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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요 Oct 04. 2019

아싸 기자의 방송국 뒷문 출입기

유명세와 브랜드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연예판

기자 일을 하면서 이 일이 영업사원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밖으로 나가서 돌아다녀야 하고, 거래처가 있다는 것도 비슷하지만, 가장 닮은 점은 내가 일하는 브랜드가 유명해야 일하기가 편하다는 사실이다. 영업사원의 경우, 같은 물건을 팔아도 그 물건의 브랜드가 유명하면 말을 꺼내기도 쉽고 팔기도 쉽다. 고객들이 이미 알고 있는 브랜드라 신뢰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듣보잡 브랜드의 물건을 팔기는 정말로 힘들다. 그런데 잡지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소속된 매체가 유명하고 힘이 있다면 별다른 설명없이 명함 보여주고 취재하고 인터뷰하는 것이 순조롭지만, 듣보잡 매체라면 매체 설명부터 사기꾼이 아니라는 증명까지 해준 뒤에야 겨우겨우 인터뷰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잡지는 만든 지 1년도 안되는 신생매체인데다, 연예판도 다른 판과 마찬가지로 방송이 제일 쎄고, 그 다음이 일간지, 스포츠신문, 주간지 순이다. 제일 마지막이 월간지다. 조선일보나 일간스포츠 명함을 내밀면 군말없이 통과시켜주면서도 우리 잡지사 명함을 내밀면 “여기가 뭐 하는데냐? 너 기자 맞냐?” 등등의 질문 세례를 받다가 결국 거부당하기 일쑤다. 요즘은 더할 것이다. 워낙 인터넷 매체가 많다보니.


매체력이 약해 서러울 때는 방송국 출입할 때다.

방송국 역시도 비슷해서, 엠넷이나 KMTV 등의 음악전문방송은 기자들에게 관대한 반면 KBS 같은 공영방송은 뻣뻣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작은 방송국들은 한 명이라도 더 취재를 와서 홍보해주는 게 좋지만, 거대 방송사는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연예계는 어디나 유명세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동네다.

그나마 MBC와 SBS는 그럭저럭 사정을 말하고 잘 드나들게 되었지만, KBS는 철통이었다. 당시 기자들 사이에서 세상 제일 무서운 사람이 KBS 경비원이었다. 이 아저씨들은 유도리라고는 통하지 않았고, 이름 알려지지 않은 매체의 연예기자는 스타의 팬들과 동급으로 보았다. 쫓아내야할 대상이라는 말이다. 가요톱텐 녹화장에 들어가려면 안에서 연예인 매니저가 나와 확인을 하고 같이 들어가야 됐다. 문제는 연예인 매니저가 녹화장에서 너무나 할 일이 많고, 바쁘기 때문에 기자를 위해 그 멀리 정문까지 나올 수가 없다는 거다. 물론 그것도 내가 조선일보 기자쯤 됐다면 버선발로 뛰어나왔겠지만.

하여튼 KBS 경비 아저씨들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웠다. 그리하여 많은 기자들이 꼼수를 썼고, 나도 그 기자들이 만들어놓은 길을 따라 방송국 정문이 아닌 후문 쪽 분장실로 들어가게 되었다. 후문 쪽은 담배 피는 구역이고, 청소하시는 분들이 쓰레기 내가는 길이기도 해서 경비가 느슨했다. 

그렇게 후문으로 들어가 분장실에 들어가면 거기는 거기대로 또 정글이다. 신인들은 기를 쓰고 눈도장을 찍으려고 노력했다.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연예인은 아니고 어른이니까 분명 관계자일 거라 예상하고 무조건 90도 인사하고, 반가운 척을 하고, 자신들을 어필했다.

가만히 분장실 복도에 앉아 있으면 연예인들의 먹이사슬이랄까 계급 서열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 분장실에서 나오지도 않는 톱 연예인과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두리번거리며 쳐다보고 수시로 눈 맞추고 인사하는 신인들까지, 한 눈에 서열이 보이는 곳이다.

데뷔 초기 김소연

그때 인상적으로 본 사람이 배우 김소연이다. 지금은 결혼도 하고 40대 중년 연기자가 되어있는데, 그때만 해도 그녀는 아직 10대였다. 내 취재원이 아니라 저간의 사정은 다 모르지만, 김소연은 따로 매니저나 코디가 없었다. 코디들이 들고 다니는 큰 화장가방을 손수 들고 다니며 스스로 화장을 했고, 스케줄도 자기가 관리했다. 그러면서도 항상 밝은 얼굴로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를 했다.

당시에도 김소연은 신인이 아니었고, 데뷔한지 몇 년 된데다 연기자로서도 진행자로서도 괜찮은 입지를 굳히고 있었는데, 그런 연예인이 스스로 화장가방을 들고 다니면서 화장하고, 막내기자부터 수석기자까지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를 하는 게 대단해보였다. 저 아이는 언젠가는 성공할 거라고 다들 그랬다.

FM라디오 방송 취재 기사 (DJ 김예분)

그나마 내가 방송국 정문으로 당당하게 들어간 건 라디오 프로그램 취재를 할 때였다. 라디오는 TV와 달리 인간미가 있었고, 취재를 한다고 연락하면 작가들이 로비로 마중 나와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당시 8시~10시 사이의 방송3사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을 기획으로 취재하기로 하고, 생방송에 가서 현장 취재하고, 작가들과 DJ들 인터뷰를 했다. 이본, 박소현, 김예분 등이 당시 DJ였고, 그때 인터뷰했던 작가들이 나중에 책을 내기도 했다. 그 중 한 프로그램의 게스트가 HOT였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그룹이었고, 울 회사에선 언감생심 인터뷰 한번 잡아보지 못한 대스타다. 선배들의 말로는 그들이 인터뷰비를 요구하는데, 액수가 상당해서 우리 잡지사처럼 가난한 곳은 그걸 주지 못해 지면에 싣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니 그들이 나를 알 리가 없다. 그런데 라디오 부스에서 대기하던 그들 중 한 명(장우혁이었는지 이재원이었는지 헛갈린다. 둘은 언제나 헛갈린다...)이 나를 보더니 일어나 꾸벅 인사를 했다. 난 내 뒤에 누가 있나 싶어 돌아봤네. 없었다, 나에게 하는 인사였다. 그가 나를 딴 사람으로 착각한 건지, 아니면 기자라니까 그런 건지 지금도 알 수 없지만, 하여튼 인사를 하고 그 뒤로도 눈만 마주치면 씩 웃어줘서 얼떨떨하면서도 기분 좋았다. HOT에게 있었던 선입견마저 싹 가져가버릴 정도로 좋은 경험이었다. 그 정도 웃음에 마음이 녹아내리다니...역시 난 아싸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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