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내 운동권의 문제점
소위 운동권이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운동권도 운동권 나름이지만 대체로 이미지는 좀 올드하고, 투쟁하기 좋아하고, 권위적인 부정적 이미지들이 연상됩니다. 그런 분들은 대체로 이미 오래전 대학가를 다 떠났지만, 소위 MZ 세대에게는 명멸하는 NL의 마지막 잔존 후손들 마저도 그런 이미지로 보이나 봅니다.
아무튼 현재 대학가에는 이런 신좌파든 구좌파든 운동권 학생들 말고는 거의 학생회가 무주공산인 셈이 되었습니다. 이런 운동권 마저도 지리멸렬한 학교는 학생회가 몇 년째 공석인 판국입니다. 소위 '비권'이라는 비-운동권 세력이 왕왕 학생회를 담당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그들도 거슬러 따지고 보면 NL이 아닐 뿐, 정당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대동소이합니다. 정의당이든 민주당이든 심지어 국민의힘이든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정치권과 연결된 학생회는 업무 능력을 차치하고 기본적으로 어느 쪽이든 정치적 편향성을 배제할 수가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제 글의 주된 소재인 운동권을 두고 이야기하자면, 가령 신좌파 운동권의 경우에는, 특히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그 극단적 배타주의는 같은 운동권들 내에서도 정말 말이 많습니다. 물론 '비-운동권'인 제 입장에서 보면 다들 대체로 도긴개긴입니다.
이 사람들은 항상 교내의 문제보다 교외의 문제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대학진학률이 80%나 되는 판국에 "대학생"이라는 신분상의 특성을 이유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투쟁하는 것도 학생회의 역할이라는게 그들의 주된 논지입니다. 그리고 그 외 부가 사업들을 "학생 복지 사업"이라는 명목으로 2차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세상을 바꾸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데 말이야, 좀 조용히 해주지 않을래? 옛다 기말고사 간식"
이렇게까지 생각하지야 않겠지만, 관심법을 좀 쓰자면 사실상 이런 태도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학생회의 본령
저는 학생회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역할은 학내 민주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학생회가 가장 중점적으로 달성해야 하는 과제는 "학교 본부와 소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의 의사를 자발적으로 존중하는 학교는 세상에 없습니다. 학생회가 협상을 하든, 회유를 하든, 협박을 하든 움직여야 학교 본부도 비로소 학생들 말을 조금씩 듣게 되는 겁니다.
학생회가 이런 교내 문제는 내팽겨치고 극렬 시위 단체들과 연대해서 여기저기 시끄럽게 만들고 다니면 학생들이 소위 운동권 학생회를 좋아 할래야 할 수가 없게 됩니다. 학생들이 아무리 취업 때문에 바빠졌다고 한들, 학교의 한심하고 어처구니 없는 행정 조치들에 분노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학생회는 그런 학생들의 의사를 잘 포집해서 정련하고 그걸 학교 본부에 관철시키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겁니다. 그게 학생회의 본령입니다.
때문에 학생회가 정치적으로 편향된 인사로만 구성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의 견해와 다른 의사를 가지고 있는 학우들의 목소리를 묵살해버리게 됩니다. 그건 대의 기구로서의 학생회의 본래 목적을 상실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학내 민주주의와도 너무나 거리가 먼 행태입니다.
학생회가 학내 민주주의 활성화라는 본 목적에 충실해지기 위해서는 학생들과의 직접 소통 창구를 늘려야만 합니다. 자기들끼리 밀실에서 사업을 진행하고 툭툭 인스타에나 가끔씩 올리는 건 제대로된 소통 방식이 아닙니다. 사업의 결과물이 다시 피드백으로 되돌아 올 수 있는 구조를 제도화해서 학내 여론에 늘 민감하고 기민하게 반응해야만 합니다.
이런 모든 과정들은 학내 민주주의를 신장하기 위한 정말로 기초적인 과제들입니다. 극렬 단체들 연대 서명에 뜬금없이 이름 끼워주는 정신 나간 운동권 학생회는 그 역할에 있어서 시민단체와 학생회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적 권력을 사적 목적으로 전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학생회는 학생들이 모여있는 회의체입니다. 그런데 학생회를 학생들과 유리된 채로 움직이는 전위 조직으로 만들어버리면 대체 그런 조직의 정당성은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런 학생회에 있는 운동권 학생들 특징 중 하나가 요새 대학생들은 개인주의화 되어 있고, 사회 문제에 무관심하며 이기적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는 것입니다.
황당무계한 책임전가입니다. 학생들의 정당한 분노와 요구가 학생회에서 제대로 소화되지 못하니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입니다. 그리고 여태껏 학생들의 의견을 '보수'라고, '한남'이라고, '반동'이라고 잘라버리고 무시해버린 건 다름 아닌 운동권 학생회였습니다.
학생들이 학교의 행정 작용에 분노할 때 구심점이 되어야 하는 건 다름 아닌 학생회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단순한 "학교의 불통 행정"을 "약자에 대한 강자의 억압"이라는 이상한 프레임을 들고 와서 문제를 항상 더 꼬아 놓습니다. 이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항상 '투쟁'인데, 투쟁한 다음엔 어떻게 해야할지에 대한 비전이 전혀 없다는 게 황당한 점입니다. 그냥 "여기저기 학교 행사 방해하고 실력을 행사했으니 저들도 느끼는 바가 있겠지..." 이런 수준입니다.
중요한 건 학교 당국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수단을 모색해야 할텐데도 그런 것에 대한 고민은 전혀 하질 않습니다. 학내 여론 조성, 학생 사회와의 기민한 소통, 학생 참여적 실력 행사 등에 대한 고민이 없는데 아무 곳이나 행사한다고 우르르 몰려가면 뭐합니까? 결국 행사는 행사대로 진행되고 남은 건 피켓 들고 서있는 자신들의 뻘줌함 뿐입니다. 그건 80년대 시위 방식의 온건한 버전일 뿐 결국 문제가 해결된 게 없는 건 매한가지입니다. 그리곤 학교 자치회비로 뒷풀이를 가선 '이야 오늘도 한 건 했다!' 이러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학생들의 목소리와 동떨어진 그들만의 언어로 그들만의 소리를 해대니 학생들의 분노가 구심점을 못 찾고 구름처럼 얼마 못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학생들을 탓하고 있으면 안되는 겁니다.
학생 복지 사업도 단순히 시혜성 포퓰리즘의 차원에서 봐서는 안됩니다. 그것도 학내 민주주의 활성화의 차원에서 파악해야 합니다. 학생회는 학생 사회의 의견과 선호에 예민하게 반응해야 하는 대의 조직입니다. 그 내용과 관계없이 일단 학생들이 갈급하게 요구하는 것이기만 하면 학생회는 그것을 수용하고 학교와 이야기를 해서 진행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기말고사 때 간식을 나누어 주는 게 학생회의 본령이 아니라고 비웃는 운동권들은 본인들이야 말로 학생회의 존재 이유를 왜곡해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식음료품을 단가를 낮춰 대량구매해서 무료로 배급해주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학생들이 원한다고 모두 해야하느냐? 하지 말아야 할 명백한 이유를 찾을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그렇게 하는 것이 최소한도의 형식적 민주주의가 지켜지는 모습인 겁니다.
하지 말아야 할 명백한 이유가 마르크스주의라던가 페미니즘이 되면 이제 그 학생회는 죽은 학생회나 다름 없습니다. 학내 구성원 모두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고 페미니스트가 아닌데 그런 이유를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이유로 들어 학생 사회 다수의 선호를 묵살한다는 것은 학생회의 대의제적 정체성을 형해화하는 몰상식한 태도입니다.
물론 간식 배급이 높은 차원의 선호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렇게 함으로써 학생들에게 학생회가 자신들을 적절하게 대의하고 있다는 확신을 줄 수 있고, 학교 본부의 독단주의와 행정실의 무사안일주의에 대해 학생들의 목소리를 키우고 운신의 폭을 더 넓힐 수 있는 그야말로 '학내 민주화' 의제가 차후에 학생회에게 학생 사회에 의해 요청될 수 있는 기반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관행으로 굳어진 간식 사업을 폐지하게 되면 어떤 학생들이 자신들의 의사가 학생회에 제대로 전달되고 있다고 믿겠습니까? 고작 식음료품을 대량 구매하는 간식 사업조차 하지 않겠다는 학생회를 학생들이 자신들을 대의하기 위해 노력할 의지가 있는 학생회라고 생각하겠습니까?
노동도 여성도 학생회의 핵심 아젠다여서는 안됩니다. 그건 한국 사회의 문제이지 캠퍼스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캠퍼스에 뿌리 박은 조직이라면 캠퍼스 내의 민주주의부터 먼저 이야기해야 합니다. 잠깐 분노하다 흩어지는 학생 사회를 붙잡고 분노를 응집해 학교 본부에 대한 제도 개선의 움직임으로 단계를 옮겨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성 의제나 노동 의제로 학생 사회를 갈라치기하고 일방을 적대시하며 무시하는 사람들은 학생회에서 당장 쫓겨나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