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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요 Oct 18. 2019

누군 몰라서 그렇게 안 썼니?

음반 리뷰 필화사건 

글을 솔직하게 쓴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내가 글쓰기 강의를 할 때도 글은 구체적으로 써야지 추상적으로 써서는 안된다고 말하곤 한다.

근데 그 솔직함이 가끔 문제를 일으킨다. 대학 시절 교회에서 주보를 만들 때 옛 교역자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커서 현 교역자를 비난하는 듯한 뉘앙스의 글을 써서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옛 교역자를 찾아가지 못하게 현 교역자가 막았다고 알고 있어 그렇게 썼는데, 알고 보니 막은 적이 없고 말이 옮겨지다가 오해를 불러일으킨 경우였다. 나의 글 덕분에 현 교역자는 완전히 마음이 상했고, 나뿐만 아니라 함께 주보를 만든 제작진과 청년부 임원들에게까지 불똥이 튀었고, 나는 한동안 자숙해야 했다. 

그런 걸 흔히 필화사건이라고 하는데, 잡지 만들면서도 필화사건이 한번 있었다.

에코 앨범

나는 음악CD 리뷰를 담당하는 기자였다. 나는 음반리뷰 페이지의 모든 CD를 하나도 빠짐없이 들어보고 리뷰를 쓴다는 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대체로 음반 리뷰 코너는 정보 페이지라서 CD 안에 들어있는 평론가들의 리뷰와 음반사의 보도자료를 대충 짜깁기해서 쓴다. 거기에 공력을 들이는 곳은 별로 없다. 나는 그렇게 쓰기 싫었다. 독자로서의 내가 그런 정보 코너를 샅샅이 읽고 좋아하기도 하지만, 음반사가 음반을 보내주는 성의도 무시할 수 없고, 내 이름을 달고 나가는 기사니까 정직하고 도움이 되는 기사를 쓰고 싶었다. 그래서 음반을 다 들어보고 내 느낌을 솔직하게 썼다. CD 페이지는 달랑 두 페이지(한 페이지는 국내음반, 한 페이지는 해외음반)였지만, 거기에 쏟아붓는 내 시간과 공력은 꽤 컸다.  

수 앨범


신인 걸그룹인 베이비복스, 에코, 수(SUE)의 음반이 같은 달에 나왔다. 

베이비복스는 솔직한 말로 노래를 못했다. 그때에도 이미 음반을 만들 때는 소위 ‘찍기’가 가능한 시대였다. 즉, 노래 한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창하여 녹음하는 게 아니라, 여러번 불러서 잘 부른 소절만 잘라내(이걸 ‘찍기’라고 불렀다) 이어붙이기가 가능했다는 말이다. 게다가 걸그룹은 멤버수가 많으니까 각 멤버가 부르는 소절도 짧았다. 그런데도 CD를 들어보면 소리가 조화롭지 못하고, 노래를 못한다는 느낌이 팍 왔다. 

그에 비해 수와 에코는 노래를 잘했다. 지금은 그 존재조차 잘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나는 특히 수의 노래가 좋았다. 비슷한 걸그룹이 함께 음반을 냈기에 나는 나름대로 그들의 미묘한 차이라도 잘 드러나게 써야겠다 생각했고, 세 음반을 다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다. 그렇게 들었더니 실력 차이가 극명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듣고 느낀대로 베이비복스의 음반은 실망스럽고, 수와 에코의 음반은 좋았다고 썼다.

베이비복스 1집 앨범

문제는 잡지가 발행된 다음에  터졌다. 

최종 교정을 볼 때까지 다른 선배들은 내 기사를 제대로 보지 않았고, 아마 편집장도 별 문제가 없으니 오케이를 냈을 것이다. 그런데 잡지가 나가고 나자 베이비복스 매니저에게서 득달같이 전화가 걸려왔다. 대체 이게 뭐하는 플레이냐고. 그달 우리 잡지에는 베이비복스가 6p 나갔다. 소속사가 끗발있는 곳이라 페이지를 많이 잡았고, 나름 대형 신인이기도 했다. 그렇게 여러 페이지 인터뷰를 하고, 멋진 신인이 나타났다고 설레발을 쳤는데, 그 잡지의 말미에 실린 음반 리뷰에서 베이비복스 노래가 별로고, 애들이 노래를 못한다고 써놨으니 기획사로서는 열이 뻗칠 상황이었다.

뒤늦게 내 리뷰를 본 베이비복스 담당 기자가 씩씩대며 화를 냈다. 나는 잘못한 게 없으므로 뻣뻣하게 나갔다. “내가 음반을 안 듣고 발로 쓴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돌려 듣고 썼는데 왜 난리냐? 그럼 기자가 못 부르는 걸 못 부른다고 쓰지 잘 부른다고 써야 하냐? 그게 기자냐?”했고, 아마 선배기자는 꼭지가 돌았을 것이다. 말이 안통하자 선배가 소리 질렀다. 

“나는 뭐 걔들이 예뻐서 그렇게 쓴 줄 알아? 걔들 노래 못하는 거 나도 알아. 너만 귀 있는 거 아니야.” ^^;;;;;;; 

선배는 이럴 바에야 차라리 음반소개가 안 나가는 편이 나았다고 했고, 사실이 그러했다. 매니저와의 관계, 소속사와의 관계 등을 설명하며 제발 좀 유도리 있게 쓰라고 야단을 쳤다. 사실 그 선배한테는 미안했다. 다만 왜 잡지가 나오기 전에 제대로 검토하지 않았는지 묻고 싶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쓰면서도 누군가 제지할 거라고 생각했다. 담당기자든 편집장이든 보고 이야기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담당기자는 자기 기사가 제대로 나가는지만 보느라 내 기사를 볼 생각도 안했고, 편집장 역시 디자이너 출신이라 자잘한 글 같은 건 제대로 안읽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의외로 누구에게도 제지당하지 않고 그대로 인쇄가 되길래 그렇게 써도 되는 줄 알았다. 

이후 음반리뷰 페이지에는 요주의 딱지가 붙었다. 당장 다음달부터 선배들이 항상 리뷰를 체크했고, 특히 자기 가수 인터뷰가 잡힌 달에 새 음반이 나오면 “유정이가 뭐라고 썼나 보자”하며 꼭꼭 체크했다.


항상 느끼는 일이지만 세상 일이란 알 수가 없어서 그렇게 필화사건까지 일으킨 베이비복스는 꾸준히 앨범을 내고 활동을 하고, 지금도 아는 사람들이 많은 그룹이지만, 에코는 활동이 지금까지 이어지지 못했고, 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잊혀졌다. 이런 걸 보면 재능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 잡지사를 관두고 옮긴 비디오 잡지사에서도 편집후기 잘못 썼다가 회사에서 쫓겨난 적도 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따로 하겠음) 지금도 블로그에서 잊을만 하면 한번씩 지인들이 낸 책이 재미없다고 써서 관계가 끊기거나 마음의 상처를 입히곤 한다. 그렇게 내게서 등 돌린 사람들이 못해도 한 다스는 넘을 것이다. -.-;; 사람이 그러면 좀 달라질 법도 한데 재미없는 걸 재밌다고는 도저히 못쓰겠다. 그것은 내 글의 신뢰도와 직결되는 문제이고, 나름 글 쓰는 자의 양심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요즘은 융통성이 좀 생겨서, 재미없는 건 그냥 리뷰를 안해버리거나, 내용만 적거나, 좋았던 부분만 쓰는 식으로 대처하고 있다. 여러 가지 빠져나가는 방법이 있는데, 그때는 그걸 몰랐고, 아마 알았어도 젊은 양심에 비겁한 일이라 여겨 그렇게 쓰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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