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토스카나 3- 까먹기 전에 정리하는 토스카나 와인이야기
토스카나-입술만 살짝 적셔 본 이탈리아 와인의 세계
-까먹기 전에 정리하는 토스카나 와인이야기-
유럽여행계획을 주변에 이야기했을 때, 지인인 변호사 A는 유독 부러워하며 동선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신혼여행을 이탈리아 와인투어로 대신할 정도로 와인에 진심인 그는 (소문에 의하면 지금도 월급의 반을 주택담보대출이 아닌, 와인을 구매하는 데 소비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토스카나에서 6일 간 머무를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자 꼭 가야 할 와이너리, 그리고 한 번쯤 마셔봐야 할 와인 라벨들을 속사포같이 쏟아냈다. 당시 내게 와인이란 '있으면 아주 좋고 없으면 어쩔 수 없는' 정도의 존재였기에, 그의 정성스러운 추천은 아무 의미 없는 단어의 나열일 뿐이었다.
로마, 피렌체도 당연히 그렇지만 토스카나 지역은 와인을 조금이라도 알고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이대로 눌러앉아버리고 싶을 천국일 게다. 자동차를 타고 어디를 가든 양옆으로 펼쳐지는 포도밭. 소도시의 좁은 골목골목을 가득 채운 에노테카(Enoteca, 와인을 시음하고 판매하는 숍). 그리고 그런 와인들이 모두 이탈리아를 넘어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와인이라는 사실까지.
토스카나 소도시 탐방을 시작한 첫날까지만 해도 우리는 꿋꿋하게 '저희는 와인 잘 몰라요~ 이대로 살 거예요~'라는 식의 오기를 부렸다. 하지만 소도시 중 첫 목적지였던 오르비에토에서 그 작은 도시의 곳곳에 자리 한 와인샵과 에노테카들을 본 뒤 생각을 고쳐 먹기로 했다. 로마 여행을 위해 그렇게 밤을 새워가며 로마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해 놓고서, 와인이 주 산업이고 핵심 문화인 토스카나의 소도시들을 방문하면서 와인에 대해 배우려 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부자연스럽지 않은가! 사실 이 각성은 그날 오르비에토에서 구매한 20유로 정도의 와인이 특별히 맛이 있었던 덕분이었다.
그렇게 중부 이탈리아 지역 7개 소도시들을 방문하며 와인 초보 둘이서 열심히 읽고, 귀동냥하고, 또 마셔본 뒤 기억에 넣은 토스카나 와인 이야기를, 오로지 내가 까먹지 않기 위해 정리해 본다.
1. 이탈리아 와인은 DOCG를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DOCG는 Denominazione di Origine Controllata e Garantita, 직역하면 '통제되고 보증된 원산지 명칭의 와인'으로, 이탈리아 정부가 인증한 최고 등급의 와인을 말한다. 2025. 1. 기준 이탈리아 전역에서 78개의 와인만이 DOCG 인증을 받았고, 그중 무려 11개가 토스카나 지역에서 생산된 와인이다. 와인 고르기를 어려워하는 나도 일단 와인병 목에 'DOCG'라고 적힌 띠지가 있다면 조금 안심이 된다.
2. 토스카나 지역 와인이 DOCG 인증을 받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산지오베제 포도 품종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DOCG 인증을 받기 위해서는 우선 지역별로 지정된 포도 품종을 써야 하고, 숙성 방식과 기간 역시 엄격한 기준을 따라야 한다. 토스카나 지역에서는 산 지오베제(San Giovese, 제우스의 피)라는 포도 품종을 써야만 DOCG를 받을 수 있다. 우리는 우연히 토스카나의 가장 유명한 DOCG 인증 와인들을 모두 접해 보았다.
- Chianti Classico 키안티 클라시코 : 피렌체와 시에나 사이 구릉 지역을 키안티라고 부른다. 와인 병 목에 DOCG 인증과 함께 검은 수탉이 그려져 있는 바로 그 와인. 산지오베제 포도를 80% 이상 쓴다.
- Brunello di Montalcino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 100% 산지오베제 포도로 4년 이상 숙성한 와인. 이 와인을 생산하는 몬탈치노는 에트루리아 시대부터 와인을 제조한 역사를 갖고 있다. 작은 도시 전체가 에노테카, 치즈, 프로슈토 전문점 등으로 가득 차 있어 아마 와인 애호가들의 토스카나 최고 성지가 아닐지?
- Vino Nobile di Montepulciano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치아노: 산지오베제 포도를 70% 이상 쓴다. 몬테풀치아노는 빌도르챠, 발키아나 사이에 걸친 해발 600m의 고지에 있어 도시 전체가 포도밭을 바라보는 전경이 압도적이다.
3. 토스카나에서 같은 포도 품종인 산지오베제를 사용하면서도, DOCG의 이런 엄격한 인증방식에 반기를 든 것이 바로 슈퍼 투스칸이다.
DOCG 인증제도 덕분에 이탈리아에서 생산되는 와인의 품질은 어느 정도 보장이 되었으나, 포도 품종, 숙성 방식, 생산 지역 등 엄격한 요건들로 인해 와인 생산에 창의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환경이 되었다. 1960~70년대 토스카나 지역의 와인생산자 중 일부가 기준에 맞지 않는 방식으로 와인을 생산했고 DOCG 인증도 받지 못했지만, 오로지 맛으로 평가받아 지금은 토스카나 와인 중 슈퍼 스타가 되었다. 토스카나 와인 이야기 중 가장 흥미진진하게 읽은 것이 슈퍼 투스칸 와인이야기다. 의도적으로 기존의 방식을 어기고 생산한 뒤, 맛과 품질로 인정받은 반항아 - 완전 멋져! 그런데 사시카이아, 티냐넬로, 솔라이아 같은 슈퍼 투스칸 와인들은 너무 비싸서 결국 맛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여행에서 돌아와 A를 다시 만난 날, 그는 흥분하며 어떤 곳이 가장 좋았는지가 아니라 어떤 와인이 제일 맛있었는지부터 물었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한 달을 보낸 내가 어떻게 아직도 와인에 빠지지 않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정말 아쉽게도 여행 후 갑자기 와인의 세계에 눈을 뜨는 반전은 없었다. 하지만 거리, 식당, 시장 어디든 와인으로 가득한 곳에서 보낸 시간 덕분인지 1년이 지난 지금도 둘 다 토스카나의 와인 정도는 자연스럽게 읊을 수 있다.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의 몬탈치노에서 함께 올랐던 성벽과 그 작은 도시의 거리를 빼곡히 채운 에노테카들.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치아노'의 몬테풀치아노에서 방문했던 끝내주는 포도밭 뷰의 카페.
'키안티 클라시코'의 키안티 지역 언덕 정상에서 360도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자신의 포도밭을 자랑스럽게 설명하던 숙소의 호스트 지오반니.
여행 전 내게 어떤 의미도 없는 단어의 나열일 뿐이었던 지명과 와인 라벨들이 이제는 그 지역 자체의 기억과 함께 입에 머물며 잊기 힘든 단어가 되었다. 이렇게 경험이 취향이 되는 과정, 여행이 부리는 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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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갑내기 변호사커플, 때로는 집 안까지 타인의 삶을 가지고 들어오는 우리가 오로지 ‘우리’를 위해 보낸 66일의 기록. 같은 곳의 기억을 한 명은 글로, 한 명은 사진으로 담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