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

태쿡 방콕 여행기 01

by 이지


'On the road'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


군시절 휴가를 나오면 기차를 타기 전 서점에 들렀다. 책이나 잡지를 사서 부대로 복귀하는 기차 안에서 읽곤 했다. 막연히 여행이 가고 싶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너는 제대하면 뭐 하고 싶어?"

선임들이 물으면 나는 무조건 배낭여행이라고 답했다.

"저는 배낭여행 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러닝도 하고 영어 공부도 하는 거지 말입니다."

부대에서 나는 여행 생각뿐이었다. 군생활 내내 나는 책으로 여행을 다녔다.


부대 복귀 전 잠시 들렀던 서점. 카오산 로드라는 큼지막한 글자가 박혀 있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이 책은 그 당시 꽤 신선한 충격이었다. 태국 방콕의 카오산 로드에 모여든 여행객들을 상대로 인터뷰를 담은 책이었다. 이 책을 읽고 나는 한동안 '여행'이라는 환상이 더 커지기 시작했다.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사람들 각자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나도 여행을 하며 인터뷰를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도 빠졌다.


카오산 로드의 매력에 빠져 몇 달을 그곳에서 머무는 여행자들. 당시 세계 공항의 허브 역할을 했던 방콕에서 경유를 위해 카오산 로드에 잠시 머무는 여행자들. 모두 각자의 사정으로 카오산 로드에 모여든 여행객들은 인종이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함께 어울리는 곳이었다.


홍콩 여행을 다녀오고 1년 후. 나는 A형, 친구 B, 막내와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목적지는 태국이었다. 카오산 로드는 나에게는 성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진심으로 바라던 태국으로 드디어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작은 캐리어 하나와 배낭을 챙겨 택시에서 내렸다. 카오산 로드의 끝자락에 내려 미리 예약한 숙소로 걸었다. 저녁시간의 카오산 로드는 휘향 찬란한 조명으로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자신보다 큰 배낭을 메고 있는 여행자부터 쪼리와 러닝을 입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여행객들까지 다양한 스타일의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모두 내가 책에서 보았던 대로 카오산 로드를 즐기고 있었다.


이곳은 앞서 다녀왔던 유럽, 홍콩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길거리에서 신나게 떠들며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은 고민이나 걱정 따위는 없는 듯 보였다. 우린 숙소에 짐을 풀지도 않고 그 틈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맥주 4잔 주세요." 맥주를 한 잔씩 들고 주변 분위기에 취해 카오산 로드를 온몸으로 느껴 보았다.


CAM01275.jpg 태국, 카오산 로드
CAM00238.jpg 태국, 카오산 로드


거리에 있는 술집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맥주를 마셨다. 카오산로드에 취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뒤에 있던 백발의 할아버지가 말을 걸었다.

"젊은 친구들 어디서 왔어요?"

"저희 한국에서 오늘 도착했어."

기분 좋게 취한 할아버지는 특유의 걸걸하고 낮은 목소리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할아버지는 이곳에서 오랜 시간 혼자 여행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비록 혼자지만 남은 삶을 즐기고 있었다.

"카오산 로드에 온 것을 환영해요. 인생을 즐겨요."

플라스틱 의자를 당겨 우리 테이블에 앉은 그와 짧은 영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맥주를 마셨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에 하얀 셔츠를 입고 있는 그는 천천히 웃으며 맥주잔을 기울였다. 그 웃음엔 무게보다 자유가 담겨 있는 듯했다. 그 처럼 우리도 인생을 즐기고 싶었다.


우린 카오산 로드에 머물며 이곳의 분위기에 취하고 있었다. 자유로운 분위기. 아무 걱정 없어 보이는 사람들. 천국이 있다면 바로 이곳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꽤 단순한 일과였지만 이곳의 여행객들처럼 나와 친구들은 카오산 로드에 동화되었다.


느지막이 일어나 씻고 길을 나서면 쨍쨍한 햇살 아래 레스토랑에는 여행객들이 늦은 아침을 먹고 있었다. 신문을 읽으며 샌드위치를 먹는 사람. 연인과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매일 아침 맞이하는 이 모습을 나는 사랑했다.


호텔 1층의 양복점. 카운터의 직원들. 그리고 호텔 앞 레스토랑의 풍경. 이 모든 것들이 나를 설레게 했다. 레스토랑을 지나 큰길로 나서면 밤과는 다른 새로운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아이와 함께 길을 걷는 여행객들. 여전히 자신보다 큰 배낭을 멘 배낭여행객들이 이곳에 감탄하고 있었다.


우린 매일 같은 레스토랑에서 팟타이 한 접시를 먹고 다시 길을 나섰다. 다른 여행객들처럼 어슬렁어슬렁 길을 걷다 발 마사지를 받고, 팔과 등에 헤나를 그려 넣었다.


그리고 여행사에서 투어를 예약하여 태국의 문화제나 코끼리를 보러 가거나, 수산 시장에서 쇼핑을 했다. 그리고 여행을 하며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쉽게 친구가 되었다. 어느새 함께 둘러앉아 밤늦도록 이야기하고 떠들어댔다. 일주일간이나 우리는 이곳에서 카오산 로드의 여행객다운 여행을 즐겼다.


낯설었던 이곳이 익숙해져 우리 집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카오산 로드 길에서 만난 사람들' 저자와 인터뷰를 한다면 나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 생각해 보았다.

"그냥 좋아요."

이 말을 대체할 수 없는 표현은 없었다.

공항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바라본 카오산 로드는 첫날 보았던 날과 똑같았다. 그냥 이곳이 좋았다. 이곳의 냄새, 분위기, 사람들의 미소, 친절한 사람들, 그리고 많은 여행자 이 모든 것들이 완벽했다.


힘든 날이면 그곳이 떠올랐다. 그리고 살며시 웃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이곳 카오산 로드에서 머물고 있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다.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지는 이곳이 바로 카오산 로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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