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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은 왜 보장되어야 하는가?'를 고민하자

by 삼중전공생

어떤 사람이 당신을 깜깜한 지하 감옥에 가둡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너를 풀어줘야 하는 합리적인 이유를 대서 나를 설득하면 풀어주마"


처음에는 무섭고 당황스럽지만 시간이 흐르면 곧 이 사태가 '부당'하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이 지하 감옥에 갇혀있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내가 이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까닭은 순전히 저 사람이 나보다 더 강하고 영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사람이 나를 지하 감옥에 계속 가둘 '권리'는 없지 않나요? 나는 자유롭게 돌아다닐 '권리'가 있는데 말입니다. 결국 나는 저 사람이 나의 '인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감옥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그 사람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당신이 나를 여기에 가두고 있는 것은 나의 인권을 부당하게 침해하는 거야. 그러니까 당신은 나를 여기서 풀어줘야 해"


하지만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첫째, 인권의 정의가 뭐지?

둘째, 너가 이 지하 감옥을 벗어날 인권이 있다는 건 누가 언제 어떻게 정한 거지?

셋째, 설령 너가 지하 감옥을 벗어날 인권이 있다고 한들 내가 왜 너의 인권을 보장해야 하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면, 당신은 평생을 지하 감옥에서 보내게 될 것입니다. 이 예시가 황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지하 감옥을 내가 살면서 겪을 수 있는 모든 부당한 손해라고 생각합시다. 그리고 나를 지하 감옥에 가둔 사람을 경찰, 학교, 기업 등 나에게 부당한 손해를 끼쳤지만 내가 당장 어떻게 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이라고 생각합시다.


가령 이런 식입니다. 체벌이 흔한 학교에서 선생이 학생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너를 체벌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대봐."


아니면 권위주의 국가의 경찰이 시민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너를 방패로 쳐서 제압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대봐."


이 상황은 우리가 지하 감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상황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가령 인권을 들먹여 선생에게 체벌을 하지 말라고 소리친들, 결국엔 다시 되돌아올 위 세 가지 추가 질문에 다시 대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지하 감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나 하나 따져봅시다.



첫째, 인권의 정의가 뭐지?


인권은 인간다운 삶을 살 권리입니다. 그리고 이 권리는 모든 인간에게,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인권은 양도할 수 없으며,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일단 나는 이렇게 인권을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너가 이 지하 감옥을 벗어날 인권이 있다는 건 누가 언제 어떻게 정한 거지?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그래서 '인간다운 삶'은 도대체 뭐냐는 겁니다. 며칠 동안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로 강제 노동에 내몰리고 있다면 그건 아마 인간다운 삶과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내 포르쉐 자동차 뒷바퀴에 들개가 소변을 봤다면, 그건 인간다운 삶과 거리가 어떤가요?


어떤 것이 인간다운 삶인지는 각 개인의 주관에 지나치게 많이 의존합니다. 그래서 굳이 따지자면, 내가 이 지하 감옥에서 벗어날 인권이 있다는 건 내가, 방금, 잠깐 생각해서 정한 것에 불과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권은 하늘이나 하나님이 줬다고 주장하지만, 그건 수사적 미사여구에 불과합니다. 그 말이 어떤 권리 주장을 얼마나 신성하고 멋져보이게 만드는 지와 별개로 본질은 황당무계한 순환논증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두번째 질문에서 이렇게 솔직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언제 어떻게 정했냐고요? 내가, 방금, 잠깐 생각해서 정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한 바를 시사합니다. 바로 '인간다운 삶'이란 원래부터 그 경계가 정해진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이 점을 짚고 마지막 세 번째 질문으로 넘어갑시다.



셋째, 설령 너가 지하 감옥을 벗어날 인권이 있다고 한들 내가 왜 너의 인권을 보장해야 하지?

영리한 사람이라면 사실 이 앞의 두 질문은 별로 두려울 것이 없었다는 점을 눈치챘을 것입니다. 인권의 정의가 모호하고, 어떤 권리가 인권에 해당하는 이유가 비루한 것일지라도, 상대방이 그 권리를 존중할 생각이 있다면 그만인 것입니다. 그럼 상대로부터 나의 권리 주장을 존중할 의지를 어떻게 만들어 줄 수 있을까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내가 상대방과 힘이 비슷하거나 더 센 것입니다.


그 힘이란 단순한 완력이 될 수도 있지만, 좀 더 점잖은 힘으로는 가령 다수결에서 과반수 이상의 표를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 힘이 나에게 있을 때는 상대방은 좋건 싫건 나의 권리 주장을 존중할 생각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상대방이 나보다 더 힘도 세고 영리해서 지하 감옥에 강제로 감금할 수 있는 경우는 어떨까요? 그런 경우의 방법은,


둘째, 내가 상대방보다 더 논리적으로 타당한 것입니다.


"너는 내가 계속 지하 감옥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대봐, 나는 내가 이 감옥에서 당장 나가야 하는 이유를 댈게, 서로 논리로 겨뤄보자. 그리고 누가 이겼는지 공정한 제3자에게 결과를 듣자. 너가 이기면 내가 계속 감옥에 있을게, 하지만 내가 이기면 당장 감옥 문을 열어줘야 해."


제3자가 충분히 힘이 세고, 현명하다면 더 그럴듯한 논리를 펴는 사람의 손을 들어줄 것입니다. 민주주의 체제가 좋은 까닭은 이 두 가지 방법을 한 가지로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나는 상대방보다 더 말을 논리적으로 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나를 지지해주게 되고, 따라서 나는 더 많은 다수의 표를 내 편으로 만들 수 있게 됩니다. 단순히 힘이 더 세다는 이유로 내 마음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기 때문에 타당한 논리로 남을 설득하는 일을 게을리 할 수 있는 권위주의 체제와의 차이점입니다.


결국 인권은 내가 남들에게 존중해달라고 요구하고 싶은 권리들의 뭉치에 불과합니다. 그 인권이 실제로 존중받는지, 그렇지 않는지는 내가 얼마나 타당한 논리로 사람들을 설득해서 그것을 존중하도록 만드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사회의 규칙이 과반수 이상 찬성으로 결정되는 다수결이라면, 나는 그런 방식으로 한 사회의 과반수만 설득하면 됩니다.


그럼 이렇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럼 사실상 '인권'이라는 말은 그냥 평범한 '권리'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지 않느냐?"


내가 전에 없던 새로운 권리를 인권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면, 혹은 이제까지 잘 보장되지 않던 죽은 권리를 새삼 인권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면, 그 경우에는, 맞습니다. 내가 특별히 더 소중하게 여기고 싶은 권리 뭉치가 있다면, 그걸 내가 마음대로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필수적인 권리라고 지정하고 '인권'이라고 별명을 지어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어떤 것을 인권이라고 부르고 싶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내 권리 주장을 실제로 존중하게 되는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이미 한 사회 내에서 '인권'이라고 인정받는 것들은 그런 방식으로 어떤 권리 뭉치가 인권이라는 별명을 붙이기에 적절하다고 사회 구성원 다수가 대체로 동의한 경우입니다. 내가 주장하고 싶은 권리가 아직까지 당연하게 보장되는 그런 권리는 아니라면, 나는 내가 이 권리를 인권이라고 부르고 싶을 지라도 당분간은 나혼자만의 별명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많은 인권운동가들은 이런 이야기를 충격적으로 듣습니다. 그들에게 인권이란 당연하고 신성한 것이며 선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선한 편에서 정의의 노래를 부르고 있고, 이걸 반대하는 사람은 혐오 세력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없습니다. 인권은 본질적으로 이권입니다. 사람들이 내 이권이 세상에 널리 존중받을 만한 까닭이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인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고 실제로 존중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인권운동가를 만나서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인권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어.. 내가 밤 10시에 야식을 먹을 권리..? 그런 사소한 것들의 모임이죠"


이런 식이면 죽었다 깨어나도 발전이 없습니다. 인권 운동의 첫 출발점은 자신들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하고 그것을 지지하는 논리를 고민하며 개발해나가는 것이여야 합니다. 나에게 그럴듯한 논리가 아니라,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도 그럴듯한 논리 말입니다. 그런 과정이 있기 전에는 집회니 기자회견이니 백날 해도 인권 운동이 아니라 고상한 생떼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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