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요 Sep 24. 2019

제5원소와 이윤정 화보

사진에 무심했던 신입기자 썰

패션지도 그렇지만 연예잡지에선 기사보다 사진이 중요하다. 나는 국문과 출신인데다 텍스트 중독자라 잡지를 볼 때 기사건 리뷰건 한 글자도 빠짐없이 읽는 사람이었기에 사진보다는 기사가 중요하며, 글이 기사의 본질이라고 우겼다. 백마디 말보다 사진 한 장이 대세를 뒤집거나 모든 것을 한 눈에 알아보게 하는 일이 비일비재한데도, 나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앤드리아처럼 매체의 본질은 기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입 주제에 사진기자 선배가 어떤 컨셉으로 사진 찍을 거니까 이런저런 옷을 준비시키라고 한 말조차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려 사고를 친 적이 있다.

아마도 선배가 원했던 제5원소 밀라 요요비치의 패션

삐삐롱스타킹(원래 삐삐밴드로 데뷔했지만 내가 기자를 하던 시절에는 삐삐롱스타킹이라는 이름으로 바꿔서 활동했다)의 이윤정이 솔로로 데뷔한다고 했다. 그래서 화보를 찍게 되었다. 사진기자는 영화 <제5원소>에 나오는 밀라 요요비치처럼 찍자고 했다. 나는 <제5원소>를 보지 않았기에 밀라 요요비치가 어떤 옷을 입고 나왔는지 알지도 못했고, 그저 미래 SF라는 사실만 기억하고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새까맣게 까먹어 버렸다. 

잡지 촬영 전에 이윤정의 매니저가 전화를 해와 어떤 옷을 준비해가면 되냐고 물었을 때도 선배와 이야기했던 사실을 까먹고 자유롭게 준비하라고 했다. 

촬영 당일, 이윤정 측은 주황색 미니스커트와 반짝거리는 민소매 티셔츠, 노란색 차이나 드레스를 준비해왔고, 사진기자 선배는 밀라 요요비치 복장은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그때서야 나는 선배와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너무 늦은 기억이었고,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아마 선배가 보통 사람이었다면 나는 그날 눈물 쏙 빠지도록 야단맞고, 어디가서 붕대라도 가져와서 이윤정의 몸을 칭칭 감아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선배는 착한 사람이었고, 남에게 싫은 소리를 못하는 타입이었다. 게다가 선배라지만 나와 동갑내기였다. 마음은 답답했겠지만 나에게 대놓고 야단을 못 쳤다.

엎질러진 물을 수습하기 위해 배경지로 준비했던 반짝이는 비닐을 둘둘 감아 미래적인 분위기를 내고 가져온 옷들 중에서 가장 광택 많은 것을 골라내 전위적인 포즈를 취하게 해서 겨우겨우 촬영을 마무리했다. 컨셉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진 찍는 솜씨가 워낙 뛰어나  사진은 예쁘게 나왔고, 무리없이 지면에 실렸다.  

제5원소와는 5만광년 떨어져버린 이윤정의 화보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나서야 나는 <제5원소>를 보게 되었다. 영화에서 밀라 요요비치는 여러 의상을 입고 나오는데, 그 중에서 주황색 단발머리에 하얀 붕대를 감은 것 같은 의상이 메인 의상이었다. 나는 그때서야 선배가 말했던 의상이 이것이었구나 했다. 이미 잡지사를 그만 둔 뒤였지만 새삼 선배한테 미안했다. 

그 이후 나는 사진기자들이 하는 얘기를 정신차리고 들었다. 내가 아이디어를 못낸다면 사진기자들의 요구라도 제대로 들어 잘 촬영할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기사를 잘 쓰는 것보다 중요한 연예잡지 기자의 일이다.


화보 장인 엄정화 (구글에 엄정화 화보라고만 쳐도 이런 이미지들이 쏟아진다)


화보 촬영을 하면 가장 기분 좋은 연예인이 엄정화였다. 평소 엄정화는 발랄하고 수다스럽고 전혀 연예인스럽지 않은, 위화감을 주지 않는 친근한 스타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도 친절하고, 마음씨도 고왔다. 키가 작고 통통한 체형이라 콘서트 같은 라이브 행사에선 가끔 배가 나오거나 옆구리살 접힌 게 사진에 잡히기도 한다. 그런 그녀가 스튜디오에서 사진만 찍으면 180도 달라졌다. 방금 전까지 우리랑 같이 피자 먹으면서 깔깔대던 사람 맞나 싶을 정도로 분위기도 표정도 고혹적으로 변했다. 저런 수더분하던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매혹적이고 도발적인 분위기를 낼 수 있는지 항상 신기했다. 속눈썹 한올까지 연기를 하는 것 같았다. 또 자기 몸의 장단점을 잘 알고 있어서 어떤 각도로 어떤 포즈를 취하면 길어 보이는지 날씬해 보이는지도 기막히게 잘 알았다. 찍는 사람도, 보는 우리도 매번 감탄했다.

바로 그런 사람을 프로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가끔 잡지사에선 전혀 관계없는 두 연예인을 엮어 영화처럼 스토리를 만들고 화보를 찍기도 한다. 그럴 때면 분장과 의상을 위해 코디네이터를 따로 고용한다. 신인 시절 최강희와 신인 남자배우를 엮어 로맨스 영화 같은 화보를 찍은 적이 있는데, 당시 최강희에겐 따로 코디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와 친한 언타이틀 코디가 그 화보의 메이크업과 의상을 담당했다. 언타이틀 코디는 최강희와 작업하면서 연예인이 어쩌면 이렇게 착하고 천사 같을 수 있냐고 너무너무 좋아했다. 언타이틀의 유건형은 까다롭기로 유명했고, 어떤 옷을 갖다줘도 싫다 안입는다 까탈스럽게 구는데 비해 최강희는 예쁘게 화장해주셔서 감사하다, 옷이 너무 예쁘다며 싹싹하게 웃고 칭찬했으니 코디가 좋아하는 것도 당연했다. 


촬영은 사진만 잘 찍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진행, 패션, 분장, 공간이 모두 협업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언제나 지면에 정확하게 반영된다.


이전 22화 팬레터에 정성스런 답장해준 이적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