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익균형성 혹은 법익형량에 관하여
로스쿨 지원자의 대표적 실수: '공익'과 '사익'의 잘못된 정의
단순히 '공익'은 '공공성을 갖춘 이익'으로, '사익'은 '한낱 사사로운 이익'으로만 여겨 그 둘을 마치 저울에 매달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해 그중 무엇이 더 중요하므로 내가 생각하는 결론은 어떻다고 논증하는 것은 많은 로스쿨 지원자들이 저지르는 오류입니다. 우선 단어의 정의부터 살펴봤을 때, 문리적으로 뜯어보면 '공익(公益)'은 '공공성(公共性)을 갖춘 이익(利益)'의 준말에 불과합니다. 즉 '공익'을 '공공성을 갖춘 이익'과 비슷한 맥락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동어반복을 듣고 이해했다고 착각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익(私益)'도 마찬가지로 '사사(私私)로운 이익(利益)'의 준말에 불과한 것으로 이러한 이해는 잘못된 것입니다. 이렇게 '공익'과 '사익'을 이해한 사람은 그래서 '공공성'과 '사사롭다'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추가질문에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헌법에서 '공익'이란 '기본권 제한을 수반하는 국가 행위로 추구되는 목적정당성을 갖춘 법익'을 말하고, 이에 대립되어 충돌하는 '사익'이란 '해당 국가 행위로 인해 제한되는 기본권의 보호법익'을 말합니다. 즉 '공익'과 '사익' 간의 법익균형을 심사하는 일은 사실상의 이익을 대립시켜 더 무겁게 '느껴지는' 쪽의 손을 들어주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헌법에서 말하는 '사익'이 기본권인 이상, 이 '사익'에 대한 제한의 정당성을 논하는 일은 단지 '공익'으로 보이는 것이 판단자에게 중요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넘어서 그보다 훨씬 엄정하고 높은 수준의 타당성 심사를 거치는 일인 것입니다.
'이익의 저울질'이 최악의 오류인 이유
이러한 '이익의 저울질'이 갖는 문제는 저번 게시글에서 중요하게 다뤘던 '인간존엄의 원칙'의 훼손과 관련이 있습니다. 인간존엄의 원칙 중 '본질적 가치의 원칙'은 그 어떠한 인간의 삶의 양상도 본질적으로 객관적 가치를 갖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서로 다른 삶의 양상들이 '동등하게'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애당초 '통약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A 사과와 B 사과가 정확히 동등하게 당도가 높을 수 있지만, '통약불가능하다'(Incommernsurability)는 것은 그러한 수준을 넘어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과 모차르트 교향곡 40번의 관계와 같이 애당초 비교가 무의미하거나 불가능할 정도로 서로 값어치를 갖는 가치의 층위가 다름을 뜻합니다. 즉 통약불가능한 것들의 관계는 동일한 잣대로 양화하여 줄 세우는 것이 불가능하며 그렇게 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부당합니다.
따라서 인간존엄성의 차원에서 법적 방벽을 보장받는 기본권을 통약불가능한 다른 가치인 '공익'에 견주어 양화한 뒤 마음속에서 저울질하거나 줄 세운 결과로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실상 판단자의 직감 혹은 감각만을 자의적으로 내세운 것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기본권 주체의 존엄한 지위를 지극히 가볍게 여기는 것임에다가 무엇보다 합리적인 법적 논증 방법조차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쪽 법익이, 다른 사람은 저쪽 법익이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고 내세울 텐데 이렇게 동일한 사안에서 동일한 법적 논증 방식을 사용했을 때 정반대의 결론이 튀어나올 수 있다면 법적 분쟁의 국면에서 주어진 사안을 영구히 해결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익'과 '사익'의 충돌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그렇다면 공익과 사익 중 어느 경우에 어떤 것이 우선한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무슨 조건을 충족해야 할까요? 앞서 '공익'이란 '기본권 제한을 수반하는 국가 행위로 추구되는 목적정당성을 갖춘 법익'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공익을 우선시하여 기본권으로서의 사익을 정당하게 제한할 수 있으려면 공익이 추구하는 '목적정당성'이 기본권을 제한받는 주체에게 '인정받음 직' 해야 합니다. 즉 공익을 추구하는 국가의 작위 또는 부작위에 따라 기본권을 제한받는 주체 입장에서 수인(受忍)하는 것이 기대가능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어떤 기본권의 주체에게 수인이 기대가능하지 않은 부담을 지우는 국가 행위는 평화롭게 공존하고 공정하게 협동하고자 하는 목적을 위한 일반적 행동 조정의 원리와 조화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불공정한' 부담 지우기는 각 기본권 주체를 평등하게 대우하지 않음으로써 입헌민주주의 사회의 규범적 토대, 즉 '인간존엄의 원칙'에 기반한 기본권 체계가 보장하는 체제의 정당성을 근본적으로 무너뜨립니다. 결국 수인의 기대가능성이 없는 기본권 제한은 체제 정당성의 훼손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이때 '수인의 기대가능성'이란 구체적 주체의 심리적 수인가능성을 따져야 함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기본권 제한의 객관적 요건이 동일한 국가 행위도 단지 개인마다의 인내력 차이에 따라 부당한 기본권 침해가 되기도 하고 정당한 기본권 제한이 되기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각 기본권 주체들을 평등한 법적 지위에 있는 존엄한 존재들로서 대우하는 객관적인 규범적 표상을 갖추지 않은 것입니다. 즉 이는 수인의 기대가능성이 없는 기본권 제한의 경우와 동일하게 기본권 주체들 간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왜곡시키고, 심지어는 어떤 기본권 주체는 다른 주체에 비해 '열등'하다거나 '아무렇게나 무시당해도 된다거나' 나아가 '박멸해야 하는' 대상으로 취급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수인이 기대가능한 기본권 제한이란 어떠한 것일까요? 즉 기본권 제한을 수반하는 국가 행위를 허용하는 규범이 어느 기본권 주체에게서도 합당하게 거부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기본권을 제한당하는 주체까지 포함하여 모든 기본권 주체의 '인간존엄성'을 근본적인 층위에서 방어하거나 유지하거나 개선하기 위한 것이어야 하고 그 경우에 한해서 기본권 제한은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곧 기본권 제한은 모든 다종다양한 삶의 양상에 객관적 가치가 있어 존중받아 마땅하며 그러한 삶의 양상을 선택할 자유와 책임은 각 개인에게 오롯이 존재한다는 대전제를 증진하거나 적어도 훼손하지는 않아야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의할 것은 그 어떠한 경우에도 공동체의 일부 구성원의 '특정한 포괄적 신조'로부터 직접적으로 이러한 기본권 제한의 정당화가 도출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가령 동성애가 사회뿐만 아니라 동성애자 본인에게도 해롭다는 개신교 신자들만의 신념이 의회에서 받아들여져 위헌적인 입법을 통해 동성애자의 기본권이 제한당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이는 '인간존엄의 두 가지 원칙'을 모두 충족하지 못한 것입니다. 동성애자의 삶의 양상과 그들 본인의 삶에 대한 스스로의 선택이 그 자체로 존중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어느 한 구성원이 다른 구성원을 대신하여 무엇이 '옳고 선한 가치'인지 선택하고 강제할 '우월한 도덕적 지위'에 있다고 전제하는 셈이며, 국가는 중립성의 책무로부터 이탈하여 이들의 편향된 포괄적 신조를 여타 다른 삶의 가치에 비해 손들어주고 기본권 주체들 간의 평등성을 부정하며 이들 간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왜곡하는 것에 해당합니다.
사고실험: 존스의 텔레비전 방송국 사고
스캔론(T. M. Scanlon)은 다음과 같은 예시를 듭니다. 존스가 텔레비전 방송국의 송전실에서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의 손 위로 전기 장비가 떨어져 그의 손이 으스러졌고 존스는 극심하게 고통스러운 감전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그를 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15분 간 송신기를 꺼야 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존스를 구하고 싶지만, 문제는 지금 해당 송신기는 월드컵 경기를 생중계 중이라는 것입니다. 다행히 존스가 월드컵 경기가 끝나는 1시간 뒤에 구조된다고 하더라도 그의 부상은 조금도 더 심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당장 매우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 존스를 구할지 말지 결정하는 문제는 월드컵 경기 시청자 수가 100만 명인지 500만 명인지 아니면 1억 명인지에 달려 있을까요?
만일 앞서 언급한 잘못된 '공익과 사익의 저울질' 방식으로 이 문제를 살핀다면, 존스를 구조해야 할 필요는 시청자 수가 많아짐에 따라 줄어들 것입니다. 즉 존스가 느끼고 있는 고통이 100만 명이 월드컵 경기 시청을 통해 누리고 있는 쾌락의 양과 동일하다고 가정한다면, 시청자가 1명이라도 더 늘어나는 순간 존스의 구조는 즉시 중단되어야 할 것입니다. 스캔론은 존스의 구조는 시청자 수와 관계없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시청자 수가 1억 명이더라도 존스의 고통이 1억 명의 쾌락의 총합보다 크기 때문이 아니라, 월드컵 경기를 시청 중인 1억 명 중 단 한 명이라도 존스의 구조를 합당하게 거부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다면 존스의 구조가 중단되어야겠지만 그러지 못하리라고 보는 것이 직관에 더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즉 공익과 사익을 견주어 대립시키는 문제의 합리적인 해결책은 이 문제를 사익과 사익의 충돌로 환원하는 것입니다. 그 뒤에 입헌민주주의 국가의 규범적 토대에 대하여 누구의 논증이 더 규범적 차원에서 호소력을 갖는지 이성적으로 따져보아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해야 하는 까닭은 모든 기본권 주체는 공동체 내에서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평등한 지위를 갖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않고 공동체 구성원 중 어느 누구를 다른 누군가보다 '덜 중요하다'거나 '열등하다'거나 돌멩이와 같이 '무의미하고 하찮다'거나 '혐오스러워 제거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은, 때로는 눈 뜨고 볼 수 없이 참혹하고 또 극심하게 반인륜적인 사건이 벌어지던 시절도 있었던 이제껏 인류가 지나온 역사의 과오를 되돌아보고 반성하기는커녕 그로부터 조금도 발전하지 못한 추잡하고 저열한 발상에 불과할 것입니다.
나가며
인지과학의 최신 연구 성과들은 인간은 '결정'을 하고 난 후에 '이유'를 만들어낸다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법관도 인간인 이상 판결의 '결론'을 먼저 마음속에서 결정한 후 '근거'를 구상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지만 '법철학 입문' 시리즈 중 '법현실주의' 파트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듯이 그러한 인지과학의 연구성과에도 불구하고 현행 법체계의 정당성이 훼손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법질서의 정당성은 판결 과정이 결론에 선행함으로써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구성된 판결의 논증이 기본권이 제한된 주체에 대해 수인을 기대가능할만치 합당한 규범적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상기한 모든 내용이 지나치게 롤스를 위시한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의 지적 계보에 천착해있다고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본 시리즈의 첫 번째 게시글에서도 언급했지만 그런 지적이 저는 충분히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한국의 최신 판례들은 공동체주의적 차원에서 해결방법을 모색하는 경우도 있고, 특히 건국 이래부터 종전까지의 대법원 판례들은 신헤겔주의의 일파인 스멘트의 통합설을 근간으로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취지에서 면접 답안을 구상하여 구술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고 수월하게 해낼 수만 있다면 전략적 패착으로 볼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현대 공동체주의는 그 출발이 불과 50년을 조금 넘은 수준입니다. 정치철학으로서는 의미가 있지만 저는 아직까지 공동체주의의 구체적인 발로로서 어떠한 헌법 이론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공동체주의를 틀머리로 기본권 충돌이 쟁점이 되는 사안에서 해결을 구하는 것이 앞서 말한 '공익과 사익의 저울질'이 되기 십상인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그만큼 면접 답변의 포맷으로서 구성력이나 반론대응력이 떨어질 개연성이 큽니다.
또 한편 스멘트의 통합설은 그 이론적 추상성이 평등주의적 자유주의 계열의 이론을 넘어섭니다. 스멘트를 오해 없이 이해한다는 것은 헤겔의 법철학을 자유자재로 현출 할 수 있을 만큼 숙지했다는 의미인데, 그것은 제가 언급하고 있는 헌법 이론을 이해하는 것보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님과 동시에 그렇게 성취한 지적 역량을 로스쿨 면접에 활용함에 있어 평등주의적 자유주의 계보의 헌법 이론을 따르는 것에 견주어 무엇이 뚜렷이 획기적으로 더 나은지도 미문입니다.
저의 법철학적 입장이 광의의 자유주의를, 미시적으로는 롤스와 드워킨을 좇고 있다는 점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로스쿨 면접에 있어 이러한 이유로 제가 언급하고 있는 이론들을 지적 자산으로 삼는 것이 현재로서 제가 보기에는 가장 합리적입니다. 법철학 문외한을 위한 목적을 갖는 글 치고는 쓰다 보니 어휘나 문장 구성의 수준이 다소 예상 독자에게 어렵게 느껴질 수 있겠다고 생각되긴 하지만, 로스쿨 면접을 준비할 정도로 문해력이나 인문학적 교양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독해가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이 글이 지나치게 어려워 이해가 안 될 것이었다면 LEET를 일정 수준 이상 득점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라 보이기 때문입니다. 바쁜 일정 때문에 주 5일 꾸준히 글을 업로드하지는 못하더라도 가급적 자주 작성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