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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요 May 22. 2023

외국인이 찍은 한국풍경 같은 책

<H마트에서 울다>

<H마트에서 울다>는 미국인 아빠와 한국인 엄마 사이에 태어난 미셸이 엄마의 암 발병 소식을 듣고 함께 마지막을 보낸 뒤, 엄마와의 추억을 곱씹으며 애도하는 에세이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읽고 추천했을 정도로 유명하다. 인디 밴드의 보컬이기도 한 미셸 자우너는 한국의 요리들을 맛깔나는 표현으로 설명하는데, 그것이 마치 외국인이 찍은 한국풍경 사진을 보는 느낌이다. 우리에게는 너무 익숙해서 하나도 특별하지 않은 음식들이 그녀의 글을 통과하면 반짝반짝 빛이 나며 특별해진다. 미역국을 생일날 먹는 해조류 수프라 하고, 탕수육을 반들반들한 오렌지 소스에 버무린 돼지고기 튀김이라 표현한다. 가족, 음식, 애도에 관한 이 빛나는 에세이를 읽고 누군가는 요즘 부모님의 건강이 좋지 못해 보는 동안 자주 울었다 했고, 누군가는 읽을 때는 안울었는데, 이 모임에서 딴 사람들의 말을 듣다 울뻔 했다고 했다. 

제목에 '울다'라는 동사가 들어가 있는 <H마트에서 울다>를 읽고 우리는 울었나, 안울었나, 혹시 울었다면 어떤 부분에서 울었나 먼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부러 울리려고 하는 느낌이라 지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읽었다는 사람이 있었고, 스웨이드 부츠를 말랑말랑하게 만드느라 엄마가 먼저 신고 다녔다는 장면과 엄마의 엄마 장례식장에서 엄마가 "엄마, 엄마" 부르며 운 장면, 그리고 표제작이자 첫 에피소드인 'H마트에서 울다'를 보고 울었다는 소수 의견이 있었다.

그 중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장면은....

1. 엄마의 암 발병 소식을 들은 그날 새벽에 남자친구 피터가 알바 끝내고 먼 길을 운전해 와서 함께 있어줬던 장면. 그게 미리 미셸의 부모와 논의된 일이었다는 걸 알고 많이들 울었다. 

2. 엄마가 죽는 장면. 어쩔 수 없었다. 대성통곡했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3. 장례식이 끝나고 미술 선생님이 집 앞에 두고 간 편지를 보고 운 사람들도 많았다.

미셸에게 H마트처럼, 나에게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장소가 있다면?

- 어머니를 모신 절에 중 2때 가본 적이 있는데, 잘못 가르쳐주셨는지 찾지 못했다. 이후 등산 할 때마다 절에 간다. 절의 명부전이 신위를 모시는 곳이다. 에 갈 때마다 어머니가 생각난다.

- 백수시절 친구와 함께 새벽 3시쯤 블루투스 마이크를 켜고 망원 한강공원 운동장에서 미친 듯이 노래하고 춤춘 적이 있다. 아무도 없다는 생각에 신나게 스트레스를 풀었는데, 알고보니 밤낚시하던 아저씨가 있어, 그 분이 지나가면서 "노래 잘 들었다"고 해주셨다. ㅋㅋ요즘도 망원 한강공원을 지날 때면 그 친구와 행복했던 그 날 밤이 생각난다.

- 엄마와 단둘이 여행을 갔을 때 소래포구에서 5천원짜리 청어회를 먹었다. 꼬들꼬들하고 맛있었다. 어쩌다 보니 엄마와는 수산시장이나 새우젓 사러 자주 다녔는데, 그러다보니 수산시장만 보면 엄마 생각이 난다.

- 친한 형이 희귀병으로 죽었다. 그때는 사실 무슨 병인지도 몰랐고, 병문안 가서 "다음에 또 올게"하고 왔는데, 그러고 1주일만에 죽었다. 그 형이 한때 문화재해설사 자격증을 딴다고 창경궁에서 문화재 해설을 했고, 우리가 가서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창경궁에 가면 항상 그 형이 떠오른다.

- 코로나 중에 엄마와 제주도에 여행 갔는데, 카톨릭 신자인 엄마는 성이시돌 목장에 꼭 가보고 싶다고 하셨다. 땡볕에 정말 힘들게 찾아갔고, 그래서 그 목장에서 마신 아이스아메리카노와 빵이 넘 맛있어서 수혈받는 느낌이었고, 그곳에서 묵주 팔찌도 샀다. 엄마 생각하면 성이시돌 목장이 떠오른다.

- 어릴 때 살았던 집 뒷마당에 모란이 피었었는데, 어릴 때 나는 모란이 참 못생긴 꽃이라고 싫어했다. 그러다 성인이 되어 서울로 올라와 운현궁에 갔을 때, 뒷마당에 6월의 모란이 탐스럽게 피어있었다. 그때 처음 모란이 예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자연스럽게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그 집이 엄마와 살았던 마지막 집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어떤 사람인가? 미셸처럼 객관적으로 표현해보자.

이 질문에 대해 우리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나눴는데, 부모 중 잘 맞는 사람에 대해서는 객관적으로 관찰하지 않으며, 주로 안맞거나 사이가 나쁜 쪽에 대해 자꾸만 생각하고 관찰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여기 나온 어머니들이 자식과 사이가 나빴다는 말은 아님)

- 울 엄마는 시골소녀 같다. 마음에는 순수한 감성이 있는데, 표현이 거칠다. 상주 출신이라 그런지. 언젠가 내가 독립하는 것에 대해 "손에 잡고 있던 새가 날아가는 느낌"이라는 표현을 했는데, 그걸 들으며 그런 마음이 들었다. 속은 부드럽고, 표현은 거칠어, 속은 단단하고 표현은 부드럽게 하는 나와 상극이었다.

- 울 엄마는 카피라이터 같다. 교회에서 집사님들이 어떤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중구난방으로 수다스럽게 하고 있으면 엄마가 딱 한 마디로 정리해준다. 언젠가는 내가 모르는 게 많아서 큰일이라고 했더니 엄마가 "아는 건 힘이고, 모르는 건 약이랬다. 약이 더 도움이 되지 않겠니?"라고 하셔서 내 걱정을 가라앉혔다.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발언도 자주 하시고, 아마 요즘 시대를 살았더라면 카피라이터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 울 엄마는 미셸의 엄마처럼 남들에게 보여지는 면을 신경 많이 쓰는 분이다. 얼마 전까지도 긴 생머리를 고수할 정도였는데, 20대 시절에 엄마와 함께 백화점에 가면 사람들이 "언니냐?"고 묻기도 했다. 나는 그게 듣기 싫었는데, 엄마는 좋아했던 것 같다. 초콜릿을 좋아해서 딸인 나에게도 주지 않고 숨겨놓고 드신 적이 있는데, 그것도 싫어했다. 지나고 생각해보니 그 시절 엄마는 직장을 다니며, 살림 살며 아빠 없이 우리 형제를 건사하느라 정말 힘들었을테고, 자기 꺼라고는 그 초콜릿 밖에 없었을텐데 나는 그것조차 싫어했었다니 철이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미셸은 한국요리를 하며 엄마를 애도한다. 나에겐 어떤 애도 방식이 있나?

- 글을 쓰는 사람에겐 글을 쓰는 게 애도다. 나는 엄마와 나의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썼다. 그 시나리오를 쓰면서 아빠에 대한 미움도 좀 사그라들었고, 엄마의 죽음에 대해 털어버릴 수 있었다. 내 나름의 애도였다.

- 결혼하지 않은 막내삼촌이 돌아가셨다. 근데 카톡 목록에서 막내삼촌의 프로필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한번씩 카톡을 열어볼 때마다 보곤했다. 아빠도 그러셨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날 그 프로필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아마도 삼촌의 전화번호가 다른 사람에게 간 것 같았다. 그때 우리의 애도가 끝난 것 같았다.

- 동생이 누워있었을 때 제발 일어나게 해달라고 열심히 매달리고 기도했는데, 한편으로는 이런 일이 있어야만 기도하는 내 자신에 대해 부끄러운 감정이 있었다. 그래서 이후로는 수시로 가족의 건강을 빌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나쁜 일이 있을 때 기도하는 게 아니라 평소에 기도하기로 했다.

- 할머니가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그때 나는 서울에 있었는데, 하필 핸드폰 배터리가 간당간당하다가 그 전화를 받는 순간 배터리가 나갔다. 사실 그 순간에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도 아닌데, 어쩐지 그렇게 느껴져서 이후로는 항상 보조배터리를 들고 다니며 핸드폰 배터리가 떨어지지 않게 신경 쓰고 있다. 그것도 애도라면 애도일까?


좋은 에세이는 나의 경험과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이 책의 어떤 부분에서 나의 어떤 기억을 떠올렸나?

- 미셸의 엄마가 돌아가신 후 이모와 이모 아들이 함께하는 장면을 보며 미셸은 더 이상 자신이 엄마와 함께 뭘 할 수 없다는 걸 깨닫는 장면이 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이 없었는데, 그때는 잘 몰랐다가 나이가 들면서 이모의 아들딸들이 늙은 이모를 부축하거나 몸 좀 조심하라고 잔소리하는 장면을 보면서 나는 저런 걸 해본 적이 없구나, 앞으로도 못해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더 북받친다.

- 미셸이 피터의 할머니 집에 갔다가 김치냉장고에서 사진이 발견되는 장면에서, 미셸은 어린 자신을 찍었던 엄마의 카메라를 떠올린다. 그 부분을 보면서 우리는 함께 찍은 사진이 너무 없어 후회되었다. 미셸은 그 사진을 보면서 가슴이 아프지만, 실은 떠올릴 사진이 없는 게 훨씬 더 가슴 아프다. 

- 장례식이 끝나고 미셸과 아빠는 여행 갔다가 싸운다. 그때 아빠는 "네 엄마가 나한테 경고하더구나. 네가 날 제멋대로 휘두르게 두지 말라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려고 죽은 사람 입까지 빌렸다. 울 아빠도 그랬다. 고등학생이었던 나에게 "니 엄마가 그러더라, 니들은 에고가 강해서 이기적이라고" 그때 진짜 뚜껑이 열렸다. 에고라는 말도 잘 모를 때 그런 어려운 단어 써가며 자식을 비난하는 부모라니. 이후 나는 우는 할머니 꼴보기 싫어 늦게 퇴근하는 아빠에게 긴 편지를 써서 "당신 마음대로 하시라. 하지만 내가 똑똑히 지켜보고 있다. 아빠가 할머니처럼 늙었을 때 내가 고대로 되갚아주겠다"고 했다. 그날 어찌나 일찍 퇴근하셨던지.

- 엄마가 아플 때 잣죽을 끓여주려고 노력하는 미셸을 보면서, 중학교 1학년 때였나 엄마가 아팠을 때 냉장고에서 굴을 꺼내서 굴전을 부쳤던 기억이 났다. 제사 지낼 때 엄마가 전부치는 걸 자주 봤기에 처음 해보는 요리였지만 할 수 있었다. 이후로도 엄마는 그 굴전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 


- 가장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던 부분은 123p 엄마가 차려준 음식을 미셸이 먹는 부분의 묘사였다. 

나는 행복한 마음으로 손바닥을 쫙 펴서 거기에 상추 한 장을 올려놓고 내 식대로 음식을 착착 쌓았다.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갈비 한 조각, 따끈한 밥 한 숟가락, 쌈장 약간, 얇게 저민 생마늘 한 조각을 차례차례로. 그런 다음 그걸 얌전하게 오므리고 입에 쑥 집어넣고는 눈을 감고 우적우적 씹으면서 맛을 음미했다. 몇 달 동안 굶주린 내 혀와 위는 그제야 깊은 만족감을 되찾았다. 밥 자체만으로도 경이로운 재회였다. 밥솥에서 고슬고슬하게 지은 밥은 밥알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내가 기숙사에서 생존을 위헤 먹던 찐득한 즉석밥과는 차원이 달랐다. 엄마는 내 반응을 살피려고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맛있어?" 엄마는 김 봉지를 뜯어 내 밥그릇 옆에 놓았다. "진짜 맛있어!" 나는 입안에 아직 음식이 반쯤 남은 상태로 연방 쓰러질 듯한 시늉을 하면서 대답했다. 엄마는 내 뒤 소파에 앉아, 내가 걸신이라도 들린 듯이 어귀어귀 먹는 동안 얼굴 쪽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어깨 뒤로 걷어주었다. 내 몸에 닿는 엄마 손길이 친숙하게 느껴졌다. 

이 글을 보고 누군가는 내가 많이 뚱뚱해지기 전의 어린 시절 엄마가 나를 먹이며 기특해했던 그 밥상을 떠올렸고, 누군가는 엄마가 해준 특별할 것 없는 잔치국수를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망치여사 유투브처럼 내 식생활에 도움을 주는 유투브를 하나씩 추천해봅시다!

플랜디 https://www.youtube.com/@plan_d

집나간 아들 https://www.youtube.com/@Runaway_son

하루한끼 https://www.youtube.com/@onemealaday767

강쉪 https://www.youtube.com/@user-nz8lo4cy8z

푸드스토리 https://www.youtube.com/@foodstory95

매일맛나 https://www.youtube.com/@deliciousday1

전서소가 https://www.youtube.com/@dianxixiaoge

DoughertyDozen https://www.youtube.com/@DoughertyDozen


H마트에서 울다 (미셸 자우너 지음 | 정혜윤 옮김 | 문학동네)

2023년 5월 13일 오전 10:30

상암이안오피스텔 18**호

참석자 _ 옥, 정, 달, 은, 예, 우, 진, 정, 광 (9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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