤돌라는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새로운 풍경이었다. 작은 물길마다 다리가 놓여 있었고 그 아래로는 곤돌라들이 관광객을 태우거나 짐을 나르고 있었다. 넓은 운하는 큰 다리로 이어졌고, 다른 큰길은 배를 타고 건너야 했다.
우리가 도착한 1월의 베네치아는 며칠째 이어진 비로 물에 잠긴 상태였다. 산마르코 광장에는 사람들이 걸을 수 있도록 임시로 만든 판잣길이 여전히 놓여 있었다. 물 위를 걷는 느낌은, 어쩐지 꿈을 밟는 기분과 닮아 있었다.
야간열차를 타고 도착한 우리는 숙소에 짐을 맡기기 위해 이동했다. 한국인 할머니가 운영하는 한인 민박은 20유로의 저렴한 가격에 최근 문을 연 곳이었다. 깔끔한 시설에다 한식까지 제공되는, 지친 대학생 여행자에게는 기적 같은 숙소였다.
그 시절, 한국에서 맥런치 상하이 치킨 버거 세트가 3,000원이었지만 유럽의 햄버거 세트는 15,000원이 넘었다. 높은 물가 탓에 햄버거 하나도 사 먹기도 겁이 났다. 그래서 우리는 매 끼니를 숙소의 저녁 한식으로 해결했다.
베네치아 한인 민박의 저녁은 할머니의 넉넉한 인심 그대로였다. 제육볶음과 김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반찬이었다. 그날은 평소보다 더 많이 먹었다. 식탁에는 우리 외에도 여행 중인 모녀와 현지 가이드로 일하는 아들이 함께 앉아 있었다. 30대 남매와 어머니, 그리고 우리. 각자의 여행담이 오갔고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어머니는 우리의 엉뚱한 에피소드에 소리 내어 웃으셨다. 그 웃음 속엔 낯선 타국에서도 변치 않는 '집의 온기'가 있었다.
저녁을 마치자 형이 말했다.
"형이 한잔 살게, 같이 맥주 마시러 갈래?"
돈을 아끼며 여행하던 우리의 사정을 들은 형은 작은 바에서 맥주를 사주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골목 끝의 조그만 바에 들어섰다. 벽 한쪽에는 슬롯머신이 있었고, 몇몇 현지인들이 잔을 부딪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형, 누나, 그리고 우리. 긴 나무 테이블에 앉아 잔을 들었다. 맥주잔이 두 번, 세 번 비워질 때쯤, 우리는 어느새 세상에서 제일 즐거운 사람들처럼 웃고 있었다. 그때의 웃음은 여행의 끝이 아니라, 낯선 도시가 선물한 짧은 행복의 정점이었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며 바깥으로 나왔다. 돌아오는 길에,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주황빛 조명이 유리창에 반사되어 실내를 비추고, 그 안의 친구들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처럼 웃고 있었다. 그 장면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서 여전히 빛난다.
오늘, 내 앞의 시원한 캔맥주를 마시며 그때의 빛나던 조명과 베네치아의 밤을 다시 떠올린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했다. 힘들었던 시간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젊은 날의 무모함이 지금의 나를 단단하게 했다. 이제 나는 때때로 그 시절을 꺼내어 되새긴다. 무모했던 그 시절이 그립고, 함께 웃던 친구들이 보고 싶어진다. 나는 오늘도 캔맥주를 안주 삼아 그날의 기억을 곱씹는다. 여행의 추억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 최고의 안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