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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1등 당첨되고 절대 집 사면 안 되는 이유

예비 복권 당첨자라면 반드시 필독

by 삼중전공생

제발 집/차/건물만은 사지 말자


유튜브 알고리즘이 "복권 1등 당첨자 인터뷰"를 추천해 줘서 시청했는데 너무 안타까워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날벼락같은 거액의 당첨금에 집안이 풍비박산 나서 그렇냐고요? 아니요. 그 사람은 서울에 집도 한 채 있고 대학가에 원룸 빌라도 한 채 있어서 다달이 임대 수입도 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왜 그럴까요?


많은 사람들이 '복권 1등에 당첨되면 뭐 하지~'라는 생각을 한 번쯤하고 살아갑니다. 실제로 당첨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기 때문에 그 계획이란 통상 전혀 진지하지 않은 대단히 사소한 욕망들의 투영으로 얼룩져 있는데, 가령 아침에 한강 뷰가 보이는 집에서 깨어난다든지 남들이 부러워하는 외제차를 탄다든지 하는 것들이 그것입니다. 일반적으로는 당첨이 될 리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5천원으로 한 주 동안 망상하며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것대로 OK입니다.


문제는 8백만 분의 1의 확률을 뚫고 세후 평균 14억 당첨금의 당사자가 되었을 경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평소 해오던 전혀 체계적이지 않은, 재무관리학적으로 재앙에 가까운 발상들을 실현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당첨자의 대부분은 우선 "한국 사회에선 역시 부동산이지~"라는 생각으로 서울에 집을 사려고 알아보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제 가족이 그러고 있다면 저는 통장을 뺏어가겠습니다. 절대 그러지 마세요.


그렇게 집을 사면 안 되는 이유는, 집을 산다고 해서 월세를 안 내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엥? 내 집인데 누구한테 월세를 낸다는 말인가요? 경제학적으로는 자가 보유자는 자기 자신에게 월세를 낸다고 계산합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 봅시다. 어떤 사람이 원래 한 달에 100만원, 연간 1200만원을 월세로 내고 있었다고 칩시다. 그런데 복권이 당첨되어서 12억원짜리 아파트를 한 채 산 거죠. 그런데 아파트 건설업자가 "100년 동안 무이자 월부로 내쇼"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내 아파트에 살지만 건설업자한테 매달 100만원씩 지불하게 됩니다. 지불방식만 바꿨는데 100만원씩 매월 나가는 건 똑같은 셈인 것입니다.


심지어 상황은 더 안 좋습니다. 만일 12억을 예금으로 갖고 있고 매달 100만원씩 월세를 내고 있는 상황이라면 나머지 예금에서 이자도 매월 나올 뿐만 아니라 급전이 필요할 때 뽑아 쓰기도 편합니다. 그런데 아파트를 사면 유동성이 박살 나게 됩니다. 주택담보대출이 있긴 하지만 대출 금리를 생각하면 그건 월세 인상과 다를 바 없는 소식입니다. 자산 비중의 대부분을 부동산이 차지하는 건 현금 유동성 관점에서 볼 때 이런 이유로 재앙적인 자산 관리가 됩니다.


이 아파트 매입이 이득을 보는 장사가 되려면 아파트 가격이 장기적으로 올라야 합니다. 물가상승률 보다 당연히 더 많이 올라야겠죠. 그뿐만이 아닙니다. 가령 12억을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자산인 미국 초단기채(3개월 이하) ETF로 들고 있었다면 연 4%의 복리로 불어나 20년 뒤에는 26억이 됩니다. 지금 산 12억짜리 아파트 가격이 20년 뒤에 반드시 26억 이상(2.17배 이상)으로 뛰어야지만 적어도 손해는 보지 않는 장사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자신의 모든 자산을 미국 단기채로 들고 있는 바보는 없죠. 만일 S&P500의 50년 간 연평균수익률인 10%를 추종하는 포트폴리오를 구성한다면 지금 12억은 복리로 불어나 20년 뒤에 80억(6.7배)이 될 것입니다. 강남 아파트가 1999년부터 2019년까지 딱 3배 올랐으니 지금 12억으로 강남 아파트를 사지도 못 하겠지만, 설령 산다고 하더라도 이 가격 상승 추세가 앞으로도 이어진다고 가정하면 그건 결과적으로 기회비용에서 44억 가량 손해를 보는 셈인 것입니다.


차를 사면 안 되는 이유는 더욱 명백합니다. 차는 부동산처럼 투자 가치조차 없습니다. 계약하는 순간 감가가 시작되기 때문에 명목적인 자동차 가격뿐만 아니라 감가상각에 기회비용까지 고려해야 합니다. 복권에 당첨됐다고 2억짜리 외제차를 사는 건 단순히 2억만 지불한 게 아닙니다. 그 2억을 마찬가지로 복리로 굴렸다면 벌었을 기회비용까지 지불한 것입니다. 가령 5년 간 차를 탔다고 전제해도, 그 2억을 미 초단기채 ETF에만 넣어뒀더라면 연 4%의 복리로 불어나 벌었을 4300만원도 함께 지불한 셈이 됩니다.


건물을 사는 것도 현명한 선택은 아닙니다. 건물 매입 후에는 임차인 관리와 유지보수 등 일정한 고정비용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데, 단돈 12억으로 그 비용을 상쇄할 수 있는 수익이 반드시 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건물을 매입해야 합니다. 그것도 그냥 수익이 나기만 해서는 안 되죠. 채권 등 현금성 높은 금융자산으로 12억을 굴렸을 때보다 더 높은 수익이 나야지만 이익이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조물주 위에 건물주 있다"고 농담 삼아 말하는 건, 그들이 건물을 갖고 있을 만큼이나 자산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산 포트폴리오 중 일부가 부동산일 뿐일 것입니다. 갖고 있는 대부분의 자산이 건물 한 채에 묶여 있어 리스크 관리가 안 되는 소위 '빌딩-푸어'는 여기서 말하는 '건물주'와는 거리가 멉니다. 수백억 대의 자산가라면 안전 자산으로 상가 등 부동산 매입이 매력적일 수 있겠지만 고작 12억을 들고 건물주 노릇을 하는 건 어리석은 걸 떠나서 위험합니다. 쪼개서 사고팔 수가 없기에 주식으로 치면 사실상 한 종목에 전 재산을 올인한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업을 하는 건 그냥 언론에서 화제가 되는 "복권 1등 당첨되고 집안이 풍비박산 난 사례"가 되겠다는 겁니다. 이전에 창업 경험이 없고 경영 지식도 없는 사람이 복권 당첨금으로 사업을 하는 꼴을 비유하자면 하루 만에 키가 30cm 자란 어린이가 이제 성인용 수영장에서 수영하겠다고 물에 들어가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정 사업을 하고 싶다면 차라리 주식을 사는 게 낫습니다. 가령 요식업을 하고 싶다면, 그리고 자신이 백종원 보다 요식업을 성공시킬 자신이 없다면, 그냥 더본 주식을 사는 걸 추천합니다.


집/차/건물/사업, 이것들이 복권 1등 당첨자가 당첨금으로 했다고 주장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복권에 당첨되면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그나마 집을 빼면 하나같이 쪽박 차고 다시 평범했던 일상으로 되돌아가는 악수 밖에 없습니다. 한국인의 금융문맹률이 높다는 게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발 나무위키를 믿지 말자, 차라리 농협 직원을 믿자


나무위키에는 농협이 복권 1등 당첨금 수령자를 대상으로 공격적인 영업을 펼친다며 극히 경계하라는 조언들이 있습니다. 농협의 복권사업부 팀장은 당첨자의 재산을 강탈해 가려는 늑대들이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를 지켜내야 한다는 뉘앙스입니다. 이건 명백한 반지성주의적 선동입니다.


대부분의 복권 1등 당첨금 수령자들이 오롯이 예금으로 그 돈을 집에 들고 가면 한다는 게 뭐겠습니까? 앞서 말한 것처럼 집, 차, 건물 등을 사면서 재산을 불리기는커녕 탕진하는 것입니다. 아니 차라리 그렇게 부동산 등 투자 자산 매입으로 돈을 불릴 계획이라도 하면 다행입니다. 그보다 더 많은 당첨자들은 우선 쓰기부터 시작합니다. 당장 돈이 많으니 좀 펑펑 쓰고 다시 생각하자는 겁니다. 그건 이전의 월급쟁이로도 못 돌아가는, 인생을 망치는 최악의 선택입니다.


일단 소비가 커지게 되면, 그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는 건 훨씬 어렵습니다. 특히 소득이나 자산이 줄어들어 억지로 생활에 적응하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절제해서 돈 관리를 시작하는 건 아주 어렵습니다. 반드시 명심해야 하는 건 "선 관리, 후 소비"입니다. 그리고 그 관리를 도와줄 사람들이 바로 농협 직원들입니다. 물론 그 사람들도 금융 상품을 팔아야 하는 입장이긴 하지만, 복권 당첨금으로 제일 먼저 하겠다는 게 주택 구입인 금융 문맹이라면 차라리 그 상품 몇 개 좀 가입하고 제대로 된 자산관리 받는 게 낫습니다.


14억이라는 큰돈 앞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나는 아직 이런 돈을 관리할 역량이 없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아이 학원은 왜 보내고 상담을 받습니까? 학원 원장이야 돈을 벌어야 하니 아이가 학원을 다녀야 한다고 설득하겠지만,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아이 교육에 대해서 만큼은 학원 원장이 더 전문가 같으니 뭔가 얻을 게 있으리라 기대하고 상담을 받는 것 아닙니까?


자산 관리도 똑같은 겁니다. 내가 자산가였던 적이 없어서 자산 관리에 대해 잘 모른다면 전문가 상담을 받는 건 당연한 겁니다. 심지어 그 전문가가 금융 상품 판매에 혈안이 된 실적광이여도 유능하기만 하다면 학원 교사의 예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러니 무턱대고 자산관리 전문가를 비난하고 경계하라는 나무위키 문서 내용은 얼마나 편협하고 경제 관념 없는 바보가 쓴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여기까지 납득할 수 있다면, 개인적으로는 농협은행 복권사업팀에서 컨설팅을 받는 것보다 그 돈을 예금으로 들고 있으면서 TESAT, AFPK 등 경제 및 자산관리 유관 자격증을 취득하며 공부를 좀 한 뒤에 증권사 WM(Wealth Management)을 찾아가는 것을 권장합니다. 일반적으로 은행 PB들은 원금 보전 형식의 안정적인 자산관리를 지향하는데, 기왕 14억이 생긴 거 자기 자식까지 경제적 자유를 누리게 해주고 싶다면 좀 리스크를 지고 수십억으로 불릴 수 있는 상품도 갖고 있는 증권사가 낫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증권사 WM은 하루아침에 졸부가 된 금융문맹이 아니라 수십억에서 수천억 원대의 자산을 제 힘으로 불린 사람들을 상대하는 서비스이기 때문에 자신만의 투자 원칙과 자산관리 원칙이 없다면 흔들리기 쉽고, 소위 말해서 영업당하기도 쉽습니다. 그러니 10억 원대 자산가에게 맞는 인간적으로 최소한의 금융지식인 TESAT S급과 가능하다면 AFPK도 들고 가는 것이 나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집을 보러 다닐 때 여러 군데 들르는 것처럼, 증권사도 여러 군데 돌아다니며 거기서 짜주는 포트폴리오를 직접 비교하고 장단점을 분석해봐야 합니다. 처음 받는 서비스라고 분위기에 압도돼서 덜컥 온갖 싸인부터 다 해버리고 오면 곤란합니다. 증권사마다 강점과 구비된 상품의 디테일이 다 다르기 때문에 자신의 상황과 성향에 맞는 곳을 찾기 전까지는 신중해야 합니다. 가령 어떤 곳은 상속과 절세 설계에 강하고, 어떤 곳은 글로벌 금융 투자에 강하고, 어떤 곳은 복잡한 재무 관계를 파악하고 법률문제를 방어하는데 강합니다. 만일 담당자의 설명을 듣고 이런 분위기 파악이 아직 안 된다면, 좀 더 공부를 하고 다시 찾아오셔야 합니다.


그렇게 나의 상황에 딱 맞는 포트폴리오가 완성되고 자산배분도 끝났다면, 그제야 소비가 시작되는 겁니다. 착한 마음으로 하는 기부도 이 시점에서 하셔야 합니다. 제 앞가림도 안 되는데 남을 왜 돕나요. 그리고 아마도 증권사에서 짜준 포트폴리오대로 자산배분을 하고 나면, 꽤나 허무할 겁니다. 정상적인 증권사라면 14억 밖에 안 들고 온 사람한테 덜컥 서울에 집부터 사라고 추천하진 않을 테고, 나이가 어리다면 다소 공격적으로 투자하면서도 복리를 더 많이 걸 것이고, 나이가 많다면 자산을 현상유지하면서 월 배당 소득이 많이 들어오게 포트폴리오를 짜줄 텐데 후자라고 해도 그 월 현금 흐름이 생각보다 많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충 계산해서 14억 중 8억을 미국 채권 ETF에 넣는다고 쳐도 세금 떼고 나면 월 배당 소득은 250만원 수준입니다. 그 정도면 노후대비가 안 된 부부가 겨우 생활은 할 수 있게 되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고액 자산가의 세계에서 14억은 그만큼 작은 돈입니다. 여하간 그것도 감사한 사람들이 많고 그런 사람들이 복권을 사는 것일 테니 아무튼 좋은 일이겠지만, 이제는 14억이 갑자기 생겼다고 외제차부터 알아보는 게 얼마나 위험하고 바보 같은 일인지 좀 감이 오신다면 좋겠습니다. 8억에서 2억짜리 외제차 한 대만 사도 월 배당 소득이 190만원으로 가라앉으니까 말입니다. (거기다 차량 유지비까지 생각하면...)




나가며


제가 이런 글을 왜 쓰고 있는지 갑자기 현타가 옵니다. 제가 당첨된 것도 아니고, 남이야 14억을 공중에 뿌리든 똥을 닦는데 쓰든 제가 알 바가 아닌데 이렇게 안타까워해서 저한테 남는 게 대체 뭘까요. 그렇지만 저는 제 브런치가 수요가 극히 적은 공공재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복권을 자주 사는 사람은 아니지만 만약 저 대신에 당첨이 되신다면 위와 같이 체계적인 자산관리를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글을 쓰면서 동행복권 당첨자 인터뷰도 쭉 읽어보게 됐는데, 정말 하나 같이 집과 차를 사겠다 내지는 기부를 포함해서 여하간 소비 생활에 쓰겠다는 말 밖에 없어서 정말 참담했습니다. 복권 당첨은 인생에서 이례적인 이벤트이니 계획이 없을 수는 있다고 쳐도, 어째서 투자 계획은 온 데 간 데 없고 온통 소비 계획뿐일까요. 저는 14억이 생긴다면 당장 투자하고 싶은 곳이 한 트럭인데 말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황당한 당첨금 활용 계획을 말씀해 주신 한 당첨자 분께는 실례를 무릅쓰고 이 말 한마디를 올려보겠습니다.


"그 돈 그렇게 쓸 거면 나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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