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불편한 동행
임신 내내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건 다름 아닌 시어머니와의 관계였다. 본인은 쿨- 하고 뒤끝 없는 좋은 성격이라고 자부하셨는데 본인은 다 털어내셨을지 몰라도 며느리인 난 곪아 터졌었다. 특유의 필터 없는 단어 선택으로 나를 당황스럽게 하신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날이라 얼굴에 뾰루지가 올라오면 "너 얼굴이 왜 이렇게 더러워?"라는 말을 하시거나, 종일 밥을 못 먹고 일하다가 늦은 시간 과일을 먹는 나에게 "과일도 많이 먹으면 살찐다. 그만 먹어라." 등의 노 필터 언행으로 날 찌르셨다. 게다가 우리 시어머니는 일명 걱정인형이셔서 없는 걱정도 사서 하시는 재주를 가지고 계신다. 며느리가 임신을 했는데 셋을 한 번에 품었으니, 걱정이 산더미 같았을 것이다. 임신 후 통화를 할 때면 목소리에서부터 걱정이 뚝뚝 떨어졌다. 밖에서 만나 밥이라도 먹는 날엔 '왜 옷을 그렇게 얇게 입었느냐, 왜 그렇게 몸에 딱 붙는 옷을 입었느냐, 신발은 또 왜 그리 불편한 걸 신었느냐' 걱정을 가장한 타박이 날 공격했다.
여러 사람에게 추천을 받아 병원을 정하고 담당 교수가 아주 유명한 사람이고 믿음직한 사람이라고 백날 말씀을 드려도 걱정이 많으셨다. 소위 빅 3 병원인데도 '더 큰 병원으로 가야 하는 것 아니냐, 더 유명한 의사에게 가야 하는 게 아니냐, 한 군데만 가봐도 괜찮으냐' 걱정에 걱정을 더 하셨다. 난 담당 교수에게 큰 신뢰를 가지고 있었기에 시어머니가 직접 의사를 만나보면 안심하실 거라 생각했다. 시어머니의 걱정을 덜어 내는 것도 중요했지만 제발 날 그만 괴롭혀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함께 진료를 받으러 갔다.
내가 다녔던 병원은 접수를 한 후 산모 혼자 혈압을 재고 몸무게와 키를 재고 소변을 받아 단백뇨 수치를 체크해야 했다. 접수 후 의자에 앉아계시라고 말씀드리고 몸무게를 재러 가는데 어머님이 바짝 따라붙으셨다. 난 바로 뒤돌아 앉아 계시라고 여기 복잡하니 혼자서 금방 하고 오겠다고 재차 말씀드렸다. '네가 힘드니 돕겠다' 라며 따라오시는 걸 검사실 입구에서 간호사가 제지해주었다. 시어머니와 단 둘이 병원에 온 것 자체도 불편한데 어머니의 그런 행동에 진료를 받기 전부터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시어머니는 진료에서 탈의실에 들어가는데도 함께 가고 싶어 하셨다. 내 몸이 무거우니 도와주신다며 따라오셨는데 내가 화들짝 놀라며 괜찮다고 커튼을 빠르게 쳐버리자 이내 포기하셨다. 옷을 갈아입고 검사 의자에 앉으려는데 어머님께서 나를 계속 바라보고 계셨다. 산부인과 검진 의자는 일명 '굴욕의자'라 불릴 만큼 많은 이들이 편치 않은 존재이다. 워낙 산부인과 진료를 많이 받아온 나에게는 검진대에서 의사에게 진료를 받는 것 자체가 꼭 필요한 '의료행위'라고 생각되었기에 굴욕적이라는 생각을 한번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시어머니 앞에서 굴욕 의자에 앉아야 한다니, 세-상 굴욕적이었다. 진료실 의자에 앉아계시면 될 것을 굳이 굴욕 의자 바로 옆까지 따라오셔서 나를 당황시키신 우리 시어머니. 의자에 엉덩이만 대고 다리를 올리지 못하고 걸터앉아 있는 나의 당황스러운 표정을 본 간호사가 바로 눈치를 채고 시어머니를 멀리 떨어진 의자로 안내해주었다.
이어 들어온 교수님은 "친정엄마세요? 아님 시어머니세요?"라고 물으셨다. 시어머니라고 답하니, 나에게 무언의 눈빛을 보내더니,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아이들 아주 건강하게 잘 있다며 시어머니를 안심시켰다. 여기에 며느리가 아주 힘들 텐데 잘 버티고 있다며, 만날 때마다 밝고 긍정적이라 아이들도 건강하게 잘 자라는 거라는 칭찬도 해주셨다.
다행히 진료를 함께 다녀온 후 시어머니의 걱정은 몇 스푼 덜어내신 듯했다. 필터 없는 날카로운 언행에 날 꾸준히 놀라게 하셨지만 어머니가 나에게 보내는 걱정 에너지가 크게 줄어 내가 한결 편해졌다. 병원 동행이 참 힘들었지만 나에게 손해 없는 일이었다. 그 이후에도 큰 사건들이 빵빵 터지긴 했지만 말이다.
신혼과 임신 시절, 그리고 출산 후 1년 정도의 시간 동안 난 엄청난 고부갈등에 소용돌이 안에 서 있었다. 며느리라는 약자인 나는 최강자인 시어머니의 말씀이나 행동에 반기를 들면 안 된다 생각했기에 고부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착하고 순한 며느리이고 싶었지만 내 안에는 불씨가 자랐다. 그 불씨는 또 다른 불씨와 만나 더 큰 불이 되고 명치에 대롱대롱 달려있던 그 불덩이는 점점 더 커져 내 정신까지 불태웠다.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나도 당하고만 있지는 말자라는 생각으로 시어머니를 대했고 우린 서로를 힘들게 했다. 시어머니도 나도 힘들었지만 중간에서 이러 터지고 저리 터지는 우리 남편은 더 힘들었을 것이다. 앞으로 많은 일들을 이 공간에 적게 되겠지만, 결국 사람 관계에서 일방적인 건 없다는 게 나의 고부갈등의 종착점에서 얻은 결론이다. 아이들을 낳은 지 5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은 어머니와 함께 하는 일 중 불편한 것은 없다. 어떨 땐 친정엄마보다 시어머니가 더 편할 때도 있을 정도로 우린 놀랍게 가까워졌다. 이젠 둘이 함께 그 무엇을 해도 괜찮다.
단 한 가지 , 굴욕 의자는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