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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요 Nov 12. 2019

출판되지 못한 비운의 책 '백댄서의 모든 것'

연예 서적의 저자가 될뻔 했다 못된 썰

잡지사에서 잘린 후 이런저런 연줄과 벼룩시장 같은 구인구직 신문, 천리안이나 하이텔 등의 PC통신(아직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전이었다)을 통해 여기저기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보러 다녔다. 나라 전체가 망한 기운을 뿜고 있던 나날들이었기에 월급을 주겠다는 회사가 드물었고, 혹여 있다고 해도 그런 회사들은 경쟁률이 어마어마했다. 잘릴 때만 하더라도 선배들이 추천해주면 쉽게 어느 자리든 들어갈 줄 알았던 나는, 나를 추천해주는 선배가 없다는 사실에 또 한번 절망해야 했다. 내 성격과 나의 재능도 문제였겠지만, IMF의 깊은 그늘이 드리워지던 시기라 월급 나오는 잡지사가 잘 없기도 했다. 

그러다가 우리 잡지사 선배가 아닌 다른 잡지사 선배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우리 회사 선배들과 라이벌 잡지사에 있던 선배였다. 나는 해외가수 쇼케이스나 음반 발표회, 콘서트 등을 취재하러 가서 업계의 다른 선배들을 만나곤 했다. 그렇게 만난 선배들 중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과는 친해지기도 했는데, 그러면 우리 회사 선배들은 뒤에서 험담을 하며 그 사람 만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어려운 시기에 나를 도와준 사람은 우리 회사 선배들이 아니라 그 선배였다. 


그 선배의 소개로 경향신문 연예기자 출신의 사장님과 일을 하게 되었다. 사장님은 우리 업계에선 네임드였다. 주요 일간지 출신의 연예기자였으니 모르는 사람이 없는 마당발이었다. 사장님은 다니던 신문사를 나와 출판사를 차리고 책을 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나는 유명 락그룹 메탈리카에 관한 책이었고, 또 하나는 백댄서에 관한 책이었다. 

나는 그 회사의 편집자 겸 작가로 채용되었다. 메탈리카는 절정의 헤비메탈 그룹이었는데 우리나라에 한번도 와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그해 처음으로 내한공연이 예정되어 있었고, 책은 그 직후에 나오기로 되어 있었다. 메탈리카에 대한 책은 팝음악 잡지 기자와 음악평론가가 썼고, 나는 그 원고의 교정 교열을 봤다. 다행히도 그 책은 <메탈리카, 그 신화를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춢판된 '메탈리카, 그 신화를 찾아서'


그 다음 책이 <백댄서의 모든 것>(가제)이었는데, 이 책은 내가 편집자로써 뿐만 아니라 작가로써 참여했다. 사장님이 미리 섭외해놓은 백댄서 업체들을 찾아가 인터뷰도 하고 사진 찍고 자료도 모아왔다. 요즘은 백댄서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지만, 당시에는 백댄서라는 말이 일반적이었다. 백댄서로 활동하다 눈에 띄면 가수로 데뷔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책을 쓰기 위해 취재하다 보니 댄서들은 ‘백댄서’라는 말을 불편해 했다. “백댄서라니? 그럼 옆에 서면 옆댄서고, 앞에 서면 앞댄서냐?”라고 응수하곤 했다. 춤을 추는 사람은 그가 어디에 서든 댄서라는 것이다. 

그때 라인뮤직(김건모, 박진영의 소속사로 후에 JYP가 됨), YG 등의 기획사에 직접 가봤고, 그들이 춤추는 스튜디오에서 촬영을 했다. 잡지 기자들은 연예인을 주로 스튜디오에서 보거나 방송국 등의 현장에서 보지, 기획사에서 만나는 일은 잘 없다. 이때서야 나는 기획사들을 직접 가볼 수 있었다. 기획사 외에도 전문 백댄서 업체들도 찾아다녔다. 

대체로 인터뷰는 백댄서 업체(란? 댄스팀을 말한다) 대표들과 했기에 그들의 입지전적인 이야기나 고충을 주로 들었다. 요즘도 latte is horse(나 때는 말이야)가 횡행하지만, 그때도 그랬다. 댄스팀 대표들은 옛날 자기가 춤출 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모든 상황이 정말 좋아진 건데, 요즘 애들은 불만이 많고 근성이 없다고 성토를 해댔다. 아스팔트 위에서, 도로에서 춤을 추고, 돈 한 푼 못 받고 무대에 올라가고, 밥은 굶기 일쑤였지만 춤을 출 수 있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좋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 댄서들에게는 마루바닥이 깔린 스튜디오가 있고, 밥을 공짜로 제공하며, 무대에 오를 때는 출연비도 주는데 왜들 투덜거리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 아이들의 밥값을 대고 춤을 가르쳐주는 게 얼마나 돈과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인데, 그들은 공짜로 이걸 다 누리면서 불만이냐고 했다. 그 말을 들을 때는 맞는 것 같았다. 그리고 대체로 그 댄스팀의 대표 댄서들을 인터뷰할 때는 대표들이 옆에 있었기 때문에 댄서들이 좋은 말만 했다.

그렇게 마무리될 줄 알았던 원고는, 당시 백댄서로는 드물게도 팬클럽이 있었던 한 댄서의 개인 인터뷰를 하면서 내용이 바뀌었다. 그도 대표가 있을 때는 좋은 말만 했다. 그런데 그 댄서의 어린 시절 사진이 필요해서 따로 만나 사진을 받기로 한 날, 그는 포장마차에서 속내를 털어놓았다. 동료와 같이 나온 그는 내가 밥을 사줬더니 대표에 대한 불만을 쏟아놓았다. 대표는 자기가 자비 들여서 춤을 가르쳐주고 밥을 먹인다고 표현했지만,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댄서로 일을 시키면서도 월급 한 푼 안주고, 밥이라고는 허구헌날 라면만 먹인다는 것이다. 댄서들이 받는 돈이라고는 기껏 해야 무대 한번 올라갔다 올 때 교통비 밖에 없었다.

그제서야 나는 이곳이 댄스학원이 아니라 댄서업체라는 걸 깨달았고, 댄스업체 대표는 악덕 고용주라는 걸 알게 됐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다. 오히려 그때보다 더 심해진 것 같기도 한데, 기획사에 캐스팅 되어 7~8년 동안 연습생으로 지내는 게 일반화되었기 때문이다. 90년대까지만 해도 7~8년씩 연습생으로 구르는 일은 없었다. 그 기간 동안 연습생들은 월급을 받나? 아닌 걸로 알고 있다. 단지 데뷔한다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버티면서 시간과 건강과 열정을 불 싸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때와 지금이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다.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아이들이 기획사 사장들에게 잘 보이려하고, 노래 못부르기로 유명한 기획사 사장들이 자기보다 잘하는 아이들 앞에서 가르친답시고 거들먹거리는 꼴도 보기 싫지만, 기본적으로 아이돌과 대표를 가족처럼 묶는 기본 가치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가족 같은 공동체 안에서는 진짜 주고 받아야 할 것들이 하찮은 문제로 무시되곤 한다. 참 나쁜 관습이다. 

그렇게 취재가 끝나고, 내가 원고를 쓰고, 사장님이 직접 원고 교정과 수정을 보고, 교정교열자에게 교정까지 다 보게 한 후, 외주 디자이너에게 사진과 원고를 맡겨 디자인까지 끝냈다. 책을 만들 수 있는 파일이 다 완성된 것이다. 이걸 출력해서 인쇄 넘기면 책이 나온다. 

그런데 우리는 책을 출간하지 못했다. 디자인 상태에서 모든 프로세스가 멈췄다.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출력소에서 교정지를 뽑는데만도 기백만원이 들었는데, 그 돈이 없었고, 이후에 이어질 종이대금과 인쇄비를 댈 돈도 없었다. 무리를 해서 빚을 내면 가능할지 어쩔지를 가늠해보던 사장님은 결국 출판을 포기했다.

내려던 책이 어그러질 정도였으니 월급 역시 주기 쉽지 않았다. 월급날이 차차 밀리다가 결국 나오지 않게 된 지도 여러 날, 사장님이 자기 방을 빼고, 짐을 가져와 사무실에 두고는 숙식을 사무실에서 해결하기 시작했다. 출근해서 사무실 문을 열면 침낭 안에서 부스스하게 자고 있는 사장님을 볼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이니 밀린 월급 달라는 말도 입 밖으로 꺼내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힘들던 시기였다. 동생들이 학비며 생활비 때문에 돈이 필요해 전화를 하곤 했고, 나도 돈이 없다며 전화 끊고 울던 때였다. 그렇게 우울한 날들이 지나고, 어느 날 사장님은 초췌한 얼굴로 우리(라고 해봤자 2명이다)를 불러놓고, 더 이상 월급을 주지 못하겠으니 나가달라고 했다. 나는 마지막 월급은 주셔야 하는 거 아니냐며 매달렸다.

그 월급은 내가 퇴사하고 1년 뒤에 통장으로 입금되었다. 통장에 찍힌 액수와 이름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지만, 그걸 잊지 않고 넣어줬다는 게 고마웠다. 그런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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