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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요 Nov 06. 2019

잡지가 망한다는 것

IMF의 시작

기사를 마감하고, 편집 디자인을 마친 뒤, 교정지가 나오면 살펴보는 것으로 기자들의 일은 끝난다. 인쇄소가 처음 거래하는 곳이면 인쇄소에 나가 감리를 보기도 하는데, 월간지는 대놓고 거래하는 인쇄소가 있기에 어련히 알아서 하니까 감리까지는 보지 않는다.

교정지 교정이 끝나면 공식적으로 기자들의 일은 끝이라 이틀 정도 쉬고 나온다. 마감 전까지는 계속 야근을 하고, 때로는 철야를 하고, 휴일에도 나와서 근무하기 때문에 이틀 정도는 쉬게 해준다. 

인쇄소에서 나오고 있는 인쇄물


그렇게 이틀이 지나고 좋은 컨디션으로 회사에 출근했다.

그런데 사무실 전체가 술렁거렸다. 무슨 일이냐니까 잡지가 엉망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내 취재원이 최초로 표지를 장식한 호인데, 이게 무슨 소린가? 

오후에 인쇄소에서 묶여 도착한 잡지를 끌러보니 참담한 수준이었다. 우리 잡지는 판형 자체가 다른 잡지보다 좀 더 큰데다 표지 코팅도 일반적인 반짝이 코팅보다는 좀 더 고급 코팅을 했다. 내지도 수입지를 사용해 아이보리 색상에 질기면서도 부드러운 촉감이었다. 그런데 이번호는 일반 잡지 크기에다 표지는 꼴보기 싫게 반딱거리는 코팅이었다. 내지가 일반지로 바뀐 것은 물론 곳곳에 갱지(신문지와 같은 종이) 부분도 있었다. 잡지에 갱지를 쓰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우리는 눈이 뒤집혔다.


사실 연예인 만나고 기사 쓰고 잡지를 만드는 일은 즐거웠지만, 회사 사정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1~2호를 수만권 찍어내고, 매진이 되고, 전국 각 서점에서 선금을 싸들고 덤빌 정도로 인기가 있었지만, 그 선금은 전부 총판이 가져갔다. 총판은 서점으로부터 현금을 받고, 우리(잡지사)에게는 어음을 끊어줬다. 그리고 어음 지급기일을 3개월에서 6개월로 늘리더니 시간이 지나도 돈을 주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돈을 들고 날랐다. 덕분에 우리 회사는 도산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기자들이 출근해서 매니저와 통화하는 것이 아니라 인쇄소와 제본소와 출력소의 빚 독촉 전화에 시달렸다. 사장님 안계신다고 대답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정말 스트레스가 심해서 아침마다 출근하고 싶지가 않았다. 전화 받고 욕먹는 일상을 반복하다 결국 사장님은 밀린 인쇄대금 대신 잡지사를 인쇄소에 넘겼다. 여전히 잡지사 경영은 사장님이 하셨지만, 결정은 사업주(인쇄소 대표)가 했다. 

인쇄를 하기 위해선 종이가 필요하다. 인쇄대금과 함께 밀리는 것이 지업사의 종이대금.


인쇄소에선 인쇄대금도 못받았는데 잡지 퀄리티 따위 신경 쓸 형편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싸게 찍어내 많이 팔 궁리만 했다. 원래 우리 잡지의 판형에 맞추자면 종이 손실분이 많았고, 수입지는 비쌌기 때문에 자기네 인쇄소의 남은 종이에 로스 나지 않는 판형으로 찍어낸 게 바로 이번 호였다. 갱지가 들어간 것도 남는 종이로 만들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다. 종이는 그렇다 치지만, 인쇄소라면서 인쇄 포커스조차 못 맞춰 글자와 사진이 전부 두 겹으로 겹쳐 찍혀 있는 꼴을 보자니 분노를 넘어 참담했다. 나는 이걸 어떻게 DJ DOC에게 보이냐며 징징댔고, 선배들 역시 이런 잡지를 내가 만들었다는 말은 차마 자존심 상해 못하겠다며, 이번 호는 연예인들에게 돌리지 말자고 담합했다. 사무실 분위기는 먹구름이 낀 것처럼 우울했다.

잡지 퀄리티 때문에 편집부가 항의를 했음은 물론이다. 그러자 경영진에서는 우리에게 정신 차리라고 했다. 지금 콘텐츠가 중요한 게 아니라 광고를 많이 받아 돈을 벌어야 하며, 운영비도 줄여야 한다며 카페라떼도 못 사먹게 했다. 요즘도 삼각형 커피우유만 보면 그 시절 생각이 난다. 우리의 빈곤한 처지를 한눈에 알려주던 삼각 커피우유. 간식이 카페라떼에서 커피우유로 전락하던 순간, 나에게는 IMF가 다가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간식이며 차비는 야근을 하고, 취재를 하려니 안 줄 수가 없었지만, 월급은 그렇지 않았다. 그때도 이미 우리는 월급을 몇 주씩, 몇 달씩 밀려받고 있었다.

왜 커피우유만 보면 눙무리...ㅠ.ㅠ

잡지가 그렇게 엉망으로 나오더니 회사는 곧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편집장이 바뀌고 얼마 뒤 모든 기자에게 사직서를 제출하라고 했다. 사장이 바뀌었으니 이 회사에서 저 회사로 이직한다는 요식행위로 사직서를 받는 거라고 했다. 하지만 새로 들어온 기자는 이미 전 회사에서 그런 과정을 거쳐 기자들이 해고되는 걸 본 지라, 절대 개별적으로 사표를 써서는 안된다고, 일괄사표를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직서 한 장에 기자들의 이름을 연대 서명해서 내야만 한명씩 자를 수 없다고 말했다. 일괄사표를 내면 한꺼번에 자르거나 살리거나 둘 중 하나밖에 선택지가 없기 때문에, 다 자를 수는 없으니 다 살려둔다고 했다.

그러나 이미 경영진과 말이 오갔는지 편집장과 수석기자는 그렇게는 안된다며 개별적으로 사직서를 내라고 했다. 그렇게 찝찝한 마음으로 사직서를 냈고, 전체 기자 중 나와 선배 한 명이 잘렸다. 다른 사람들의 사표는 반려하면서 나와 그 선배의 사직서는 수리하겠다는 말을 들은 날의 비참함과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믿었던 수석기자가 왕도끼로 내 발목을 찍었고, 그날 밤에 다 같이 울며불며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악을 썼지만, 다음 날 다른 기자들은 다 출근하고 나만 자취방에 누워서 갈 곳이 없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나는 IMF가 터지기 두달 전에 잘렸는데, 그 묘한 시점은 IMF 때문이 아니라 내가 일을 못했기 때문에 잘랐다는 메시지를 전해줘 사람을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선배 기자는 우리 중 나이가 제일 많아서 수석기자가 부담스러워했다. 나도 막내기자인데 경력 3~4년차와 나이가 같았으니 역시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렇게 부담스러운 두 사람을, 사장 바뀌고 회사 이름 바뀐다는 명분으로 잘라낸 것이다. 그것도 합법적으로. 내가 낸 사직서였으니 부당해고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1997년 가을에 해고된 후 1998년 가을 비디오 잡지사에 입사하기 전까지 1년간은 정말 내가 경험할 수 있는 이상한 회사는 다 경험해본 파란만장한 1년이었다. IMF로부터 우리나라에 선고가 내려진 게 1997년 12월이었다. 나는 1997년 9월에 잘렸다. 알량한 기자 경력을 갖고 이 잡지사 저 잡지사 면접을 보러 다닐 때마다 왜 그 전 잡지사에서 나왔냐는 질문을 받았고, 정직하게 대답할 수 없어 빙빙 돌려 말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그래서 내겐 IMF 사태가 차라리 반가웠다. 내가 나가고 2호 정도 더 출간되던 우리 잡지는 결국 폐간되고 말았다. 잡지가 폐간되고, IMF협상이 타결된 12월 이후로는 누구도 면접 볼 때 무엇 때문에 회사 관뒀냐고 묻지 않았다. 다 같이 망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의 짧았던 아싸 연예기자 생활은 IMF 사태가 시작되면서 1년 남짓 만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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