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요 Sep 07. 2019

팬레터에 정성스런 답장해준 이적

연예잡지의 재미, 팬레터 코너 

우리 잡지에는 팬레터 코너가 있었다.

연예인 팬들의 편지를 받아서 그 중 한 개를 뽑아 실어주고, 해당 연예인의 답장도 실어주는 코너다. 이런 자질구레한 코너는 보통 막내 기자 담당이다. 즉 내 담당이었다.

연예인이 손으로 직접 쓴 편지를 실어주니 팬들은 무척 좋아하지만, 연예인에게 손편지를 받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대체로 귀찮아 하거나 하기 싫어서 도망갔다. 연예인들이란 작가들이 아니니 글 쓰는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고, 자기 아니라 다른 연예인이 해주면 될 거라 미루며 가버리곤 했다. 

연예인이 스튜디오에 촬영하러 오면 편지지를 준비했다가 잠깐 쉬는 시간에 몇자만 써달라고 졸라대서 겨우 얻어내곤 했다.

이병헌과 김원준이 모델로 나왔던 트윈엑스 화장품 광고. 이 광고 덕분에 X세대라는 말이 유행했다.


그 중 편지 쓰는 걸 정말 힘들어했던 가수가 김원준이다. 김원준은 당시 이병헌과 함께 'X세대'라는 용어를 유행시켰던 화장품 광고 모델로 출연할 정도로 X세대를 대표하는 스타였다. 꽃미남이라 어쩐지 차갑고 쿨할 것 같은데, 예상 외로 자상하고 부드러운 성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편지 쓰는 것만은 질색을 했다.

파지를 몇 장이나 내면서 고치고 또 고치고 하다가 건네준 종이엔 달랑 한 줄 써 있었다. 

“이거 봐요. 공부 열심히 해라, 건강해라, 이것 밖에 할 말이 없잖아. 두 줄을 못쓰겠어 진짜.” 하면서 징징거렸다. 자기가 팬들에 대한 마음이 없는 게 아니라 진짜 쓸 말이 없어서 그런다고 했다. 그래도 어쨌든 그는 편지를 써주는 친절한 연예인에 속했다.

안 쓰고 도망가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패닉' 활동 당시의 이적과 김진표


그러던 어느 날, 패닉으로 활동하던 이적에게 팬레터가 왔다.

보통 팬레터도 빈익빈 부익부라 인기 있는 그룹에게 집중되었고, 인기있는 그룹은 시간이 없으니까 답장 써주기가 힘들었다.

우리 잡지 창간 이래 이적에게 편지가 온 건 처음이었다.

고등학생이었는데 입시와 장래를 놓고 고민이 많다는 내용이었다. 

패닉이 촬영하러 온 날, 이적에게 이 편지를 주면서 답장을 부탁했다. 

보통은 그 자리에서 휙 보고 대충 몇 줄 써주는데, 이적은 알겠다고 하더니 편지를 가져갔다. 그리고 며칠 후 팩스를 보내왔다. 우와....난 깜짝 놀랐다. 편지지 한 장을 빡빡하게 채운 손편지가 팩스로 온 것이다.

이적이 서울대 오빠 아니겠는가? 글씨는 또 어찌나 단정하고 반듯한지...

그 학생의 고민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사려깊게 쓴 편지였다. 그 학생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구절구절 묻어났다. 공부를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게 뭔지를 아는 게 더 중요하며, 그걸 알아가기 위해 좌절하거나 실패할 수도 있지만, 10대 때 실패했다고 해서 그게 인생 실패가 아니라는 내용이었다. 요즘 멘토들이 하는 말들이 그때 거기에 적혀 있었다. 그저 공부 열심히 하라, 대학 가서 놀아라는 말이 아니라 인생을 놓고 어떤 고민을 하고 미래를 보는지가 중요하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팬레터 코너에는 학생의 편지와 이적의 답장이 실렸다.


그리고 다음 달, 우리 잡지 팬레터 코너에는 이적에게 보내는 편지가 10통쯤 왔다. ㅋㅋㅋ

하지만 얘들아, 적이 오빠 편지는 이미 실리지 않았니? 니넨 너무 늦었다.

좀 창의성 있게 이적 말고 다른 인기 덜한 연예인에게 편지를 써보지 그랬니? 그랬으면 이 언니가 답장 받아줬을텐데...


이전 21화 자우림이라는 이름을 싫어했던 자우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