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기 04 : 영국 런던
6일간의 프로젝트를 마치자, 우리는 지치 대로 지쳐있었다. 몸은 무겁고 눈은 반쯤 감긴 채였지만, 런던에서의 마지막 밤을 그냥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위키드(Wicked)' 뮤지컬을 예약했다.
저녁을 먹고 숙소 근처의 극장으로 향했다. 무대는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화려함을 뽐냈다. 하지만 공연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모두 고개를 떨구었다. 비싼 티켓값보다 달콤한 잠의 유혹이 더 컸다. 졸고 있는 우리를 본 주변 관객들이 킥킥 웃었고, 그 웃음이 어쩐지 따뜻하게 느껴졌다. 뮤지컬이 끝나자 우리는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드디어 끝났다." 런던의 밤공기가 그제야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영국에서의 일정을 마친 우리는 예정대로 독일로 이동했다. 경비를 아끼기 위해 비행기 대신 야간열차를 타기로 했다. 런던에서 유로스타를 타고 파리로, 그리고 다시 뮌헨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밤새 흔들리는 열차 안에서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벽 무렵, 뮌헨 역에 도착했을 때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찬 공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역 근처 빵집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으며, 이게 여행인지 생존인지 잠시 헷갈렸다.
짐을 라커에 맡기고 미술관을 둘러본 뒤, 근처 펍에서 1,000cc 맥주와 소시지를 먹었다. 하지만 런던에서처럼 웃음이 터지지 않았다. 흥분은 식고, 남은 건 피로뿐이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또 한 번의 더 야간열차를 타야 했다. 이틀 동안 네 개의 나라를 이동하는 일정이었다. 처음 계획할 때 젊음이면 뭐든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막상 현실이 되니 '여행' 보다 '노동'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렸다.
체력이 바닥나자 예민함이 고개를 들었다. 서로의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졌고, 결국 대화가 끊겼다.
“B가 스케줄을 너무 빡빡하게 짠 것 같아."
“맞아요. 너무 힘들어요.”
피로는 사람의 인내심을 갉아먹는다. 결국 우리 네 명은 2 대 2로 갈라졌다. 같은 길을 걷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침묵의 여행이었다.
그날 밤, 낯선 골목을 걷던 중 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현지 남자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눈을 찢느 시늉을 하며 소리쳤다.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야, 뭐래?"
우리는 본능적으로 한국어로 욕을 내뱉었다. 그들이 당황한 듯 물러섰고, 우리는 서로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겁도 났지만, 이상하게 웃음이 먼저 나왔다. 그 웃음이 긴 침묵을 깨뜨렸다.
"우리 좀 웃기지 않냐?"
"진짜 무섭긴 했는데, 그래도 통쾌하다."
웃음은 곧 화해가 되었다.
그 순간, 싸웠던 이유가 전부 사소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다시 한 팀이 되어 맥주를 마셨다. 몸은 여전히 피곤했지만 마음은 조금 가벼웠다. 우리는 일주일간의 여행을 돌아보며 서로의 잘못을 웃으며 떠넘겼다.
"다음엔 좀 쉬엄쉬엄 가자."
"그래도 이래야 기억에 남아."
그날의 웃음은 화해이자 약속이었다. 피로와 다툼, 그리고 웃음이 뒤섞인 시간. 그건 청춘의 여행 그 자체였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가끔 그때의 이야기를 꺼낸다.
"기차에서 졸던 거 기억나?"
"야, 그때 진짜 싸웠잖아."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느새 웃음이 번진다. 그 시절의 우리를 떠올리면 지금의 피로조차 잠시 사라진다. 그리고 나는 그때의 친구들과 여전히 여행을 간다. 변한 건 나이뿐이다. 세상은 여전하고, 우리는 여전히 그 길 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