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취향여행 - 그와 나의 여행 준비 방법

잠깐 딴소리

by 김숲


잠깐 쉬어가는 딴 소리 - 그와 나의 여행 준비 방법


66일의 여행이 절반쯤 지났을 때, 여행을 준비하는 그와 나의 방법이 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어떤 곳을 가든 일단 지도를 보고 전체 그림을 그린다. 반면 나는 그 장소의 역사적인 배경부터 찾아본다.

사실 한국을 벗어나 다른 나라를 방문한다는 것은 꽤나 벅찬 경험이다. 순식간에 지리도 기후도 언어도 문화도 다 다른 세상으로 떨어진다. 오로지 여행을 위해 그 나라의 언어를 배울 수는 없는 노릇이고, 여행자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이 바로 그 나라의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


한국이란 나라만 해도, 그냥 한국에 방문해서 주요 관광지를 보는 것만으로는 한국은 아시아의 국가들 중에서 왜 이렇게 경제가 발전했는지, 한국과 중국, 일본의 관계는 왜 지금과 같은 것인지, 한국은 어쩌다 대통령을 두 번이나 탄핵하였는지, 왜 한국의 촛불시위는 이렇게 민주적인지, 왜 모든 것이 이렇게 서울 중심인지, 서울에는 왜 아파트가 이렇게 많은지, K-Beauty는 왜 이렇게 유명한 것인지가 설명되지 않는다.


과거 일제 강점기부터 군사주의 정권에 의한 산업화, 그 이면의 정치 탄압과 노동 착취 등 인권 침해, 제대로 된 과거 청산 없이 빠른 경제 발전 속 성과주의가 우선된 배경, 지독한 경쟁사회 속 수도권 집중, 주거 공간의 자산화 현상, 그리고 외모, 학벌 지상주의 등장 같은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맥락을 알고 나면 그 나라의 모든 것이 입체적으로 이해된다.


베를린의 주요 관광지는 주로 나치 시절의 홀로코스트나 동ㆍ서 베를린 분단과 관련된 곳들이다. 히틀러의 등장과 이후 세계대전을 거치며 패망한 독일의 분단의 역사, 연합군이 점령했던 서독과 소련이 점령했던 동독의 복합적인 정체성이 합쳐진 가난한 수도 베를린에서 역시 가난한 예술가들이 자리를 잡아 작업을 하면서 지금의 힙스터 도시 베를린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빈티지 숍만 방문한다는 것은 내게는 너무 아쉬운 일이다.


KakaoTalk_20251026_202721717_01.jpg 베를린을 이해하기 위해 참고 했던 책들 중 일부, 더 많지만 수화물 무게때문에 처분하고 온 책들도 많다


우리 두 사람 다 서로 말하지 않아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전에 항상 책이나 영상을 통해 그 나라 그 도시의 역사로 전체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그 수많은 배경 중에서 각자에게 흥미롭게 다가오는 지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본다. 그 대화에 기반해 내가 폭풍 리서치를 한 뒤 그의 취향 나의 취향에 따라 꼭 가야 할 곳들을 제안하면 그가 그에 맞추어 전체 지도를 보고 그 도시에 머무는 기간 동안의 동선을 짠다.


여행 전 각자 생업에 쫓겨 각 도시에 대한 깊은 이해는 하지 못한 채 여행이 시작되었고, 매번 새로운 도시에 갈 때마다 그는 밤늦게까지 옆에 지도를 펼쳐 놓고 동선을 연구했다. 사실 나는 지도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그 도시의 특징을 이해할 수 있는 역사적 배경을 팠다. 분명히 좀 다른 데, 또 비슷하기도 한 우리의 모습 - 이 공부(?) 방법...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은데... 그러다 생각났다. 어, 이거 뭔가 법학 공부랑 비슷해!


변호사시험을 치기 위해서는 로스쿨 3년 안에 7법 (헌법, 행정법, 민법, 민사소송법, 형법, 형사소송법, 상법) 공부를 마쳐야 한다. 처음에는 한 과목 한 주제를 근근이 공부하다가 3학년이 되어서야, 방대한 양에 압도되지 않고 중심을 잡기 위해 항상 목차를 보며 내가 외우고 있는 판례나 법리가 전체 그림 속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목차를 외우는 것은 전체 세부 내용을 다 외우는 것보다 쉽고, 일단 목차로 중심을 잡으면 그 옆으로 뻗어나가는 가지들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기 마련이니까.


변호사가 된 이후 로스쿨 학생들을 만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늘 ‘하나의 법리에 매몰되지 말고 전체 그림을 봐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었는데, 여행을 할 때에도 이미 우리가 각자의 방식대로 그 방식을 접목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모든 역사적 문화적 디테일을 다 알 순 없으므로 전체적인 맥락을 간신히 그리는 정도였지만, 각 도시들의 특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결국 공부도 여행도 같다. 특정 장소, 특정 인물 하나에만 매달리면 시야가 좁아진다. 전체 그림을 그리되 그 안에서 나의 취향에 맞는 지점을 찾아 나서는 길 – 그게 우리가 갈고닦은(?) ‘전체에서 길 찾기’ 기술이자 고대-중세-근대-현대를 관통하는 우리의 이번 여행의 중심을 잡아 준 방식이었다.


피렌체 이야기를 풀어놓기 전, 기억을 상기하기 위해 여행에서 적었던 일기장을 보던 중 “전체적 역사 + 전체 지도 = 법학이랑 비슷한데?”라는 메모를 보고 이렇게 딴소리를 해 보았다. 중세로 시간여행을 한 것 같은 토스카나 소도시 탐방을 거쳐 르네상스가 시작된 도시 피렌체 입성을 앞두고도 둘이서 얼마나 재미있게 예습을 했는지. 다음 편에서부터는 피렌체 이야기를 풀어본다.


-----------------------------------------------------------------------------------------------------------------

동갑내기 변호사커플, 때로는 집 안까지 타인의 삶을 가지고 들어오는 우리가 오로지 ‘우리’를 위해 보낸 66일의 기록. 같은 곳의 기억을 한 명은 글로, 한 명은 사진으로 담습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