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를 비롯한 여러 이유로 인해 국토종주를 망설인 순간도 있었지만, 자전거와 저의 몸 상태를 간단히 체크하면서 본격적인 국토종주를 결심합니다. 비도 없고 미세먼지도 없는 날, 6월이 가기 전에 국토종주를 떠날 채비를 합니다.
#8. 총길이 220km, 서울에서 문경까지.
* 새벽 4시, 대장정의 길을 나서다
새벽 4시의 이수역 근처,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곧 서울을 비롯한 경기권에 또 비가 내린다는 이야기가 들립니다. 6월이 가까워지면서 장마철이 다가온다는 게 느껴집니다. 이제 더 이상은 망설이지 않기로 했습니다. 일정에 필요한 물건들은 이미 가방에 다 챙겨놓은 상태입니다. 출발 전, 길을 떠날 채비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침대에 몸을 뉘었지만 설레는 마음에 잠이 오지 않습니다. '진짜 가나? 진짜 가는 건가?'라는 생각에 잠이 쉽사리 오질 않습니다. 새벽 1시에 어렵게 잠에 들었지만, 결국 한 잠도 못 잔 채로 새벽 3시에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뜬 눈으로 새벽까지 멀뚱멀뚱 눈뜬 채로 버티다가 잠에 들면, 이렇게 또 출발할 날이 하루 미뤄질 것 같았거든요. 이렇게 잠도 못 잔 채 깨있을 거면, 차라리 자전거를 탄 채로 깨있는 게 나으니까요.
어제 편의점에서 샀던 햄버거 하나와 캔커피를 얼른 먹은 뒤, 옷과 헬멧을 챙겨 입고 자전거와 함께 집을 나섭니다. 일출시간 5시 반, 1시간이나 이른 시간인 새벽 4시 반. 캔커피의 카페인 기운이 슬슬 올라오면서 기분이 들뜨기 시작합니다. 편의점에 잠시 들러 양갱 몇 개와 사탕을 삽니다. 자전거에 올라타 동작역으로 향합니다. 버스 몇 대와 자동차만 지나다니는 일출 전의 거리를 자전거로 돌파하며 자전거와 몸의 상태를 체크해봅니다. 오랜만의 야외 라이딩이라 어색한 감이 있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습니다.
언제나 저의 라이딩 출발지였던 반포 노을카페에서 저의 대장정을 시작합니다.
그렇게 십여 분을 달린 뒤, 저의 라이딩 출발지인 동작역 인근의 노을카페 앞에 도착합니다. 늘 오던 동작대교라 그런지, 아직까지는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 이대로 잠실쯤에서 꺾어서 하트코스를 돌아 집으로 올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요?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짐은 바리바리 다 챙겨서 나왔습니다. 아무래도 조금 더 달리다 보면 실감이 날 것 같습니다.
해가 떴지만 날씨가 제법 흐립니다.
해가 뜰 5시 반이 지났지만, 잠실을 거의 지나가는 와중에도 해가 뜨질 않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안개가 짙게 깔렸는데, 마치 비가 오는 것 같습니다. 고운 비 입자가 공기 중으로 흩날리는 것 같습니다. 하늘도 시종일관 흐린 것이, 비가 쏟아질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비만은 피하려고 지금껏 일정을 미뤄왔는데, 절대 비를 맞을 수는 없습니다. 내심 불안 불안하지만, 이미 길을 나선 이상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남까지 10km, 여기 너머로는 제가 처음 오는 곳입니다.
잠실 너머로 몇 km 정도를 달리자, 잠실철교가 나옵니다. 저 너머로는 제가 처음 가보는 곳입니다. 잠실철교를 지나자 비로소 국토종주를 떠났다는 실감이 나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드디어 떠나는 겁니다. 국토종주를!
* 광나루 인증센터와 아이유 고개, 그리고 팔당댐과 능내역
여정의 시작인 광나루 인증센터에 도착했습니다. 저의 국토종주 1일 첫 인증 도장을 찍습니다.
잠실철교를 기점으로 점점 날씨가 흐려지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안개가 피부에 닿는 것이 비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자전거와 저의 몸이 촉촉이 젖어가다 보니, 어느덧 광나루 인증센터에 도착하게 됩니다. 뚝섬 인증센터를 인증하면 이곳은 인증할 필요가 없지만, 어차피 가는 길에 있으니 겸사겸사 들러서 도장도 찍고 쉴 겸해서 멈추기로 합니다.
도장을 찍으려고 하니, 도장을 찍는 인주가 다 말라버려서 찍을 수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미리 가져온 제 인주를 이용해 도장을 찍었는데, 도장이 다 뭉개져서 사진에서 보이듯이 모양이 엉망입니다. 국토종주 여정의 첫 도장이 찜찜하게 찍히니 아깝긴한데, 뭐... 아쉬운 대로 저렇게라도 찍어서 가야겠죠...
앉아서 물과 양갱을 먹으며 다음 목적지를 찾아봅니다. 다음 목적지는 능내역 인증센터군요. 거리는 대략 22km 정도 됩니다. 능내역에 도착해서 한 번 쉬기로 하고, 남은 양갱을 입에 털어 넣은 뒤에 곧바로 출발합니다. 이른 시간인데도 사람들이 제법 많습니다. 날씨 탓인지 자전거를 탄 사람은 거의 없고, 대부분이 산책이나 조깅을 나온 사람들입니다. 조깅을 하는 사람들을 조심스럽게 피해서 길을 나아갑니다.
그렇게 길을 가다보니, 국토종주 10대 업힐의 첫 번째 업힐인 암사동의 아이유 고개가 나타납니다.
이전 글에서 제가 '국토종주 10대 업힐'에 대해 말씀드렸던 적이 있었죠? 계속 길을 가다 보면, 암사동의 끝자락에 첫 번째로 약 800m의 업힐이 하나 나타납니다. 3단계에 걸쳐 경사가 점점 급해진다고 해서 사람들은 이 업힐을 '아이유 고개'라고 한답니다. 인천에서 부산 방향으로 가는 길을 기준으로 했을 때, 이 업힐은 최약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게임으로 치면, 튜토리얼이죠.
경사도는 사진에서 보시듯이, 마지막에는 8% 정도를 찍습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생각보다 별로 힘들진 않네?'라고 생각했는데, 서서히 경사가 가파르게 변하면서 힘들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여기서 힘을 빼진 말아야겠다 생각해서 천천히 오르기로 합니다. 역시 국토종주의 최약체 업힐답게, 그렇게 힘들진 않습니다. 다만, 평소에 업힐을 전혀 해보시지 않았다면 이곳도 제법 힘들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난이도는 서울대 업힐의 초반부 정도의 난이도라 생각합니다.
하남시 일부 구간은 노면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제법 힘이 들긴 하지만, 정상을 지나니 시원한 다운힐이 반겨줍니다. 다운힐을 빠르게 내려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시를 벗어나 하남시로 들어갑니다. 하남시를 지나면서 자전거길이 조금 나빠지기 시작하는데, 노면의 포장상태나 길의 이어진 정도가 들쭉날쭉입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자전거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데, 남한강 방향으로 진행하는 자전거들은 위쪽에 만들어진 높은 지대의 자전거길을 이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위로 난 일방통행길로 계속 가다 보니, 갑자기 아래로 난 양방향 통행길로 이어지는 내리막길이 나오는 겁니다. 예전에 그냥 길을 따라서 갔다가 전혀 다른 방향의 길이라 왔던 길을 되돌아갔던 기억이 있어서, 비탈진 흙길을 자전거를 메고 내려와서 아래로 난 양방향 통행길로 다시 타고 가기로 합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냥 제가 가던 길로 쭉 가는 게 훨씬 거리도 짧더군요... 보기 편하게 중간에 표지판이라도 하나 만들어주지, 왜 길을 굳이 이렇게 두 갈래로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중간에 하남 스타필드가 등장하는데, 멀리서도 큰 규모가 느껴질 정도로 큰 곳이더군요. 좀 전의 의문이 금방 잊힐 정도였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자전거로 들러서 아이쇼핑도 할 겸 구경해봐야겠습니다.
하남시를 지나자, 남양주시로 접어드는 관문인 '팔당대교'가 앞을 지킵니다. 팔당댐을 지나 능내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야 할 곳입니다. 사진에는 결코 다 담지 못할 자연의 웅장함이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강 위의 대교를 자전거로 지나는 기분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묘하고 신비롭습니다. 눈 앞의 대자연을 온몸에 두르고 자전거를 타는 경험, 이 경험을 위해 국토종주를 하는 것 같습니다.
팔당대교를 오르기 위해서는 지그재그 모양으로 생긴 진입로를 올라가서 대교 옆의 자전거길을 지나야 합니다. 대교에 난 자전거길에는 날카로운 유리조각이나 사고로 생긴 차량 파편들이 흩뿌려져 있어서 노면을 침착하게 보면서 천천히 달려야 합니다. 안개가 꼈음에도 불구하고 바람이 강하게 부는 것은 덤이고요.
거대한 팔당대교의 규모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작아지는 것 같습니다.
잠시 화장실에 들르기 위해 팔당대교 건너의 팔당역 화장실에 도착합니다. 팔당대교 너머로는 남한강 자전거길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이를 기념할 겸 이곳에 저의 흔적(?)을 남기고 갑니다.
사진에는 담지 못했지만, 팔당댐으로 가기 전에 제법 넓게 펼쳐진 식당들과 자전거 전용 횡단보도가 신기했습니다. 초계국수를 비롯해 맛있는 것들을 제법 많이 팔고 있었는데, 너무 이른 시각이라 가게들이 다 문을 닫은 상태라서 먹어볼 기회는 없었습니다.
안개 덕분인지 자전거길의 분위기가 신비롭게 느껴집니다.
지나가며 간판을 보니, 충주댐까지 130km 정도 남았다는 표시가 보입니다. 이때가 약 6시 반이었는데, 제법 많이 탄 것 같은데도 아직 130km나 남았다니... 제 집에서 충주 탄금대까지의 거리가 약 160km로 찍히는데, 그 계산에 따르면 저는 아직 30km 정도밖에 타지 않은 셈입니다. 실제로는 40km 가까이 탔는데 말이죠. 뭔가 좀 이상하지만, 일단은 계속 가기로 합니다. 길도 하남 구간에 비하면 훨씬 잘 정돈된 것 같고, 이런 페이스라면 어렵지 않게 갈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느낀 것이지만, 중간마다 설치된 표지판의 남은 거리가 이따금씩 잘못된 경우나 잘못 설치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그냥 난 길대로 쭉 달리다가 엉뚱한 곳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수시로 길 체크를 계속해줘야 하는 것이죠.
원래 폰 배터리를 아끼려고 지도는 꺼놓은 채로 달렸는데, 이때부터 뭔가 '길을 잘못 들었다가는 망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서 휴대폰을 거치대에 설치한 채로 달리기 시작합니다. 방금 전, 하남 스타필드 근처에서 나온 갈림길에서 당황했던 기억이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거든요.
웅장한 규모의 팔당댐을 지나기 위해서는 터널을 거쳐야 합니다.
팔당댐을 지나기 위해 길을 계속 가니, 사진과 같은 터널이 나옵니다. 원래는 기찻길로 쓰던 곳이라는군요. 기찻길이라면 대부분 평지로 쭉 뻗은 모양일 테고, 어차피 쓰지 않는 철로라면 이를 자전거길로 재활용한다는 아이디어가 참 괜찮다고 느껴졌습니다. 아이디어와는 별개로, 터널 안이 제법 추워서 몸이 으슬으슬 떨립니다. 괜히 터널 안에서는 추워서 빠르게 페달을 돌리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팔당댐과 터널을 지나 멋진 풍경을 감상하며 여유롭게 자전거를 타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능내역에 도착했습니다.
이른 아침의 능내역 인근은 조용한 시골의 분위기입니다.
능내역 인증센터의 도장을 찍고, 근처의 의자에 앉아 양갱과 물을 먹으며 잠깐 풍경을 감상합니다. 출발한 뒤로 약 43km 정도 탄 것 같습니다. 약 20km 단위로 쉬면 될 것 같군요. 인근의 풍경은 참 평화로웠습니다. 닭이 울고, 재미있는 설치 조형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농부들은 농사를 짓고, 관광객들에게 빌려주기 위해 놓인 자전거들이 이슬에 촉촉하게 젖은 채로 가지런히 놓여있습니다. 능내역 역시 과거에는 역으로서 기능하던 곳을 쉼터로 꾸민 곳입니다.
원래 10분 정도 쉴 계획이었는데, 땀과 비로 몸도 젖어있고 햇볕도 없어서 몸이 으슬으슬 떨립니다. 충분히 쉬지 못했지만 움직이지 않으면 감기에 걸릴 것 같아 다시 자전거에 올라탑니다. 그렇게 저는 다음 목적지인 양평군립미술관으로 향합니다.
* 양평군립미술관, 그리고 후미개 고개
두물머리 근처의 다리를 자전거로 건넙니다.
능내역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운길산역 근처의 밝은 광장 인증센터가 나옵니다. 이곳을 지나면 춘천 방향으로의 북한강 자전거길이 이어지는데, 저는 양평 방향으로 직진합니다. 인근의 나무로 된 다리를 건너면 '두물머리'라고 불리는 유명한 곳을 지나게 됩니다. 관광명소라고 하는데, 저는 자전거로 지나가면서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합니다. 사실 구경할 것도 별로 없는 것이, 자전거길을 벗어나 안쪽으로 들어가지 않고서야 안개 때문에 멀리까지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어차피 아침이라 가게 대부분은 영업을 하지 않기도 해서, 그냥 빠르게 지나갑니다.
중간마다 터널과 경춘선역이 굉장히 많이 등장합니다.
양평군립미술관까지 가는 길은 터널과 경춘선역이 번갈아가며 등장합니다. 덕분에 화장실이나 더위 걱정은 절대 하실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비록 이른 시각이라 혜택을 보지 못했지만, 예쁜 카페와 맛집들도 잠깐만 자전거길을 벗어나 보면 금방 닿는 거리에 곳곳마다 있습니다. 특히 터널은 자전거 국토종주길 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경험이었는데, 평소에는 멋진 조명과 음악이 나오는 곳들도 있다는군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여유롭게 카페와 맛집 여행을 목표로 이곳에 들러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터널을 지나다가, 터널 출구 쪽에서 쉬시던 노신사 한 분께서 제게 '파이팅!' 하며 손을 번쩍 들어주십니다. 저 역시 '감사합니다!'하고 우렁차게 답변을 드리고는 속도를 내어 달려봅니다. 슬슬 힘이 부치던 시점이었는데, 덕분에 다시 힘이 납니다. 국토종주를 하며 받은 첫 번째 인사였습니다.
우중충한 날씨와 인적이 드문 미술관의 분위기가 더해지면서 몸의 피로가 점점 심해지는 기분입니다.
그렇게 달리다 보니, 이내 양평군립미술관 인증센터에 도착합니다. 전날 밤을 새운 여파가 슬슬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뭔가 몸이 무겁고, 감기 기운이 슬슬 올라오는 기분입니다. 인근의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라도 마시면서 몸을 녹일 생각이었는데, 코로나 19의 여파와 이른 시간이라는 악재가 겹쳐 영업하는 곳이 보이질 않습니다. 영업시간이 9시부터라는데, 1시간이나 여기서 묶여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죠. 설상가상으로 바람도 제법 부는 바람에, 가만히 있으면 더 추워서 어쩔 수 없이 다음 목적지로 바로 이동하기로 합니다. 당시의 시간이 아침 8시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능내역 인근부터 계속 동선이 겹치던 어르신 한 분이 계셨는데, 누워서 타는 자전거로 자전거길을 다니는 재미있는 분이셨습니다. 이 분과는 중간마다 계속 만나게 됩니다.
양평 도심을 지나 농촌의 국도를 공유해서 지나갑니다.
교통 신호가 제법 많은 양평 도심 인근을 지나 다음 목적지인 이포보 인증센터로 향합니다. 이포보까지는 약 16km 정도로 그리 긴 거리는 아니지만, 슬슬 자동차와 함께 다니는 공도 주행이 많아지는 구간이었습니다. 특히 양평군립미술관을 벗어나 양평 생활체육공원으로 향하는 구간은 자전거길이 공사 중이라 우회로를 이용해야만 했는데, 차량 통행량이 제법 많아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회전교차로 구간은 양보 없이 빠른 속도로 달리는 차량들로 인해 특히나 위험했습니다.
정신없는 양평 도심을 지나 양평 생활체육공원에 잠시 들러 슬슬 무릎보호대를 무릎에 차기로 합니다. 지도를 확인해보니, 이포보 직전에 국토종주의 10대 업힐 두 번째 업힐인 '후미개 고개'가 기다린다는 것을 깨달았거든요. 무게를 약간이나마(?) 줄일 겸, 물 한 통을 완전히 비우고 양갱도 하나 먹고 화장실까지 들렀습니다.
그렇게 자전거길 옆의 멋진 주택들 옆을 따라가다 보면, 갑자기 차량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는 농촌의 공도 구간이 나타납니다. 공도 구간이 나타나면 슬슬 후미개 고개가 등장할 타이밍입니다.
두 번째 업힐인 후미개 고개의 살벌한 '사망사고' 표지판을 지나 무사히 내려왔습니다.
서서히 완경사로 시작하길래 '생각보다 쉽겠구먼?'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눈 앞에 '10% 오르막'이라는 표지판과 함께 갑작스러운 급경사가 나타납니다. 아... 여기서부터 시작이구나... 싶더군요. 10% 경사라는데, 아이유 고개보다 겨우 2% 가파름에도 불구하고 쉽지가 않습니다.
옆으로 차들도 제법 많이 지나가고, 쉬는 구간 없이 계속해서 오르막이라서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습니다. 중간마다 설치된 '사망사고' 관련 표지판 때문에 괜히 쫓기듯이 올라가야 하는 것도 상당한 부담이었습니다. 서울대 업힐의 마지막 구간보다는 훨씬 덜 가파른 경사도처럼 느껴지는데, 지금까지 약 75km를 지나오며 피로가 쌓인 터라 체감 난이도는 훨씬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가장 가벼운 기어를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천천히 정상까지 도착합니다. 중간에 집 밖의 마당에 서서 저를 쳐다보던 한 가족이 있었는데, 이 언덕을 오르는 제가 신기했던 걸까요?
정상에 도착하니, 어떤 여성 라이더 분께서 자전거를 바닥에 눕혀놓고 본인도 함께 주저앉아 쉬고 계셨습니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부분이었습니다. 저 역시 온몸이 땀으로 범벅인 데다 숨도 거칠었거든요. 하지만 이전에 너무 자주 쉬었기 때문에, 여기서 또 쉬어버리면 시간을 너무 지체할 것 같았습니다. 곧장 다운힐을 빠르게 내려와 이포보로 향하기로 합니다.
인증센터 흉내를 내는 버려진 전화부스, 덕분에 내던 속도를 줄이고 말았습니다...
내리막길로 쭉 내려가다가 갑자기 길의 왼편에 인증센터처럼 생긴 버려진 전화부스가 나타나서, 저도 모르게 속도를 줄여서 멈췄습니다. 인증센터가 아니란 걸 알았을 때, 기껏 받아놓은 가속을 줄이니 너무 아까워서 맥이 탁 풀리더군요. 대체 누가 저걸 여기다 갖다 놓은 건지... 저것 이외에도 남한강 국토종주 코스 중에는 유독 저런 가짜(?) 인증센터가 많았습니다.
그래도 중간에 공사 중이시던 아저씨 한 분이 밝게 웃으시면서 '힘내세요!'라고 해주셨는데, 덕분에 힘이 났습니다. 국토종주를 하면서 두 번째로 받은 응원이었습니다.
* 이포보를 지나 강천보로, 그리고 찾아온 위기
개군 레포츠공원의 빙 둘러가는(?) 길을 돌아서 조금 가면, 여주시의 경계와 함께 이포보가 반겨줍니다.
가짜 인증센터(?)를 지나 개군 레포츠공원을 지나면 곧 여주시에 들어섭니다. 서울에서 하남, 양평을 거쳐 여주시에 도착한 것이죠. 개군 레포츠공원을 쓸데없이 돌아서 가는 비효율적인 자전거길에 의문이 생겼지만, 이내 눈에 들어오는 이포보의 웅장한 모습에 다시 힘이 납니다.
이포보 인증센터에서의 인증샷을 남깁니다.
마침 어려운 업힐 하나를 넘은 차라서, 이포보 인증센터에 도착해 잠시 쉬기로 합니다. 하지만 얼른 도장을 찍고 주변에 앉을 곳을 찾아봐도 마땅히 앉을자리가 없습니다. 때마침 배도 고프기 시작합니다. 제가 4시 반에 집에서 나섰고, 이때가 정확히 9시 반이었으니 출발한 지 정확히 5시간 되던 타이밍입니다. 게다가 그동안 먹은 것이라곤 3시에 먹었던 햄버거와 캔커피 하나, 양갱 세 개와 물 한 병이 전부입니다. 5분 이상은 쉬지 않으면서 계속 자전거를 탔으니, 슬슬 배가 고플 타이밍이기도 합니다. 밤을 새우고 자전거를 타서 더욱 피로합니다.
직전에 있던 편의점으로 돌아가서 허기도 해결할 겸해서 쉴까 말까 망설이던 차에, 양평군립미술관에서 만났던 어르신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느리지만 꾸준한 속도로 계속해서 저를 따라오신 것 같습니다. 그렇게 그 분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생겼습니다.
이렇게 생긴 자전거를 '리컴번트'라고 합니다.
어르신께서는 퇴직하시고 자전거를 타려고 했는데, 허리와 어깨가 좋지 않아 고민하던 찰나에 '리컴번트'라는 자전거를 알게 되셨고, 이 자전거로 서울과 경기도 각지를 돌고 계셨습니다. 마침 코로나가 터져서 각종 자전거 모임이 취소되어 한적한 차에, 부산까지 가보자는 생각이 드셨다고 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이런 류의 자전거는 자세가 공기저항을 최소화하는 자세이고, 또 누워서 타는 자전거라 신체에 부담이 적다고 합니다. 하지만 무게중심이 뒤로 빠져있기 때문에 업힐에 굉장히 취약한 것으로 아는데, 저런 자전거로 저도 힘들게 오른 업힐을 넘어오신 셈입니다. 엄청난 양의 짐들을 실은 상태로 말이죠. 게다가, 어르신께서는 부산에서 다시 서울로 오실 때도 자전거를 타고 오신다고 합니다. 이런 자전거는 실을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는 하시지만, 그래도 정말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오늘 목표지가 상주 상풍교인증센터까지라고 하십니다. 거기에 자전거 여행객들을 위한 유명한 민박집이 있는데, 숙박부터 식사와 세탁, 게다가 간단한 자전거 점검까지 전부 해결해준다고 합니다. 덤으로 다음날 상주보 인증센터까지 자전거와 함께 차로 이동시켜준답니다. 게다가 가격은 30,000원입니다. 이왕이면 저도 여기서 묵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셨습니다.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긴 하지만, 곰곰이 생각을 해봤습니다. 상주 상풍교 까지라면 이포보에서 180km에 육박하는 거리를 가야 합니다. 일몰시간이 19시 반이고, 현재 시간이 9시 반이니 남은 시간은 10시간 정도인데, 시간당 18km를 쉬지 않고 꾸준히 달린다면 충분히 가능한 거리이긴 하지만... 중간에 창남이 고개, 소조령, 이화령까지 넘어야 하는 엄청난 난코스들이 기다리고 있죠. 게다가 휴식시간과 식사시간, 갈수록 떨어질 체력을 감안하면 결코 쉽지 않은 거리입니다.
어르신께 제 의견을 말씀드렸더니, 어르신께서는 상주 상풍교까지의 거리가 그렇게 멀 것이란 생각을 못하셨던 것 같습니다. 문경에 험한 고개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아셨다고 하시더군요. 하지만 어르신께서는 제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나는 밥 먹는 시간 없이 계속 자전거를 탈 생각이야.
실로 충격적인 이야기였습니다. 가방의 보급식인 고구마와 누룽지, 양갱 정도면 된다고 하십니다. 게다가 어르신께서는 충주댐도 찍고 갈 예정인 모앙이신 것 같습니다. 가방에서 누룽지 몇 개를 꺼내 드시더니, '자네는 빠르니까 아마 나랑 또 만날 거다'는 말씀을 하시곤, 이내 출발하시더군요. 뭔가 걱정이 되어 파워젤 하나를 드렸더니, 너무 고맙다 하시면서 손을 흔들고는 곧바로 길을 나섭니다.
원래 쉬고 갈 예정이었지만, 저렇게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도 누룽지 몇 개로 끼니를 해결하며 달리는 모습을 보니 쉬기가 좀 그런 상황이 되었습니다. 저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렇게 잡담을 하느라 10분 정도를 날렸고, 제 주머니에는 비상식으로 챙겨 온 파워젤이 12개 정도 있습니다. 가방에 남은 것까지 생각하면 제법 여유가 되는 양이었고, 다음 목적지까지 파워젤 한 개와 물 한 모금이면 갈 수 있지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주에 가면 유명한 국밥집이 제법 있다'는 어르신의 말씀도 생각이 났습니다. 거기서 아침 겸 점심식사를 하자는 중간 목표를 세우고, 다시 자전거에 올라탑니다.
여주보에 도착하기 전, 넓은 활주로 같은 곳을 지납니다.
여주보에 가는 길도 제법 신기한 곳들이 많습니다. 캠핑장도 군데군데 많고, 사진과 같은 넓은 활주로를 지나는 코스도 있습니다. 활주로라서 노면 상태가 굉장히 좋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지나가 보니 그렇게 좋진 않더군요... 중간이 음푹 파인 곳이라, 마지막에는 약간의 경사까지 있습니다. 그래도 이곳처럼 길이 넓고 시야가 탁 트인 곳은 국토종주 코스에서 몇 없기에, 사진을 찍고 천천히 지나가 보기로 합니다.
여주가 세종대왕과 관련된 지역이라 그런지, 보를 지나는 다리에는 측우기 장식이 있었습니다.
점점 지쳐가는 몸을 이끌고, 여주보 인증센터에 도착합니다. 중간쯤에 지나쳤던 어르신도 이내 여주보에 도착하십니다. 저의 예상대로 어르신께서는 도장만 찍으시고 곧장 갈 길을 가십니다. 저 역시 여주시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기 때문에, 다시 가던 길을 가기로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중간에 보이는 식당에 들러 자연스럽게 식사를 하려던 제 계획이 꼬이게 되었습니다. 식당은 10시가 다 되어가는데도 죄다 문을 닫은 상태였고, 문을 연 카페 몇 군데에서 식사를 해결하기에는 좀 애매했습니다. 그렇게 어영부영하다 보니 얼떨결에 여주시를 그냥 지나가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시 돌아갈까 말까 고민을 엄청 했지만, 이미 강천보가 가까운 시점이라 거기서 식사를 해결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거기서 라면이든 뭐든 배에 집어넣고, 다음 목적지를 설정하기로 말이죠.
사진의 전기자전거 어르신은 어김없이 바로 길을 가셨습니다...
지친 몸과 굶주린 배를 이끌고, 강천보 인증센터에 도착했습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중간에 어르신을 앞질러 온 저는 먼저 인증 도장을 찍고 있었습니다. 어르신도 곧 도장을 찍으시더니, 다시 출발하실 준비를 하시더군요. 비록 굶은 시간이 길긴 했지만, 어르신이 참 대단하게 느껴져서 여쭤봤습니다.
"어르신, 적지 않은 나이이신데 대단하십니다. 비결이 뭔가요?"
그런데, 어르신의 대답이 충격적이었습니다...
어, 나는 전기 자전거니까 하나도 안 힘들어.
그렇습니다, 어르신은 전기자전거로 서울과 경기도를 누비고 계셨던 것입니다. 어쩐지땀도 한 방울 흘리지 않으시고 편안하게 자전거를 타시는 것이 이상했습니다. 오르막에서 이상하리만치 편안하게 돌아가는 페달링이 그 증거였습니다. 저는 그것도 모르고, '저런 나이 지긋하신 어른들도 다 하는데 나라고 왜 못할까'라는 착각에 빠져 제 몸을 혹사시키고 있었던 것이죠... 물론, 누가 강제로 '쉬지 말고 달려라!'라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식사를 거른 것 역시 제 의지이긴 하지만... 그래도 뭔가 억울한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군요... 저 어르신께서는 전기 자전거로 편안하게 이동하셨던 것이군요... 물론 계속 모터의 힘을 빌리지는 않으셨을 테니, 대단하신 건 사실이라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자전거를 묶지 못해서 밖에서 덜덜 떨며 빵과 콜라를 입에 쑤셔 넣었습니다.
어쨌든 밥은 먹기로 했으니, 어르신께 인사를 드리고 밥을 먹기로 합니다. 다행히 편의점은 하는 모양입니다. 뜨끈한 라면에 도시락 하나를 먹으며 체력을 회복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자물쇠로 자전거를 안전하게 묶어놓은 채로 안에서 따뜻하게 밥을 먹으려 했는데, 자물쇠 열쇠를 깜빡하고 두고 온 겁니다! 생각해보니, 자전거 열쇠는 챙기지 않았던 것이 기억납니다. 마침 강천보 인근에 사람들도 많아서, 자전거를 묶지 않은 채로 안에서 밥을 먹으려니 불안했습니다. 자전거가 보이는 곳이라면 그나마 다행인데, 자전거를 실내에 들이는 게 금지라서 그것도 불가능했습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얼른 편의점에 들어가서 먹을 것들을 찾아봤습니다. 라면과 도시락 등등, 먹을 건 많은데 죄다 실내에서 데우는 등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빵 세 개와 콜라 한 병을 사서 편의점을 나와, 밖의 벤치에 앉아서 빵을 꾸역꾸역 입 안에집어넣었습니다.
허망하게 하늘을 쳐다보며 생각했습니다. 솔직히, 자물쇠를 두고 오려다가 이런 상황이 생길 것 같아 챙긴 것이었습니다. 강천보에 도착해 쉬기로 한 순간까지만 해도 '자물쇠를 가져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반대로 '이럴 거면 자물쇠를 괜히 가져왔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힘들게 밥까지 참아가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이 자전거를 잘 타는 것이라 멋대로 착각한 탓에 무리한 게 되었습니다. 기껏 가져온 무거운 자물쇠는 쓰지도 못하는 애물단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제대로 된 식사도 못한 채로 밖에서 덜덜 떨며 빵으로 끼니를 때우게 되니, 의욕이 팍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빵을 먹다 보니, 조금은 기운이 납니다. 콜라의 위력도 생각보다 엄청나군요. 덕분에 파워젤은 아낄 수 있겠습니다... 음수대에서 물 보충도 마치고, 화장실을 다녀온 뒤 길을 떠나기로 합니다. 다음 목적지는 비내섬입니다. 거리는 30km가 넘는 거리군요...
비정상적인 자전거길(?)을 따라 강천보를 지납니다.
체력적으로 내몰리니, 정신적으로도 한계에 내몰리는 기분입니다. 평소 같으면 '신기한 길이네' 하고 지나갈법한 내리막길도 '이걸 지금 자전거길이라고 만든건가?'라는 불평으로 가득한 채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봐도, 강천보에서 내려오는 이 길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길이긴 합니다. 경사가 너무 심해서 자전거로 내려오면 위험하니, 사진에 보이는 나무로 된 요철을 만들어서 아예 자전거를 못 타게 만들었으니까요. 저럴 거면 굳이 저기를 자전거길로 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습니다만...
강천보를 지나 조금만 가면 캠핑장으로 쓰는 강천섬이 나옵니다. 이곳의 길은 흙이 덮인 임도인데, 때마침 비가 본격적으로 내리면서 땅이 질척 질척하게 변합니다. 덕분에 자전거와 바퀴, 옷이 흙으로 더러워집니다. 좋지 않은 길 때문에 힘든 것은 덤입니다. 점점 체력이 떨어지는 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정신줄을 놓고 헉헉대며 페달을 밟다 보니, 또 업힐 하나가 제 앞을 가로막습니다. 창남이 고개라는 업힐인데, 10대 업힐 중 세 번째 업힐입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후미개 고개보다 길이도 짧고 경사도도 약간은 낮은 느낌이지만 체력적으로 많이 지친 타이밍이라 그냥 힘들었습니다 허허...
고개를 넘은 시간이 정오였는데, 하늘은 비가 조금씩 오는 것 때문인지 점점 흐려집니다. 흐린 하늘 때문에 안 그래도 분위기가 우중충한데, 창남이 고개를 넘고 내려가는 곳에 그늘이 드리운 곳이 많아 더욱 으스스합니다. 내리막길을 내려가면서 제법 춥기도 춥고요.
그런데 또 악재가 겹칩니다. 내려가는 길에 어두워서 보질 못했는데, 고라니 시체를 밟고 지나간 것입니다. 고라니 시체를 완전히 밟은 것은 아니고, 배에서 쏟아져 나온 내장을 밟고 지나갔습니다. 밟는 순간에 피가 튀어 오르는데, 자전거와 얼굴, 옷에 피가 팍 튑니다. 아무래도 얼마 전에 죽은 모양입니다. 비릿한 피 냄새가 온몸에서 올라오는데, 옷과 자전거가 검은색이라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이곳 이후로도 고라니를 비롯한 각종 동물들의 시체는 질릴 정도로 많이 봤는데, 살다 살다 고라니 내장을 밟아서 피를 뒤집어쓸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덕분에 다운힐에서 넘어져서 다칠뻔한 것은 덤입니다.
그래도 정말 다행인 점이라면 아까 먹었던 빵과 콜라의 칼로리가 몸을 타고 돌기 시작한 모양인지, 몸에 조금씩 기운이 돌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몸에 기운이 돌기 시작하니 머리도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제가 기획했던 1일 차의 목적지는 충주입니다. 아무래도 피와 흙, 비를 뒤집어쓴 상태이기도 하니, 충주쯤에서 숙소를 잡아 쉬면 될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일찍 도착해서 빨리 휴식을 취하는 것이죠.
최종 목적지도 정해졌겠다, 다시 힘을 내서 길을 나서도록 합니다. 가자!
* 강원도를 지나 충주로, 그리고 결심
섬강교라는 다리를 건너면, 잠깐동안 강원도 원주시를 지나게 됩니다.
고라니 시체를 밟고(?) 섬강교를 건너니, 강원도 원주시에 들어섭니다. 길 건너의 샛길로 빠지면 섬강을 아주 잠깐 지나서 다시 남한강 자전거길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섬강 어귀의 웅장함과 우아함은 절대 사진으로는 담을 수 없습니다.
잠깐 지나는 섬강이었지만, 정말 경치마다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언제 피랑 진흙을 뒤집어썼는지도 잊은 채로 경치에 넋을 놓은 채로 달렸던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동물 시체가 정말 많더군요... 고양이, 고라니, 개를 비롯해 새 시체까지... 시체는 특히 차도에 정말 많았습니다.
비내섬으로 가는 길에는 공도 주행도 굉장히 많이 하게 됩니다. 차량 통행이 거의 없는 구간이라 크게 위험하진 않지만, 신경이 전혀 안 쓰이는 건 아닙니다. 농촌 마을과 논밭 사이로 난 길들도 수시로 계속해서 지나는데, 밤에 여기를 지나려면 꽤나 고생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흔한 가로등이 전혀 없었거든요.
그래도 자동차가 다니는 길이라, 포장상태는 매우 좋습니다. 요철이나 오르락내리락하는 낙타등 코스도 없어서 좋습니다.
그렇게 하염없이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가 비내섬 인증센터에 도착합니다. 제법 큰 매점도 함께 있었는데, 아까 먹었던 빵과 콜라가 배에서 더부룩하게 남아서 음식 생각은 나질 않았습니다. 대충 도장만 찍고, 아까 얼굴과 고글 등에 묻었던 진흙과 피를 화장실에서 씻어냅니다. 얼굴에 뭐가 잔뜩 묻은 채로 화장실에 들어갈 때 저를 쳐다보던 라이더 한 분의 표정이 아직도 기억나는군요...
휴대폰으로 지금까지 탄 거리를 측정해봅니다. 지금까지 약 133km 정도를 탔네요. 중간에 길 조금 헤맨 것까지 보태면 135km가 될 것 같습니다. 다음 목적지인 충주 탄금대까지는 30km가 남았습니다. 얼굴도 씻었겠다, 마침 해도 조금씩 얼굴을 비춥니다. 여기서 날씨까지 더워지면 더 힘들어질 것 같아 얼른 길을 나섭니다.
다리 하나만 건너면 되는데, 저리 빙 둘러서 길을 가야 합니다...
충주 탄금대 근처에 도착했는데, 야속하게도 길 건너에 목적지가 뻔히 보이는데도 한참을 돌아서 가야 합니다. 중간에 그나마 덜 돌아가게 만들겠다고 다리를 하나 만드는 모양인데, 위의 지도에 보이는 다리보다 아~주 조금 더 가까운 곳에 있는 다리입니다. 설상가상으로, 건넌 뒤에 자전거길이 갑자기 끊어집니다. 중간에 멋진 자전거길도 제법 많이 지나왔는데, 이 이해할 수 없는(?) 노선을 지나며 기억이 싹 날아갔습니다.
충주 탄금대 인증센터의 도장까지 찍고, 잠시 쉬기로 합니다.
그렇게 먼 길을 돌고 돌아(?) 충주 탄금대 인증센터에서 도장을 찍습니다. 오늘 목표한 곳까지, 즉 남한강 자전거길까지는 완전히 끝낸 것이죠. 원래 계획했던 3박 4일의 종주 일정에서 첫째 날의 목적지까지는 도착하였습니다.
아까 강천보에서 샀던 남은 빵 하나를 꺼내 콜라와 먹으며 잠깐 휴식을 취합니다. 시계를 보니, 시간은 15시 정도더군요. 주변의 숙소들을 검색해봅니다. 가장 빠른 체크인이 17시부터입니다.
친구들의 걱정을 들으니, 갑자기 몸속에서 알 수 없는 힘이 솟아오릅니다. 다음 인증센터인 수안보 온천까지의 거리를 보니, 28km 정도가 남은 것 같습니다. 진지하게 고민을 해봅니다. 체크인까지 남은 시간은 2시간, 어차피 17시까지 기다릴 거면 수안보 온천까지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수안보 온천까지 가고 말았습니다...
결국 저는 수안보 온천 인증센터까지 가고야 말았습니다. 출발을 15시 조금 넘어서 했는데, 도착은 5시가 다 되어서야 도착했습니다. 중간에 가는 길은, 농촌길과 공도와 자전거 전용도로가 뒤섞인 길입니다. 30km 조금 안 되는 거리라서 금방 도착할 줄 알았는데, 상상 이상으로 오래 걸렸습니다... 체력이 후 달려서 사진조차 찍을 힘이 없었던 것은 비밀입니다.
참고로, 탄금대부터 상주 상풍교까지는 '새재 자전거길'입니다. 새재 자전거길부터는 급격히 길이 나빠지기 시작해서, 대부분의 길을 차들과 함께 달려야 합니다. 수시로 등장하는 오르막은 덤입니다. 당연히 길 포장도 최악입니다.
길이 험한 만큼, 팔봉 폭포를 비롯한 멋진 절경들이 연달아 이어집니다. 하지만, 저는 체력이 거의 바닥이 난 상황이라 사진을 찍을 여유 따위는 없었습니다. 그저 달리고 달릴 뿐...
도착하자마자 도장을 찍고, 화장실에서 큰 일(?)을 본 뒤에 마을을 둘러봅니다. 유명한 관광지인 모양인지, 고급 숙소가 즐비하게 늘어선 곳입니다. 문제는, 가격이 좀 많이 비싸다는 것이죠.
대충 마을을 둘러본 후, 저는 다시 생각에 빠집니다. 다음 목적지인 이화령 휴게소 인증센터, 그리고 숙소가 있는 문경 온천타운까지의 거리를 측정했습니다. 이화령 정상까지는 약 17km, 이화령 정상에서 마을이 있는 문경읍까지의 거리는 10km입니다. 어차피 이화령 정상에 도착하면, 문경읍까지는 페달을 밟지 않아도 도착하는 내리막이 이어집니다.
결국, 저는 결심합니다. 조금 무리를 하더라도 문경새재를 넘기로. 원래는 이틀 차에 넘으려 한 소조령과 이화령이지만, 이 악 물고 근성으로 넘어보기로 합니다.
* 국토종주의 중간 관문, 소조령과 이화령을 넘다
소조령과 이화령을 가기 전,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습니다.
수안보 온천에서 표시된 하늘색 선을 따라서 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소조령 고개가 나옵니다. 총길이 2km의 '맛보기 이화령'입니다. 제가 올라가기 전에, 이미 라이더 한 분께서는 자전거를 끌고 오르고 계셨습니다. 저 역시 자전거에서 내려 끌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소조령과 이화령만은 반드시 자전거에 탄 채로 정복하겠다는 일념으로 올라갑니다.
그동안 거의 200km 이상을 달려왔습니다. 냉정하게 보면, 경사가 그리 심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누적된 피로로 인해 이미 다리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 발바닥, 종아리, 무릎, 허벅지, 엉덩이, 허리, 어깨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몸이 부서질 것 같지만, 억지로 억지로 결국에는 올라갑니다. 올라가던 중에 시원시원하게 소조령을 오르시던 한 분을 만났는데, 이 분은 이화령 정상에서도 만나게 됩니다.
해가 점점 서편으로 저무는 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제 시간이 없습니다. 땀에 홀딱 젖은 몸으로 내리막을 내려오니 몸이 으슬으슬 떨려오지만, 곧 이화령을 오르면 다시 땀으로 폭삭 젖을 예정이라 걱정은 없습니다. 다시 길을 나섭니다...
곧 이화령 고개가 찾아옵니다. 이제는 사진을 찍을 기운도 없습니다. 기어를 가장 가벼운 기어로 바꾸고, 고개를 푹 숙이고 이화령을 올라갑니다. 절대 앞을 보지 않습니다. 앞을 봤다간, 끝도 없이 이어진 오르막과 구불구불한 길에 절로 멈춰버릴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오직 바닥에 보이는 남은 거리만 보며 페달을 굴리고 또 굴립니다.
갑자기 왼쪽 종아리와 무릎에 극심한 통증이 찾아옵니다. 약 절반 정도 온 것 같은데, 위기였습니다. 쓰고 있던 얼굴 스카프를 입에 물고 고글을 벗은 뒤, 페달을 계속해서 굴립니다. 그렇게, 기억도 나지 않던 순간들이 지나고 결국 이화령 정상에 도착합니다.
오른 순간의 감상은 감격보다는 피곤함으로 인해 '빨리 내려가야지'라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올라서 도장을 찍고, 경치를 봅니다. 눈에 멋진 경치가 들어와야 하는데, 힘들어서 단 하나의 생각만 듭니다. 빨리 가서 쉬고 싶다... 이제는 자전거에 올라탈 힘 조금만 남은 상태입니다. 남은 물을 뱃속에 털어 넣고 엉금엉금 자전거에 기어오르려던 찰나, 아까 소조령에서 만났던 분이 제게 다가오시더군요.
그분께서는 제가 어디까지 가는지를 물어보시더니, 목적지가 같다면 같은 숙소를 쓰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습니다. 어차피 근방의 숙소들은 방이 커서 두 명은 충분히 잘 수 있으니, 저로서는 나쁠 것 없는 제안이죠. 흔쾌히 승낙하고, 곧바로 문경읍으로 향하기로 합니다. 이때의 시각 19시, 해가 지기까지 30분 정도 남은 시점입니다.
그런데, 출발하려고 자전거에 올라타는 순간에 왼쪽 무릎에서 참기 힘들 정도의 통증이 올라옵니다. 순간적으로 너무 아파서 '아악!'하고 소리를 지를 정도로 아팠습니다. 살짝 불안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내일 일어나도 멀쩡할까...
다행스럽게도, 문경읍까지는 줄곧 내리막으로 이어지는 다운힐의 연속입니다. 길이 구불구불해서 속도를 빠르게 유지할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입니다. 내려오면서 고라니 시체를 몇 번 봤는데, 7시간 전의 기억이 갑자기 떠올라 등골이 오싹해집니다. 해가 지는 중이라 추워서 덜덜 떨며 내려왔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문경읍의 문경온천랜드는 꽤나 번화한 큰 규모의 읍내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숙소도 너무 많아서 고르기 힘들 정도더군요. 숙소가 상당히 저렴해서, 원래는 같은 방을 쓰려다가 각자 방을 잡기로 했습니다.
근래 먹었던 추어탕 중에 가장 맛있는 추어탕이었습니다. ㅜㅜ
그렇게 숙소에 도착한 저와 일행은 번갈아 샤워를 마치고, 얼른 저녁을 해결합니다. 근처의 추어탕 식당에 들러 추어탕을 말 그대로 흡입했습니다. 식당에 비치된 무료 막걸리 몇 잔은 덤입니다.
식사를 하며 그 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굉장히 젊어 보이시는 데, 나이가 43세라고 하시더군요? 저는 30대 초중반 같다 말씀드렸더니, 굉장히 좋아하십니다. 저도 학생처럼 보인다는 칭찬은 덤입니다.
저희 둘은 그렇게 식사를 하며 여러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대체로 자전거와 관련된 이야기들이었죠. 이야기를 나누면서 느낀 것이지만, 함께 자전거를 탈 사람이 있다는 건 참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분의 부인 되시는 분도 자전거를 타시는데, 두 분은 시간이 되면 자전거로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신다고 합니다. 오늘의 라이딩 대부분을 혼자서 달려왔던 제 모습이 떠오르면서 두 분의 모습이 내심 부러웠습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그 분께서 식비는 전부 자신이 내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원래부터 자신보다 어린 사람을 만나면 밥 한 끼 사주고 싶었다고 하십니다. 힘들게 이화령을 넘어 문경읍까지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좋은 분을 만날 줄이야...
식사를 마치고 마을의 약국에서 소염제와 파스 등등을 사려고 했는데, 이미 다 문을 닫은 뒤였습니다. 아쉬운 대로 편의점에서 각자 아침에 먹을 식사와 필요한 것들을 사서 숙소로 돌아가기로 합니다. 이윽고 다음 일정에 대해 공유를 했는데, 그분은 아침에 늦게까지 잠을 주무실 예정이라고 하시더군요. 저는 눈 뜨는 대로 출발하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의 주행거리는 약 220km입니다. 실제로는 10km가량 더 달린 것 같습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왔습니다. 그분은 아내 되시는 분께 통화 한 번 드리고는 바로 잠에 드셨습니다. 저는 진흙과 피가 묻은 자전거를 닦고, 더러워진 옷을 세탁한 뒤 말리면서 오늘 달려온 거리를 계산해봅니다. 거의 220km를 달렸군요... 원래는 충주까지 가기로 했는데, 어쩌다 보니 무리해서 첫날에 이화령까지 넘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다음 날이 걱정이긴 하지만, 그래도 하루 만에 이화령을 넘었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숙소에서 잠에 들기 전, 아버지께 전화가 왔습니다. 뭐하는 중이냐고 물어보시더군요. 생각해보니, 부모님께 국토종주 출발했다는 말씀을 아직 못 드렸다는 생각이 났습니다. 얼떨결에 '집에서 쉬는 중이다'라고 얼버무려버리고 전화를 황급히 끝냈습니다.
옷을 말리면서, 내일 계획도 세울 겸해서 라이딩 복기를 해봅니다. 원래라면, 오늘 충주에서 하루를 묵은 뒤에 2일 차에 구미보와 칠곡보 인근에서 하루를 묵을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하루만에 덜컥 이화령을 넘어서 문경까지 오게 되었으니, 잘하면 3일 안에 종주를 끝낼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섭니다.
3일 안에 종주를 끝내려면, 대략 대구 달성군의 현풍면까지 가면 될 것 같습니다. 단순 거리만 따지면 오늘보다는 짧은 거리입니다. 내일 목적지는 대구로 정해봅니다.
사진을 찍는 것 역시 문제가 많습니다. 지도를 보면서 가느라 자전거의 거치대에 폰을 끼운 채로 다니는데, 사진을 찍으려고 매번 멈춰서 폰을 거치대에서 빼는 행위를 반복해야 하니까요. 이게 생각보다 시간을 엄청나게 잡아먹습니다. 좋아보인다고 그때마다 멈춰서 사진을 찍다보면 시간이 엄청나게 많이 날아갑니다. 그렇다고 사진을 안 찍자니, 다녀온 기록이 없고... 딜레마입니다.
그렇게 옷을 말리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패드가 있는 부분이 잘 마르지 않아서 그냥 내팽개치고 자기 위해 침대에 눕습니다. 그나저나, 아까 이화령 정상에서 아팠던 왼쪽 무릎이 신경쓰입니다. 내일 일어났는데, 움직이지 않으면 어떡할지... 이런저런 걱정이 드는 한편, 하루만에 이화령을 자전거에서 내리지 않고 넘은 제 자신이 대견스럽기도 합니다.
우선은 아까 사온 물파스를 무릎에 떡칠을 합니다. 파스가 여간 센 게 아닌 모양인지, 무릎을 태우듯이 아픕니다. 덕분에 무릎이 조금은 낫는 것 같...기도 한 것 같네요?
오만 잡생각을 다 하다가, 스르르 잠에 들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정신없이 국토종주의 첫째 날이 지나갑니다. 과연, 저는 중간에 포기 없이 부산까지 도착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