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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라 Oct 30. 2018

나주가 전하는 여유의 힘

전라도, 느림의 미학 - 나주 편

전라도 사람들은 여유가 넘친다


  필자의 나이가 그리 많은 것은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전라도'라는 주제만 나오면 귀가 닳도록 듣던 이야기. 지역감정을 해소하고 화합의 시대로 나아가야 할 21세기에, 저런 색안경을 낀 이야기들에 대해 앞뒤 없이 '옳지 않다'며 부정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전라도 사람들은 느리고, 항상 여유롭고, 게으르다며 놀리던 타 지역 사람들의 이야기가 내겐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다.


가게에서 키우는 고양이마저 느긋했다


  그러나 막상 방문한 전라도의 구석구석에서는 정말로 '여유'라는 것이 넘쳐흘렀다. 강을 흐르는 물도,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도, 그 속의 사람들도 서두르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음식의 맛을 천천히 음미하는 듯했다. 그들에게 있어 느림이란 단순히 느리게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 자체를 즐기며 삶에 녹아들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급할 것도, 서두를 것도 없다. 모든 것이 때에 맞춰 알아서 되고, 사람들은 그렇게 되리란 것을 믿는 듯하다. 전라도는 느리지만 '여유'라는 힘을 가지고 천천히 나아가는 곳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여유'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그저 천성이 게으르다며 비웃을 만큼 그들의 느릿함이 무의미한 것인가. 그들의 여유에는 아름다움이 있었고, 힘이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생활에 바쁘게 움직이려는 우리에게는 없는 것. 전라도에서는 분명한 힘이 있었다.


  친가 증조할아버지의 산소를 벌초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방문하게 된 전라도, 이곳에 도착한 우리를 가장 먼저 반긴 곳은 나주 읍성이었다. 식사를 하기까지 제법 시간이 남은 터라,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읍성 근처의 오래된 건물을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고 있었다


  오래된 허름한 건물들은 외관과는 다르게 속이 꽉 들어차 있는 느낌이었다. 미술광장으로 새롭게 탈바꿈한 폐건물은 주변의 오래된 건물들과 통일된 외관을 유지하면서도 그 속에는 독창적인 자신만의 개성을 담고 있었다. 도저히 영업을 할 것 같지 않을 것 같은 식당들 역시 속을 들여다보면 식사를 하는 사람들로 제법 북적였다. 한적한 나주의 풍경 속속들이 힘차게 돌아가는 사람들의 생명력이 꿈틀댔다.


금성관 주변의 오래된 팽나무들이 인상적이다


  미술광장 저 너머의 맞은편에는 나주 읍성의 객사였던 '금성관(錦城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중앙에서 내려온 관리들이 머물던 금성관은 일제강점기 때 관청으로 사용되다 소실되었는데, 이후 복원을 거쳐 과거의 모습을 다소 되찾았다. 비록 건물은 대부분이 복원되어 예의 그 모습을 잃었지만, 주변의 오래된 나무들이 이곳을 '금성관'이라고 기억하게 도와주고 있었다. 금성관의 내부는 두 개의 객사와 중문, 주변의 담장이 전부였다. 청명한 가을 하늘 때문일까, 빈 공간은 더욱 비어 보이는 느낌이었다. 세월의 흔적이 남아있는 팽나무 주변을 돌아 객사 안을 살펴보기로 했다.


700년 된 팽나무가 객사의 오른편에 있다


  재미있게도, 금성관은 바깥에서 볼 때와 들어와서 볼 때, 그리고 객사에서 밖을 바라볼 때의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반전이라면 반전이랄까, 객사에서 밖을 들여다보자 처음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주변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맑은 하늘, 아름답게 단풍이 져서 알록달록한 주변의 야트막한 산들. 거대하게 자란 팽나무와의 거리도 적절해서 이제야 제대로 팽나무를 감상하는 느낌이었다. 마침 팽나무에 대한 팻말을 보니, 700년을 여기서 자랐다고 한다. 객사를 둘러보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사실, 객사가 전해주는 시간의 맛에 잠시 빠져 주변의 경치를 감상했다.


  슬슬 식사 때가 되어, 우리 가족은 한 곰탕집을 들렀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곰탕집에서는 누구도 서두르지 않았고, 맛있는 곰탕 한 그릇을 먹기 위해 차분히 기다리는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이윽고 자리를 안내받아 앉은 뒤 주문을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음식을 내어줬다.

  곰탕에는 소의 각종 부위가 다양하게 들어있었고, 재미있게도 약간의 고춧가루와 노란 계란 지단이 고명으로 올라가 있었다. 국물은 곰탕답지 않게 매우 맑았고, 검은 그릇 색이 고기색과 비슷해 '수수하다'는 생각이 언뜻 들게 만들었다. 우선 배가 고프니, 생각을 그만두고 맛부터 보기로 했다.


곰탕 한 그릇에서 나주 읍성이 보였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곰탕에는 여태껏 바깥에서 둘러봤던 나주가 온전히 담겨있었다. 곰탕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맑은 국물색, 하지만 국물을 입에 머금으면 가득 퍼져 나오는 진한 향. 자칫 어울리지 않아 보이던 계란 지단도, 고춧가루도 곰탕의 앞서 나가는 맛들을 잡아주며 잘 어울렸다. 고기는 오랜 시간 삶아내어 부드럽게 씹히는데, 긴 시간을 담고 있는 금성관의 객사들을 닮았다는 느낌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밥알의 녹말과 각종 건더기의 입자가 국물에 풀어지자, 국물은 점점 곰탕의 진한 색깔을 되찾아갔다. 한 숟갈 들 때마다 느껴지는 곰탕의 이름에 '나주'가 붙은 것은 정말이지 탁월했다. 겉으로 보기에 수수했던, 하지만 그 안에 비로소 오감을 들이밀었을 때야 느낄 수 있는 매력. 오랜 시간을 튀어 보이지 않게끔 잘 포장해서 담아낸 전라도의 나주는 필자에게 새로운 경험을 줬다.


아, 이게 바로 전라도구나.



멋진 연주를 펼치던 색소폰 악사의 주변에 점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다음 행선지가 있어 식사를 마치고 나주를 돌아서려던 찰나, 한 길거리 악사의 연주를 감상할 기회가 있었다. 유명한 가수들의 곡을 자신만의 색깔로 능숙하게 연주했다. 길을 걷던 사람들을 하나둘씩 멈춰서게 만들던 그 악사는 수수한 옷차림과 평범한 얼굴로 여유롭게 공연을 이어갔다. 평범한 외관 속에 담긴 능수능란함, 나주 읍성과 나주 곰탕에서 느꼈던 그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나주는 자신이 가진 매력을 수수하게 감춘다. 자칫 모르고 지나칠만한 것들 투성이고, 그것을 억지로 강요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곳에 들어가게 되면 비로소 보이는 깊은 맛에 사람들은 속으로 감탄을 자아내었다. 여유와 느긋함 속에서 나주의 매력은 한껏 빛나던 것 같다. 급하게 급하게만 달리며 스스로를 채찍질하던 현대인들은 쉽게 느껴볼 수 없는 매력을 품은 이곳, 나주는 전라도의 '여유'에 자신만의 미학을 능숙하게 풀어내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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