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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 와인 한 잔과 책 한 권의 완벽한 마리아쥬

이탈리아 피렌체 2

by 김숲

피렌체 - 와인 한 잔과 책 한 권의 완벽한 마리아쥬


다른 도시로 갈 때마다 그곳의 독립서점을 찾아다닌 세월이 15년이 되어간다. 특히 매년 세네 차례 국외 출장을 가는 덕에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각 국 각 도시의 보물 같은 서점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낯선 도시에서 나의 취향에 맞는 곳 하나를 지도에 남기는 과정은 쉽지 않다. 구글 리뷰에서 좋아 보여 기대감 가득 안고 찾아갔지만 개성이 없는 서점이라 실망한 적도, 출장 일정에 쫓겨 공항 가기 직전 겨우 들렀는데 예정에 없던 휴무였던 적도, 서점의 분위기나 큐레이션은 너무 좋은데 직원이 불친절해 기분이 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취향에 맞는 서점을 찾을 때의 반가움, 서점이 있는 동네 자체의 재발견 같은 즐거움이 워낙 크기 때문에 어느 곳을 가든 그곳의 서점부터 찾게 된다.


그러다 보니 내게 어떤 도시의 첫인상은 바로 ‘얼마나 다양하고 개성 있는 책방들을 보유하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웬만하면 미리 동선을 짜는데, 출발도 하기 전에 김샐 때가 바로 그 도시에 대형 체인 서점 한 두 개 외에 딱히 이거다! 싶은 서점이 없을 때다. 그런 곳은 종이책을 읽거나, 책방에서 책방지기의 추천이나 큐레이션을 따라 천천히 보물 찾기를 하는 문화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이 번 두 달간의 여행을 앞두고 동선을 짤 때도 각 도시의 책방들을 미리 찾아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고, 여행 도중에도 이틀 혹은 삼일에 한 번씩은 꼭 새로운 서점을 가보았다. 로마는 도시의 크기와 명성에 비해 개성 있는 독립서점이 많지 않아 사실 조금 실망스러웠고, 베를린은 언어별 주제별로 특별한 서점들이 정말 많아서 다 방문하지 못한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빈도 잘츠부르크도 특색 있는 서점 하나씩은 지도에 남겨 두었다. 그런데 여행이 끝난 지금까지 생각나고 그리운 책방들은 어쩐지 모두 피렌체에 있다.


HJ_03195.jpg 첫인상부터 설렘을 준 피렌체


이 (상대적으로) 적은 인구의 작은 도시에 도착하기도 전에 ‘꼭 가봐야지’라고 표시한 서점이 다섯 곳이었다. 그중 두 곳은 이미 자세히 글을 쓴 적이 있지만 나머지는 동선이 애매해서 내 기억과 지도 속에만 고이 넣어두었다. 취향여행 피렌체 편을 정리하며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싶은 한 곳까지 모두 꺼내본다.


오늘 소개할 피렌체의 서점들은 공통점이 있다. 모두 서점과 함께 카페 혹은 식당을 운영한다는 점, 그리고 그곳에서 와인을 판다는 것이다. 한 곳은 와인셀러가 책방지기로 변신한 만큼 책방 한편이 내추럴와인으로 가득 차있었다.


서점에서 책만 팔면 온전히 책에 집중하게 된다는 특장점이 있다. 판매해야 할 책에 음식냄새가 베거나 커피 같은 음료가 묻는 것도 조심스럽다. 그런데 어찌 피렌체의 책방들은 한결같이 책에 와인과 커피, 음식을 곁들이는 것일까?


이곳 서점들에는 낮에도 자리에 와인 한 잔을 두고 책을 읽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말 그대로 책이 안주인 셈이다. 책이 스트레스나 의무가 아니라, 입맛을 돌게 하는 매력적인 무언가이기 때문에 가능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읽고 있는 이 책 혹은 방금 산 이 책이 마음에 숙제처럼 남아 있다면 음식이 제대로 들어가겠는가.


피렌체를 생각하면 두오모나 우피치미술관, 베키오다리 같은 명소보다 숙소 앞 화가 밥아저씨, 아래에서 볼 Todo Modo와 Brac의 책방지기 같은 사람들이 자꾸 떠오른다. 이미 로마에서 고대유적에 감탄하고 토스카나 소도시들이 간직한 중세 그대로의 도시 형태를 거쳐 피렌체에 와서인지, 도시 자체와 그 안의 건축물이나 예술품의 아름다움보다는 이 특별한 도시에서 특별한 공간을 운영하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각각의 개성에 좀 더 영감을 받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


피렌체에서 만난 서점들은 맛있는 채식식당과 책방을 찾아다니는 것이 삶의 큰 낙이자 취미인 나에게 이 두 가지가 합쳐질 수 있다는 아이디어와 함께, 또 다른 삶에 대한 하나의 모델이 되어주었다. 조용히 책을 읽고 싶고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건강한 음식과 맛있는 와인, 커피를 앞에 두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편안한 공간. 현생이 나를 너무 힘들게 할 때마다 피렌체의 이 서점들을 생각하며 언젠가 이런 공간을 운영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 피렌체에서 책과 와인, 맛있는 음식의 완벽한 페어링을 경험하고 싶다면…


1. BRAC


2009년 와인 애호가와 비건 셰프가 함께 오픈해 15년째 성공적으로 운영 중인 복합문화공간이다. BRAC이란 이름은 Book(책), Recipes(조리법), Artists(예술가), Cooking(요리)의 첫 글자를 딴 것으로, 예술 서적과 예술 작품을 전시, 판매하며 동시에 채식 카페와 식당을 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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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노 강변에 한적한 골목가에 숨어 있는데, 막상 들어가면 꽤나 넓어 구석구석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책 큐레이션은 주로 사진, 영화, 도록 등 예술 서적 그리고 세계 각 국의 요리 서적이다. 이곳의 하이라이트는 비건 셰프가 선보이는 저녁 식사다. 시즌별로 달라지는 4가지의 샐러드, 6가지의 파스타, 7가지의 특별 메뉴 중 자신이 원하는 조합을 고를 수 있는 디너플레이트 메뉴는 우리가 이번 여행 중 방문한 서른 곳 이상의 식당 중 최고로 꼽을 정도로 훌륭했다. 언젠가 내가 이런 공간을 운영하게 된다면 가장 많이 참고하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물론 책 큐레이션은 좀 많이 다르겠지만!


HJ_03546.jpg BRAC의 시그니처 비건 디너플레이트

주소: Via dei Vagellai, 18/R, 50122 피렌체 이탈리아


https://brunch.co.kr/@tripterian/4


2. Todo Modo


2013년 출판업자, 서점종사자, 와인셀러 다섯 명이 합심하여 오픈한 책방.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에서 불과 도보 5분 거리 고급스러운 상점이 가득한 골목에 위치해 있다. 남미의 대표적인 문학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소설에 등장하는 진실과 허구가 뒤섞인 상상 속의 세계인 ‘Uqbar’라는 이름의 카페가 서점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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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추럴 와인 전문점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와인컬렉션이 다양하고, 실제로 북토크 외에도 와인 시음회도 진행한다고 한다. 소설 위주의 큐레이션에, 영어 책도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어 여행자에게도 활짝 열려 있는 곳이다. 커피나 와인, 안주가 되는 베이커리류는 종일 가능하고 점심시간에는 정해진 시간 동안 간단한 식사까지 할 수 있다. 카페와 책방이 어느 정도 구분되어 있어 음식 냄새나 소음은 전혀 나지 않았다.


HJ_03273.jpg Todo Modo의 트레이드마크 와인 진열장


주소: Via dei Fossi, 15/R, 50123 피렌체 이탈리아


https://brunch.co.kr/@tripterian/7


3. Giunti Odeon- Libreria e Cine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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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서점 위주로 운영하고 저녁에는 무료로 영화를 상영하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이탈리아 전체에서도 유일무이한 영화관/책방이다. 20세기 초부터 극장과 영화관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 지금은 영화관이자 서점으로 변신했다고 한다. 들어가자마자 영화 ‘Pretty Woman’(묵음, 자막)가 상영되고 있는 대형 스크린 앞으로 책장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 모습이 정말 이색적이다. 하루 종일 걷다 힘들어지면 잠시 들러 책도 구경하고, 편안한 극장 좌석에서 쉬어갈 수 있다. 같은 건물 안의 카페는 레스토랑도 겸하고 있어 내친김에 식사까지 해결할 수 있다. 규모가 큰 만큼 서점도 카페도 앞의 두 서점과 같은 소박한 분위기는 아니지만, 1400년대 지어진 르네상스식 대저택의 건축 양식, 그리고 1920년대의 영화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방문할 가치는 충분하다.


HJ_03512.jpg 우리가 방문한 날에는 'Pretty Woman'이 상영 중이었다


주소: Piazza degli Strozzi 2, 50123 피렌체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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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갑내기 변호사커플, 때로는 집 안까지 타인의 삶을 가지고 들어오는 우리가 오로지 우리를 위해 보낸 66일의 기록. 같은 곳의 기억을 한 명은 글로, 한 명은 사진으로 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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