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기 06 : 이탈리아 로마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는 3년 간의 긴 여행을 담은 수필집이다. 여행이라기보다는 삶을 옮겨 놓은 시간에 가깝다. 그가 묘사한 유럽의 풍경과 반복되는 일상 속의 세밀한 감정들은 내게 여행을 '삶의 형태'로 바라보게 만든 첫 책이었다.
하루키는 어느 날, 일상 속에서 자신이 서서히 자신이 소모되어 가는 느낌을 받는다. 결국 연재를 모두 정리하고, 아내와 함께 유럽으로 떠난다. 로마, 시칠리아, 산토리니에서 그는 찿선 집을 구하고, 장을 보고 요리를 하며 조금씩 '다른 삶'을 만들어 간다. 그 3년의 시간 끝에 '먼 북소리'가 태어났다.
그의 글엔 특별한 사건이 없다. 그저 사람들과의 대화, 식탁의 소리, 매일의 달리기가 전부다. 그런데도 그 문장들은 이상하리만큼 나를 사로잡았다. 그의 리듬은 멀리서 울리는 북소리처럼 마음 깊은 곳을 흔들었다.
하루키는 매일 달렸다. 그의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로마의 새벽 공기와 돌바닥의 질감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나는 '먼 북소리'를 여러 번 읽었고, 책 속의 도시들을 머릿속으로 그리곤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은 단연 로마였다.
여행을 하며 만난 사람들은 항상 말했다.
"로마에서는 조심해야 해요."
소매치기, 바가지, 더러운 거리.. 경계의 말들로 가득한 도시. 그래서 베네치아에서 로마로 향하던 길, 내 마음속의 설렘은 약간의 두려움과 함께 흔들리고 있었다.
로마 테르미니 역에 도착하자, 사람들의 말이 떠올랐다. 거리는 지저분했고, 건물마다 낙서가 가득했다. 하지만 해 질 무렵 마주한 하늘은 달랐다. 붉은 노을이 도시를 덮고, 건물 벽에 반사된 빛은 거리를 노랗게 물들였다. 오래되고 낡았지만, 그 속에 깃든 시간의 색은 황홀할 만큼 아름다웠다. 로마는 노란색이었다.
예약해둔 민박집은 30대 한국인 여성이 운영하고 있었다. 그녀는 회사를 그만두고 세계여행을 하던 중 이 도시에 마음을 빼앗겨 정착했다고 했다. 매일 저녁 그녀가 차려주는 따뜻한 한식은 긴 여행 속 가장 위로가 되는 한 끼였다. 4박의 일정을 마치고 떠나는 날, 그녀는 역까지 배웅을 나와 다음 숙소에서 마시라며 와인 두 병을 건넸다. 그 순간의 눈빛엔 낯선 도시에서 만난 이들의 다정함이 담겨 있었다.
누나와,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어울리며 낯설었던 로마는 금세 우리의 동네처럼 느껴졌다. 오래된 건물과 낡은 골목을 걷다 보면 '먼 북소리' 속 하루키가 되어 있었다. 그의 문장이 떠오르고, 내가 상상했던 로마와 눈앞의 풍경이 겹쳐졌다. 그 순간, 책 속의 문장이 현실이 되었다.
나는 하루키가 앉아 에스프레소를 마셨을 법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고, 그가 달렸을 낡은 도로를 걸었다. 그때 결심했다. '먼 북소리' 속 도시들을 모두 가보겠다고. 그렇게 또 하나의 목표가 생겼다. 우연히 집어든 한 권의 책이 내 삶의 방향을 바꿔놓았다. 그 책 속에서 울리던 북소리는, 지금도 내 안에서 잔잔히 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