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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요 Mar 27. 2023

나는 진짜노동을 하는가, 가짜노동을 하는가?

가짜노동

데니스 뇌르마르크와 아네르스 포그 옌센이 쓴 <가짜노동>은 현대 직장인들이 번아웃에 빠지는 이유를 진짜 노동이 아닌 가짜노동을 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이 책은 무엇이 가짜노동이고, 가짜노동은 우리를 어떻게 좀먹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참여한 대다수의 회원들이 재미있게 읽었다는 이 책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눠봤다.


책에 대한 전체적인 감상

광고회사에 다니는 발제자는 올 1~2월에 너무나 많은 일을 하면서, 야근 할 때까지는 흥분상태에서 열심히 일하지만,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오며 과연 내가 오늘 종일 한 일은 무엇이었나 회의감에 빠지곤 했다. 그때 여성 커리어 커뮤니티에서 이 책을 알게 되었고, '가짜노동'이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실체를 알 수 없었던 자기 기분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을 발제도서로 선정했다고.

프리랜서 Y는 기막힌 타이밍에 기막힌 책을 만났다고 했다. 프리랜서로 살면서 회사 다니는 월급루팡들을 좀 한심하게 보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서 그게 그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들도 원해서 그런 삶을 사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고 했다. 또한 자신이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일하는 이유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직장인 E는 월급루팡의 대표적인 사람이 자신이라며, 현재 회사에 3년을 다녔지만 일한 시간만 따지면 1년 정도 밖에 안될 거라고 자백했다. 어떤 날은 업무일지에 쓸 게 없어서 업무일지 쓰는 게 일이라고 쓰기도 했단다. 너무 일이 없어 상사에게 일을 달라고 했더니, 시즌에 따라 바빠지는 때도 있으니 그때를 대비해서 지금은 놀아두라는 말도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바쁜척 하는 기술을 익혔고, 친구들에게 알려주기도 했다. 이런 것에 대해 내탓을 하며 수치심을 느끼기보단 남탓을 하며 잘 버텨왔다.

연차가 높은 직장인 O는 이 책을 읽으며 낱낱이 해부당하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내가 하는 일이 없어서 짤리면 어쩌지 전전긍긍했는데, 이 책을 읽으며 내가 하는 일이 대표님에게 심리적인 도움이 되므로 짤리지는 않겠다는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자신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MBA를 따와서 자랑하는 친구의 이야기가 듣기 싫었던 것, 대기업 거래처에 점점 직원이 많아지는 이유를 알게된 것도 수확이었다.

프리랜서 J는 올해 읽은 책 중 가장 충격적이었다고 했다. 번아웃이라길래 자기계발서인 줄 알고 읽었다가, 이제까지 자신이 불만스러워했던 것들의 원인과 이유를 알게 되어 개념이 정리된 느낌이었다.

책을 읽지 않았지만, 오랜 직장생활 끝에 지금은 주부인 Y는 직장다닐 때가 주마등처럼 스쳐갔다고 한다. 내가 하는 일이 부자들 배불려주는 일인데, 그런 싫은 일을 하면서도 자신의 쓸모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되서 매일 울고 다녔다고. 가짜노동의 전형이었던 자신이 지금 타지에서 주부생활을 하며 가사노동이야말로 진짜노동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고 했다. 자신도 자신이지만, 월급받는 것으로는 회사 상위 3위 안에 들던 상무님이 느지막이 나와 회의 한건 하고, 점심 약속 나가서 옿 4시 넘어 들어와 보고받고 하던 일들이 떠오른다고 했다.

이직 준비 중인 W는 우리 중 유일하게 이 책에 불만을 표했다. 초반에는 재밌게 잘 읽었는데, 읽을수록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다고. 마지막까지 읽고 보니 이건 현실에서 실현 못할 급진적인 사상이거나 공허한 외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비록 참석은 못했지만 뒤늦게 서면 제출한 K는 자신이 출근 시간 신도림 푸쉬맨에게 밀려서 질식사할 공포와 사무실에서 일이 없다가 왜 퇴근시간만 되면 일을 주는가에 대한 의문을 이 책을 통해 해소할 수 있었고, 현 정부가 노동시간을 후퇴시키는 건 알았지만 그게 무려 150년 전으로 후퇴한 것인줄은 몰랐다는 것. 이번에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가짜노동이 아니라 인공지능에 대체하는 인간의 노동, 즉 노동없는 인간의 삶에 대해 생각할 때라고 생각한다. 책의 13장부터가 해결인데 그 앞은 현재 분량의 1/3으로도 충분했을 것 같아, 나머지 2/3은 책값을 위한 저자들의 가짜노동이 아니었나 싶다고 했다.

팬데믹 3년 간 나의 노동 환경은 어떻게 바뀌었나?

비슷한 상황에 대한 상반된 의견이 있어 재밌었다.

재택근무를 하며 회의가 없어지고, 이메일로 대체되고, 그 흐름이 유지되면서 미팅 횟수가 줄고, 점심 또한 혼밥할 수 있게 되어서 좋다는 J와 맨날 서면 총회를 하다가 사람들을 만나 대면 총회를 하니까 좋더라는 W가 서로 다른 의견이었다.

팬데믹으로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가 약진함에 따라 대본을 써서 데뷔 기회를 잡게 된 J와 반대로 영화 일에 종사하는데 팬데믹 내내 관객이 들지 않는 영화관 때문에, 지금도 관객이 돌아오지 않아 힘든 O가 있었다.

그 외에 코로나로 잡지가 폐간되어 프리랜서로 돌아간 Y, 4시 퇴근하다 사옥을 지어 이사하면서 다시 정시출퇴근하게 된 E 등이 있다.


내가 경험한 가짜노동

이 부분은 다들 너무나 구체적이고 생생한 경험담이 있어 누구의 경험인지 언급없이 써보도록 하겠다.

- 회사 매출에 별 도움이 안되는 PT인데, 중요한 광고주가 하는 PT라 참여하지 않을 수 없어 준비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항상 하는 말은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다. 문제는 이런 일에는 회사에서도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으니까 회사에서 잉여로 취급되는 인력이 투입되고, 그러니 그렇게 투입되는 직원들은 자괴감이 들게 된다. 전형적인 가짜노동이다.

- 일할 때 음악을 트는데, 회사 고위층이 그 음악이 시끄러웠던 모양이다. 갑자기 단톡방에서 음악을 틀지 말지 투표를 하자고 했다. 1:9로 음악틀자는 찬성표가 압도적으로 나왔다. 근데 만장일치가 아니니, 소수자를 우대한다면서 음악을 틀지 않기로 결정했다.(이럴 거면 투표 왜 함?) 이후 회사가 절간처럼 조용해졌다. 그러자 고위층이 다시 음악 틀라며, 시간까지 정해줬다. 당연히 아무도 음악 안튼다. 코미디가 따로 없다.

- 인터넷 쇼핑 이전에 전화주문용 쇼핑카탈로그를 만들었다. 한달에 150P 가량 글을 썼다. 근데 카탈로그를 보고 전화주문하는 건 5%만 전화가 와도 성공한 거다. 나머지 95%는 버려진다. 어느 날 카탈로그를 만들어 낑낑 들고 우체국에 가서 부치면서 나는 아무도 보지 않을 책을 만들어 돈 들여 우편까지 부치며 쓰레기를 양산하고 있는가 현타가 왔다. (그래서 회사 때려침)

- 평생교육에 대한 웹진을 만드는 일(이 책에 따르면 가짜노동)을 받으려고 업체들이 경쟁PT를 한다. 그 업체 선정에 업체들보다 많은 심사위원이 참여한다. 그리고 심사비가 업체주는 돈 보다 더 많을 때도 있다. 

- 모 건설사의 유투브 동영상 광고를 만드는데, 콘티가 다 나와 있었다. 그런데 대본이 필요하다고 해서 100만원받고 대본을 썼다. 수정도 했다. 한달 뒤 나온 동영상을 보니 내가 쓴 대본 중에 살아남은 건 딱 대사 한줄밖에 없었다. 이럴 거면 회사 입장에서 100만원이나 쓰면서 왜 대본 쓰라고 했을까? 어차피 콘티 보고 감독 마음대로 찍으면 되는 거였는데...

- 어느 대회에서 상을 받은 스쿼시 치는 학생의 학부모가 낸 책을 번역한 적이 있다. 이걸 누가 읽을까 싶었다. 역자후기 제목 때문에 편집자와 메일을 주고 받았는데, 편집자도 곧 회사 관둘 거라면서 자기도 경력에 이 책을 넣을 건 아니니 역자님도 프로필에 이거 넣지 않는다 생각하고 부담없이 해달라고 했다.

- 회사에서 책을 낸다고 하여 열심히 스토리를 짜고 원고를 썼다. 내 이름이 저자로 찍혀있는데, 책 스토리 중에 내가 썼던 글은 딱 한줄 남아 있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이럴 거면 내 이름을 왜 썼냐고 했다. 사장님이 다 뜯어 고친 거였다. 이후에는 이런 일이 오면 너무 열심히 하지 않고, 대충만 한다. 어차피 사장님 맘대로 하실 거니까. 

- 광고주님에게 일주일에 한번 제안서를 써서 낸다. 우리가 낸 제안이 괜찮아도 그 제안대로 일을 하지 않는다. 그냥 모기업의 보고일에 맞춰 보고용으로 보내주는 거다. 그렇게 제안서를 쓰면 돈을 받긴 받는다. 하지만 그 제안대로 일을 하고 받는 돈이 아니다. 이 모든 게 그저 제안을 위한 제안, 보고를 위한 제안일 뿐이다. 

- 이사회에서 회의를 많이 하는데, 회의에서 뭐가 결정되는 법도 없고, 결정대로 일을 하지도 않는다. 2시간이나 이사회를 해놓고, 중요 안건은 다음 이사회로 넘기자고 한다. 그래서 다음 이사회를 하면 또 막판에 가서 중요 안건은 다음 이사회로 미룬다. 계속 이런 식인데 이 이사회 회의록을 꼼꼼히 다 작성해야 한다. 이 회의록을 이사회원들에게 발송하면 끝까지 읽어보는 사람도 없다. 보이스오버나 센스리딩 같은 도구로 읽어야 하는데 기술력이 딸려서 메일 중간에 끊긴다. 그러니까 나는 아무도 끝까지 읽지 않는 회의록 작성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셈이다.

- 요즘은 쓰레기 같은 논문과 책이 너무 많다. 한때 책 쓰는 게 꿈이었는데, 그런 책들을 보면서 쓰레기 하나 더하고 싶지 않아 책 쓰겠다는 꿈은 버렸다.


가짜노동을 벗어난 돈벌기, 밥벌이는 가능한가?

우리가 하는 것이 가짜노동이라는 건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래서 대안이 있을까? 이 책에 나온 대안도 부실하기 이를데 없고, 우리 또한 뾰족한 수는 없다. 그래서 기본소득이 필요하다는 주장, 또 가짜노동보다는 진짜노동에 임금을 더 많이 책정하자는 주장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현실적으로 금방 이루어질 해결책은 아니며, 돈을 쥐고 있는 결정권자들의 결단이 있어야 하는 사안이다. 이 모든 것이 시스템의 문제이고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이 혹시 개인의 책임을 전부 공동체(라는 환상)에게 전가하는 것은 아니냐는 의견도 나왔다. 

그런 가운데서도 회사에서 쓸데없는 제안만 하지 말고, 실현이 될만한 제안들을 꾸준히 하고, 그것들을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의 가짜노동을 진짜노동으로 바꿀 수 있지 않겠냐는 의견이 있어 희망적이었다.


<가짜 노동> 

2023년 3월 25일 

J(2), E(2), Y(2), O,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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