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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라 Aug 09. 2020

#9. 국토종주 2일 - 지옥의 낙동강

총 길이 177km, 사막같은 낙동강을 헤쳐나가자

※ 작가의 말말말


  최근 다시 회사를 다니는 중입니다.  평일에는 회사생활, 주말에는 자전거를 주구장창 타느라 한동한 글을 쓸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글을 시작하려 합니다. 마침 제 브런치를 보던 친구가 '이렇게 글이 안 올라오면, 사람들이 너 국토종주 실패한 줄 알겠다'는 말을 해줘서, 틈틈이 글을 써서 다시 이렇게 업로드합니다!


  제 글을 기다리셨던 분들께(적어도 한 명은 있겠죠...?) 죄송하다는 말씀 먼저 드리고 글을 시작합니다!




* 지난 줄거리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 출발하게 된 국토종주. 서울에서 출발한 저는 부슬부슬 내리는 비와 진흙탕을 헤치고, 차에 치인 고라니 시체를 넘어, 이화령을 정복하고 약 220km의 라이딩을 마무리합니다. 이화령에서 만난 라이더 분 덕분에 숙식까지 해결하게 된 저는 땀과 비, 그리고 고라니 피에 젖은 옷을 빨고 말리다 스르륵 잠에 듭니다.




#9. 시간과 정신의 방, 낙동강 상류 구간을 돌파하자!


* 이른 아침의 문경은 정말 멋지다


  "?!"


  세차게 돌아가는 에어컨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깹니다. 갑자기 떠진 눈이라, 혹여나 늦잠을 잔 건 아닌가 깜짝 놀라 시간을 확인해봅니다. 새벽 3시 50분, 오히려 일어나기로 한 시간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버렸습니다. 저는 몸이 너무 고생을 하면 오히려 잠을 적게 자는 경향이 있는데, 오늘이 그런 날인가 봅니다. 옷을 말리다 12시가 거의 다 되어 잠에 들었던 기억이 나는데, 대충 계산해봐도 4시간을 채우지 못한 셈입니다. 전날 밤을 새워서 오늘은 푹 잘 생각이었는데, 4시간도 채 잠들지 못하다니...

  그런데 신기하게도 정신은 말똥말똥합니다. 그리고 미리 계획이라도 한 것처럼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가며 출발할 준비를 합니다. 1초라도 시간을 아끼기 위해, 어제 사놓은 편의점 빵을 먹으며 채비를 합니다. 빵을 우물거리며 옷을 챙겨 입고, 사놓은 음료수를 마셔가며 자전거에 이상은 없는지 살핍니다. 일어나자마자 빵을 먹으려니 목이 턱턱 막힙니다. 하지만, 먹지 않으면 지옥이 기다립니다. 살아남으려면 먹기 싫어도 먹어야 합니다.


  넘어가지 않는 빵은 음료수로 대충 풀어서 얼른 삼켜 해결한 뒤, 자전거를 챙기고 출발합니다. 어제 만났던 분은 아직 주무시는 모양입니다. 숙식을 해결해준 답례를 해드리고 싶었지만, 지체 없이 출발을 하기로 합니다. 온몸이 뻐근하게 말을 듣지 않는 괴로운 느낌이 들지만, 어쨌든 출발은 해야 합니다. 숙소에서 더 쉬면 완전히 퍼질 것 같았거든요.


숙소 바로 앞에 국토종주 코스가 이어집니다.


  4시 반 무렵, 아직 구름과 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문경의 아침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깁니다. 크고 작은 산이 겹겹이 길을 감싸고 있는데, 그 사이마다 작은 마을과 개울과 다리를 건너게 됩니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산과 안갯속에서 등장하는데,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풍깁니다. 정겨운 시골길을 지나며 새벽 공기를 가르니 다시 기분이 좋아집니다. 아팠던 몸도 신기하게 고통을 잊기 시작합니다. 출발하던 어제보다 더욱 들뜬 마음으로 이튿날을 맞이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아기자기한 길을 지나자 거대한 산맥들 사이를 달립니다.


  아기자기한 산길을 지나면 어마어마한 규모의 산맥 사이로 난 길을 차들과 함께 달리게 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휴게소 같은 곳에 도착하게 되는데, 주변에 관광시설들이 매우 많은 모양입니다. 개인적으로 오미자를 매우 좋아하는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문경 오미자 테마 터널에서 시원한 오미자 에이드를 한 잔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거대한 자연 앞에 한없이 숙연해지는 순간


  국토종주 구간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구간을 하나 꼽자면, 불정역 가기 전 5km 구간을 꼽고 싶습니다. 거대한 자연의 몸 안에 흐르는 대동맥 사이를 지나는 기분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기분 좋게 뿌려진 안갯속을 가로지르며 불정역을 향해 달리는 동안은 몸이 아팠던 것도 잊고 경치를 구경하기 바빴습니다. 수안보와 문경 터미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이곳은 한 번 꼭 들러보시길 바랍니다.


거대한 자연 속이라 그런지 불정역의 아기자기함이 더욱 돋보입니다.


  정신없이 경치를 구경하며 달리면 어느새 문경 불정역 인증센터에 도착합니다. 폐역을 문화공간으로 꾸민 곳인데, 예쁜 들꽃과 역 시설물들로 공간을 꾸며놓았습니다. 숨도 돌릴 겸, 인증센터 주변을 구경하다가 다시 출발을 합니다.


  문경시청 인근으로 들어가기 전, 국토종주 안내 간판이 잘못 표기된 탓에 갑작스러운 업힐 하나를 올라가게 됩니다. 예정에 없던 업힐인 데다, 생각보다 경사도가 센 편이라 체력을 제법 요합니다. 심지어 어제의 저는 태어나 가장 긴 거리인 220km(업힐 포함)를 처음으로 탄 상태입니다. 몸 상태가 말이 아니라는 것이죠.


  이 업힐 덕분에 거리는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원래의 종주코스는 강변을 빙 둘러서 가는 코스이지만, 제가 올랐던 코스는 문경시청 방향으로 완전히 가로지르는 지름길이더군요. 덕분에 거리는 엄청나게 줄었습니다. 시간을 벌었다는 생각에 살짝 신이 납니다. 하지만, 이 업힐은 저의 큰 실수가 됩니다.



* 무릎 통증, 그리고 최고의 임팩트를 준 경천대


완전히 삭아버린 간판이 제 심정을 대변합니다.


  문경시를 벗어날 때, 갑자기 왼쪽 무릎에 극심한 통증이 찾아옵니다. 사실, 이전까지는 무릎에 통증이 좀 있어도 '참으면서 타면 괜찮겠다'는 생각으로 자전거를 탔습니다. 하지만 어제의 무지막지한 라이딩 거리로 쌓인 피로와 통증이 좀 전의 업힐로 결정타를 맞은 모양입니다. 어제 이화령에서 내려오기 직전에 찾아왔던 통증이 결국엔 터지고 만 걸까요? 이번의 통증은 도저히 참으면서 탈 수준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어, 우선은 약국을 찾아보기로 합니다. 제가 지나는 구간이 마침 문경시청과 문경 버스터미널 근처라, 약국이 있을 것이라 판단했거든요.


  하지만 애석하게도, 시간이 너무 이른 탓인지 문을 연 약국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쉬운 대로, 자전거길까지 나간 뒤  어제 편의점에서 샀던 파스를 선크림보다도 듬뿍 짜서 무릎에 바릅니다. 이내 따가울 정도로 쓰린 파스의 약효가 무릎을 덮자, 겨우 무릎의 통증이 잡히는 느낌입니다. 아침에 가방에 넣었던 무릎보호대를 꺼내 무릎에 차고, 다시 천천히 페달을 밟아봅니다. 최대한 페달의 회전에 집중하자는 생각으로, 기어를 가볍게 하고 관절과 호흡에 집중해봅니다. 하나, 둘, 하나, 둘. 파스와 무릎보호대, 그리고 집중한 덕인지는 몰라도 점점 통증이 사그라드는 느낌이 듭니다.

  통증이 경미하게 남아있지만 참고 탈 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태어나서 이렇게 관절이 아팠던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몸을 혹사시키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이번 국토종주로 뼈저리게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순간적으로 너무 아픈 나머지, 국토종주를 그만하고 돌아가려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고통스러웠거든요.


  그렇게 위기를 넘기고 달리면 곧 상주시에 접어들게 됩니다. 논밭과 산길을 오르락내리락하며 계속해서 달리게 됩니다. 상주에 접어들면 길이 좋았다 나빴다 하는데, 마치 낙타의 등을 연속해서 지나는 것 같습니다. 혹시 저처럼 정식 국토종주 코스를 그대로 따라가실 분이 계시다면, 유명한 업힐 10개 이외에도 크고 작은 업힐들이 다수 포진해있다는 점을 알고 출발하시면 좋겠습니다. 가급적이면, 길을 미리 연구해서 국도를 이용하는 게 체력 안배에는 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상주 상풍교 인증센터에서 상풍교를 건너면 안동댐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다소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어떻게 상주 상풍교 인증센터까지는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길은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계속 반복하는 길인데, 자전거길 중간마다 나무를 심어놓아서 길이 넓지 않은데 심지어 코너 구간도 많습니다. 상황을 봐서 옆의 차도로 이동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침에 갑작스러운 부상과 잦은 업힐의 등장 등으로 인해 예정한 시간보다는 약간 늦었지만, 그래도 페이스 조절을 잘하면 대구까지는 도착을 하겠다는 판단이 섭니다. 아침에 먹고 남은 편의점 빵 몇 조각과 물을 마시며 낙동강을 바라봅니다. 숨 가쁘게 달려온 저와는 달리 강은 반짝반짝 햇볕을 열심히 튕겨냅니다. 그러고 보니, 마구 흐리고 서늘했던 어제와는 달리 날이 후덥지근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피부가 다 타기 전에 미리 선크림을 잔뜩 발라줍니다.


저 멀리 한가운데 보이는 산줄기가 경천대 매협재 코스입니다.


  충분히 쉬었으니, 다시 출발을 해야겠죠? 천천히 페달을 돌리며 '무리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갑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왼편으로 낙동강이 시야에 넓게 펼쳐지고, 낙동강을 감싸고 이어진 능선이 하나 보입니다. 국토종주 10대 업힐 중 하나인 경천대 매협재가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하며, 마음의 준비를 시작합니다. 무지막지한 경사도를 자랑한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죠. '잘만 하면 무정차 무끌바로 정복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도 함께 안은 채(?)로 매협재를 향해 다가갑니다.


  매협재에 거의 다 도착할 즈음, 반대방향에서 내려오시는 라이더 분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가옵니다.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드리는데, 힘드셔서 그런지 대충 고개만 털털 터시며 답해주시고는 다시 갈 길을 가십니다. 그중에 한 분은 '어우 씨..'하고 욕(?)을 하시더군요. 잠시 후, 저는 그분들의 심정을 완전히 알게 됩니다.


매협재의 충격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 같습니다...


  입구에 도착하는 순간, 웬 벽이 하나 제 앞을 가로막습니다. 업힐에 앞바퀴가 올라가는 순간, 앞바퀴가 격하게 들리며 몸이 뒤로 휘청하는 느낌이 듭니다. 입구가 정확히 _/ 모양입니다. 왜,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를 타면 맨 처음 급격하게 떨어지는 구간을 위해 급경사를 올라가는 것부터 시작하죠? 정확히 그곳을 올라가는 느낌입니다. 몸의 무게중심을 최대한 앞으로 빼지 않으면 뒤로 완전히 넘어가려고 해서, 완전히 상체를 앞으로 숙인 채로 억지로 올라가야 합니다.


  여기서 느꼈습니다. 아, 여기서 괜히 객기 부리면 최소 무릎 부상 악화, 최대 낙차로 인한 국토종주 종료겠구나... 얼른 자전거에서 내린 뒤 끌바를 시작합니다. 아까 아팠던 무릎의 부상이 재발해 더욱 아파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죠. 겸손하게, 대자연의 위대함을 받아들이고 자전거를 끌고 올라갑니다. 물론, 이 길은 사람이 만든 길이긴 하지만요...


매협재 정상의 경치는 끝내줍니다!


  그렇게 몇 분의 끌바가 끝나면 금세 매협재 정상에 도착하게 됩니다. 길이 자체는 그렇게 길지는 않아서 다행입니다. 정상의 아래로 낙동강이 한눈에 보이는 멋진 곳입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자전거로 국토종주를 할 계획이 없었다면, 일부러 여기를 찾아올 일은 없었을 겁니다. 그동안 서울의 높고 낮은 산도 자주 다녔고, 부모님과 친구들과 함께 좋은 경치도 많이 구경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처럼 제가 스스로, 그것도 혼자서 경치를 보러 다니는 경험은 처음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세상엔 이렇게 멋진 경치들도 참 많고, 이런 경치들은 제가 직접 찾아가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경치들입니다. 힘들게 서울에서부터 자전거를 타고, 이곳 정상까지 힘겹게 자전거를 끌고 올라와 보는 경치는 단순히 시각적으로만 '멋지다'라는 표현으로 담아내기에는 훨씬 더 웅장하고 벅찬 느낌을 줍니다. 이런 아름다운 경치 덕분에 아팠던 온몸의 통증과 피로가 날아가는 힘이 되기도 하고요.


  저 멀리 낙동강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며 저의 목적도 잊고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깁니다. 강산이 다가오게 하려면, 페달을 굴려야 하니까요.

  

경천대 국민관광지 내부를 지나 상주자전거박물관, 낙동생물자원관 앞을 차례로 지납니다.


  매협재 정상에서 상주박물관 앞을 지나 경천대 관광지 내부의 짧은 업힐과 다운힐을 관통하고 나면, 상주자전거박물관과 낙동생물자원관, 경천섬 앞을 지나게 됩니다. 잘 몰랐는데, 상주에도 가족이나 친구 또는 연인과 함께 오기 좋은 관광지가 많다는 생각이 드네요. 특히 경천섬은 넓은 폭의 낙동강 사이에 있는 멋진 섬이니 다녀와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다행히도 상주 상풍교에서 상주보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습니다. 경천섬을 지나 조금만 이동하면 상주보에 도착합니다. 이내 상주보 인증센터에 도착, 도장을 찍고 짧은 휴식을 취합니다. 시간을 보아하니, 다음 인증센터 근처에서 점심을 해결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지체 없이 다음 인증센터로 출발하기로 합니다.



* 몇 시간 째 같은 풍경. 국토종주,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상주보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강변에서 산 쪽으로 길이 꺾이기 시작합니다. 느닷없이 등장하는 업힐이 당혹스럽지만, 여기를 지나지 않으면 종주를 끝낼 수가 없으니 싫어도 나아갑니다. 웬 날벌레들이 그렇게 많은지, 고글과 마스크 틈을 어떻게든 찾아서 눈과 코와 입으로 사정없이 들어오려 합니다. 헬멧에는 따닥따닥 거리는 벌레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고요. 본격적으로 여름이 되면 국토종주하시는 분들은 더위도 더위지만 벌레 대비를 단단히 하셔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상주보에서 산속을 헤치다 보면 낙단보에 도착합니다.


  그렇게 산과 논밭 사이를 헤쳐나가니, 어느새 낙단보에 도착하게 됩니다. 낙단보는 여주보처럼 건물 디자인에 제법 신경을 쓴 느낌입니다. 이름도 '낙단보'인 데다, 상주 구간부터는 바닥에 '부산 낙동강 하굿둑까지 000km'라는 문구가 주기적으로 보여서 그런지 감회가 새롭습니다. 거리 상으로 전체 국토종주 코스의 가운데 정도에 위치한 인증센터이기도 했습니다.


인증도장을 찍고 물을 보급하려 했는데, 물을 마실 곳이 없습니다...


  낙단보 인증센터에 도착, 도장을 찍고 잠시 쉬기 위해 편의점을 찾아봅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편의점은 고사하고 음수대도 보이질 않습니다. 자판기를 쓰려면 현금이 있어야 하는데, 현금을 들고 다니질 않았기 때문에 자판기는 그림의 떡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열쇠가 없어서 쓰질 못하던 자물쇠 행어의 고정이 풀려버리면서 덜렁거립니다.


  점점 날도 뜨거워지고, 물은 다 떨어졌는데 자전거의 부속들은 여전히 말썽입니다. 얼른 자물쇠 고정장치를 다시 단단하게 묶은 뒤, 점심을 해결할 곳을 찾기로 합니다. 당시 시간이 11시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낙단보 앞의 제법 긴 업힐을 지나, 자그마한 식당가를 발견한 저는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식당에 들렀습니다.


식당들이 아직 영업 전이라, 일단 급한 대로 카페에서 끼니를 해결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식당들이 아직 영업 준비가 되질 않은 겁니다... 평일에는 지나가는 인적이 별로 없는 모양인지, 1인 식사가 가능한 식당들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문을 연 식당들은 대부분 매운탕 등을 파는 단체 손님용 식당이더군요. 다행히도, 카페는 문을 열었습니다. 사람이 커피는 안 먹어도 되지만 밥은 무조건 먹고살아야 하는데, 식당은 문을 닫고 카페만 문을 열다니... 아이러니한 기분이 들지만, 일단은 살기 위해 카페에 들렀습니다.


  부산까지 국토종주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카페 주인의 배려 덕분에, 커피 한 잔만 시켰는데 케이크와 과자까지 함께 먹을 수 있었습니다. 더운 날씨에 마시는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맛은 뭐랄까요, 뜨거운 햇볕 속에서 천천히 말라가던 식물에 시원한 빗줄기가 내리는 장면이 느껴지는 짜릿함을 선사합니다. 달콤한 케이크는 덤이죠. 주인 분께 무한한 감사를 드리고, 염치없이 물도 두 통을 꽉 채워 다시 길을 나섭니다.


똑같은 풍경을 몇 시간 동안 달리다 보면, 시간 감각이 이상해집니다.


  낙단보 이후의 길은 대부분 평지로 이루어져서, 초반에는 순탄한 느낌을 받습니다. 하지만 이따금씩 건너는 작은 다리들을 제외하면, 몇 시간을 달려도 계속 길이 이렇게 생겨서 '내가 지금 얼마나 왔지?'라는 감각도 무뎌질 정도로 사람이 미칩니다.

  아까 먹었던 케이크와 커피의 약효도 점점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아무래도 제대로 된 식사 없이 편의점 빵이랑 간식 같은 것들로 일정을 강행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어제 사뒀던 양갱이나 파워젤, 물로 어떻게든 버텨가며 구미보 인증센터에 도착합니다.


뭔가 편의점이 있을 것 같은 모양인데, 보이질 않습니다.


  그렇게 숨을 헐떡대며 가까스로 구미보 인증센터에 도착, 얼른 도장을 찍은 뒤 주변을 열심히 둘러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코로나의 여파인지 뭔가 보이질 않습니다. 경로를 이탈해서 식당이나 편의점을 가자니 시간이 너무 아까웠습니다.


  지도를 대충 살펴보니, 구미의 공단 옆을 곧바로 지나는 경로를 타는 것 같습니다. 공단 근처라면, 밥집이든 편의점이든 뭔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점심(?)을 먹습니다. 시간이 아까우니 허기만 달래기로 합니다.


  다행히도, 칠곡보까지의 여정이 절반쯤 지난 시점에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매점이 등장합니다. 이 매점은 본격적으로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을 위한 곳이었습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급속 충전용(?) 식량이 잘 마련되어 있습니다. 물론, 가격은 조금 비싼 편...이지만.


  날씨가 더워서 콜라와 바나나가 금방 따뜻해집니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 구매한 컵라면은 문자 그대로 살기 위해 먹는 음식입니다. 구불구불한 라면의 면발이 저 먼 곳의 아지랑이와 겹쳐 보이기 시작할 때, 구미보 인증센터에서 마주쳤던 남자 둘이 매점으로 다가옵니다.


  그 두 사람은 형제였는데, 부산에서 인천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라는, 다소 믿기 어려운 충격적인 사실을 매우 덤덤하게 이야기해줬습니다. 아직 둘 다 군 입대를 하지 않았다는데, 군 입대 전에 의미 있는 도전을 하기 위해 국토종주 왕복길에 올랐다고 하네요.


  둘의 자전거는 제 자전거보다도 더 초라한, 여기저기 녹이 슨 자전거였습니다. 인천까지 6일이 걸린다고는 하지만, 그 둘은 둘만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중일 겁니다. 페달을 굴릴 때마다 삐걱이는 자전거로 여정을 헤쳐나가는 둘의 모습은 생각 이상으로 즐겁고 뿌듯해 보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힘듦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 힘든 심정은 자신만이 알겠죠. 하지만, 자신만의 힘듦이 있기 때문에 그 역경은 자신만이 헤쳐나갈 수 있는 법입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그 길을 대신 걸어주지 않습니다. 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가며 스스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야 할 것입니다. 이왕 이겨내야 할 난관이라면, 즐겁게 상황을 즐기는 여유도 필요한 법이겠죠?

  저보다 한참 어린 친구들이 뭔가 대견해 보여서, 간식을 좀 사주고는 인사를 하고 길을 떠납니다. 이미 인천을 찍고 다시 돌아오는 친구들의 모습에서 용기를 얻습니다.

  출발하려는 찰나, 간식을 받아서 고마운 모양이었는지 그 친구들이 낙동강 하류의 다람재와 무심사, 그리고 박진고개와 영아지고개는 꼭 피하라는 당부를 제게 합니다.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저는 다시 먼 길에 오릅니다.


칠곡보 안에는 편의점이 있어서, 이온음료를 몇 병을 들이켰습니다.


  구미공단 지역을 지나 정신과 시간의 방(?)을 다시 한두 시간 정도 달리니, 칠곡보에 도착합니다. 칠곡보 안에는 편의점이 있어서 시원한 이온음료를 마음껏 사서 마셨습니다. 얼른 도장을 찍고 앉아서 쉬기로 합니다.


  자전거를 타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사실 여기까지만 해도 120km라는 긴 거리를 달렸습니다. 첫날에 거의 220km를 탔으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타고 휴식해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원래 계획한 일정이 3박 4일이니, 오늘 120km를 타고 나머지 거리도 반씩 나눠서 타면 되지 않을까 고민했습니다.


  시간은 오후 2시 50분 정도, 아직 일몰까지는 4시간 이상이 남은 시점입니다. 15km/h 정도로만 타도, 천천히 무리하지 않고만 가도 5시 정도에는 강정고령보까지 도착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뭔가 어제랑 상황이 좀 비슷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우선은 고민할 시간에 1m라도 더 앞으로 나아가자는 판단을 내린 저는 다시 자전거에 올라탑니다.


  자전거라는 운동이 이렇게 힘든 운동인지, 준비가 부족하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는지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입니다. 중간에 공사로 인해 우회하는 보행자 길을 지나느라 잠시 걸어가는 구간이 있었는데, 하반신의 관절 곳곳이 너무나도 아픈 느낌이 지속해서 느껴집니다. 다시 자전거길에 접어들어 라이딩을 시작하자 고통은 몇 배로 크게 다가옵니다.



* 이대로 돌아갈까...?


여기서 서쪽으로 40km 정도를 타면 저의 가족이 사는 집으로 갈 수 있습니다.


  약 35km를 달려, 저희 고향인 대구의 인증센터인 강정고령보 인증센터에 도착합니다. 사실 강정고령보는 예전에 대구에서 전지훈련(?) 목적으로 몇 번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처럼 인천과 서울에서 출발해본 적은 처음이라 사뭇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오는 길에 마침 꾸준한 페이스로 빠르게 달리는 로드바이크 라이더 한 분이 제 앞을 이끌어주셔서, '이 사람의 등만 보고 달린다'는 생각으로 꾸준히 페달링을 하다 보니 어느새 강정보에 도착을 하게 되었습니다.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역시 굉장히 많았는데, 인증센터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자전거 라이더들이 많이 보입니다. 반대로, 인증센터와 인증센터의 가운데 지점에 가까울수록 인적이 드물어집니다.


  자전거 타시는 분들 중에 가장 부러웠던 사람들의 유형을 나눠보자면,


1. 2인 이상이 모여 팀으로 라이딩하는 사람들

2. 전기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이 두 유형의 사람들이 가장 부러웠습니다. 자전거를 타는 과정이 대체로 즐겁긴 하지만, 체력적으로 힘든 순간이 다가오면 사람인 이상 심리적으로 의존할 대상이 필요해지는 것 같습니다. 몇 시간 전, 자전거길 옆 매점에서 만났던 두 형제의 사례가 이에 해당하겠군요.

  전기자전거는 그냥 체력적인 부분에서 힘을 많이 절약할 수 있기 때문에, 당시에는 많이 부러웠던 것 같습니다. 첫날에 만났던, 리컴번트 전기자전거를 타던 어르신이 뇌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편안하게 누워서 누룽지와 과자를 먹으며 자전거를 타시던, 그럼에도 속도는 계속 25~30km/h를 유지하시던 그 모습... 물론, 지금에 와서야 그렇게 부럽진 않습니다. 배터리가 다 떨어지면, 배터리로 인해 무거운 무게까지 온전히 자신이 부담하면서 힘들게 자전거를 타게 되니 말이죠.


  오후 4시 반, 해가 지기까지는 2시간 반 정도가 남은 시점입니다. 제 앞에서 저를 이끌어줬던 젊은 라이더는 제 집이 있는 방향으로 가는 모양입니다. 인증 도장을 찍고 도장을 말리던 차, 제가 지나왔던 자전거길에서 일곱 명 정도 되는 라이더 무리가 제 쪽으로 다가옵니다. 이윽고 그 무리의 리더인 것 같은 아저씨 한 분이 제게 친절하게 질문을 합니다.


  "학생, 어디서 출발했어요?"


  그분들도 종주를 하시는 모양입니다. 장거리 주행을 위한 복장을 갖춘 사람이 당시 주변에 저 말고는 없어서 그런 모양입니다. 서울에서 왔다고 하니, 사뭇 놀라시며 다른 질문을 하십니다.


  "이제 몇 시간 지나면 해도 떨어지는데, 여기 근처에 민박에서 합숙 어때요? 우리가 머릿수가 홀수라, 학생 끼면 짝수로 방 수도 예쁘게 떨어질 것 같은데. 여기 근처 숙박비 비싼 거 아시죠?"


  사실 숙박이나 기타 부분의 문제는 생각을 해보질 않은 터라, 아저씨의 질문은 제게 많은 생각이 들게 만들었습니다. 첫날에는 어쩌다 보니 220km 가까이 라이딩을 하는 바람에 경황이 없던 찰나, 이화령에서 운 좋게 착한 라이더 한 분을 만나 같은 숙소에서 각방을 했습니다. 거기서 묵을 계획 자체가 머리에 없었는데, 흘러가는 대로 묵게 된 것이죠. 더군다나 어제의 숙소는 국토종주길 바로 옆에 있는 곳이라 더욱 좋은 조건이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사정이 좀 다릅니다. 대구는 대도시라서 숙박비가 확실히 비쌉니다. 아저씨의 제안을 따르면, 숙박비를 상당히 아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른 시간에 휴식을 취하면 내일 좀 더 정비를 해서 쾌적하고 안전한 라이딩을 할 수 있겠죠. 마음이 기울어지려는 찰나였습니다. 그런데, 아저씨가 다시 말씀을 하십니다.


  "학생, 보니까 어제오늘 상당히 많이 탄 것 같은데. 힘들면 무리하지 말고 그냥 오늘 우리랑 같이 묵고 가요."


  잠시 생각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아저씨께 '잠시 생각해보겠다'라고 말씀을 드리니, 일행들 쪽으로 돌아가시며 '결정하면 알려달라'며 돌아섭니다.

  저를 걱정하는 친구들이 '그 정도만 해도 대단하다'며, 다음을 기약하고 집에서 쉬라는 제안을 카톡으로 보냈습니다. 사실 직전까지만 해도 '포기하고 집을 갈까'는 생각이 머리에 가득이었습니다. 좀 전에 만난 국토종주 왕복을 하는 형제들도 '조금씩 나눠서 가면, 오래 걸리더라도 충분히 완주할 수 있다'며 제게 쉬운 길로 가라는 조언을 해줬습니다. 지금 제 앞의 아저씨도 '힘들면 무리하지 말고 그냥 쉬어라'는 말을 제게 던집니다.


  제 뒤에 있는 인증센터 부스로 들어가, 위에 달린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봅니다. 날벌레 시체와 땀, 그리고 먼지가 뒤섞여 얼굴에 덕지덕지 붙어있습니다. 면도를 하지 않아 지저분한 수염에 땟국물이 고여있고, 눈은 거의 다 풀려갑니다. 당장이라도 쉬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다시 수첩을 펴, 다음 인증센터인 달성보까지의 거리를 봅니다. 대략 25km, 현재의 상태로는 빠듯하게 잡아도 2시간이 걸릴 거리입니다. 숙소가 있는 달성군 번화가까지의 거리도 고려한다면, 30km가 넘는 거리를 가야 합니다. 저는 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국토종주의 목적이 무엇이었나?


  사실, 국토종주의 시작은 '재밌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저는 여행을 좋아하고, 자전거를 이용하면 걷는 것보다 빠르게 이동하면서 차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날씨나 기타 조건들을 핑계로 계속해서 출발을 미루고 미뤄왔습니다. 그러다가 어머님과의 통화 한 번으로 국토종주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죠. 제가 가진 마음속의 나약함을 극복하기 위해, 바로 저의 '끈기'를 테스트하기 위함입니다.


너는 끈기가 없다.


  내 의지로 무엇 하나 끝까지, 계획대로 완수한 적이 별로 없는 인생입니다. 주어진 상황대로 맞춰 살고, 하다가 힘들면 대충 내팽개치는 인생이었습니다. 주변에서 '운동 열심히 한다, 성실하다'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스스로를 돌이켜보면 부끄러울 수준인 것도 사실입니다. 얼마 전 어머님과의 통화에서, 이 국토종주는 제 자신을 바꾸기 위한 일종의 도전으로 변했습니다. 저는 지금 저를 바꾸기 위한 도전을 하는 것입니다. 끈기를 가지는, 마음을 강하게 바꾸는 도전 말입니다.


  친절한 아저씨의 말씀에 또 마음을 약하게 먹는 실수를 저지를 뻔했습니다. 아저씨들이 계신 무리에 돌아가 '저는 좀 더 가겠습니다.'는 말씀을 드리고, 안전하게 라이딩하라는 인사를 주고받은 뒤 다시 길을 떠납니다. 이번만이라도, 약해지려는 마음을 부수고 스스로를 채찍질하자는 마음을 먹습니다.


짙은 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살은, 많은 고민 속에 몸부림 치는 저의 끈기를 닮아있습니다.


  갑작스럽게 강하게 부는 바람, 하늘은 점점 구름으로 가득 해지며 태양을 가립니다. 몸의 땀이 급속도로 마르면서 체온을 뺏어가고, 점점 몸과 마음이 지쳐갈 즈음에 다시 태양이 구름 사이를 뚫고 빛줄기를 쏘아 보냅니다.


  심란했던 제 마음속, 스스로의 의지로 다시 길을 출발했던 상황과 너무도 닮아있는 하늘의 풍경을 보며 다시 마음을 다잡습니다. 마치 하늘이 제 의지를 높게 사고 제게 준 선물과도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문경 불정역 인근에서의 경치가 단순히 미적으로 최고의 경치였다면, 달성보 인근에서의 하늘은 제 마음을 대변해주는, 제 심금을 울리는 선물과도 같은 순간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떻게 갔는지 기억은 전혀 나지 않지만, 어쨌든 달성보 인증센터에 도착하게 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어떻게 갔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지만 달성보 인증센터에 도착을 했습니다. 얼른 도장을 찍고, 스마트폰으로 인근 숙소를 검색한 뒤 지체 없이 출발을 합니다. 사진 상에는 잘 보이지 않는데, 점점 날이 어두워지는 것이 체감이 될 정도였습니다. 제 자전거 라이트가 성능이 좋지 않아 어두워지면 매우 위험하기 때문에, 빠르게 길을 나섭니다.

  숙소는 달성군 유가읍의 번화가에 있는 모텔을 선택했고, 곧바로 숙소로 향합니다. 잠시 뒤면 맛있는 저녁과 편안한 숙소가 기다린다는 생각에 몸에 힘이 샘솟습니다!


  숙소로 향하던 중, 예전에 가족들과 함께 들렀던 카페를 지나가게 됩니다. 그 카페를 보니, 갑자기 가족들 생각이 문득 듭니다. 스마트폰을 꺼내 어머니, 아버지께 차례로 통화를 겁니다. 지금 국토종주 중이고, 좀 전에 달성군으로 들어와 숙소를 찾는 중이며, 내일 부산에 도착할 것 같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이때의 전화 내용이 기억이 잘 나진 않습니다. 하지만 제게 큰 힘이 되었다는 것만은 확실히 기억이 납니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험난했던 여정을 마치고 가족에게 돌아가기 위해 저는 이 여정을 잘 끝마쳐야만 합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근처 코인세탁소에서 빨래를 돌려놓은 뒤 밥을 먹고 돌아와서는 완전히 곯아 떨어졌습니다.


  숙소로 잡은 곳은 방금 전까지 국토종주로 지나왔던 강과 산길과는 정 반대의 화려한 번화가의 변두리에 있습니다. 근처에는 술집과 식당, 각종 유흥시설과 아파트와 회사 등으로 즐비합니다. 달성군은 마냥 시골인 줄로만 알았는데, 막상 가보니 그렇지도 않더군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다 벗어던지고 샤워를 한 뒤, 옷을 챙겨서 코인 세탁소로 향합니다. 어제 빨래를 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손빨래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세탁도 제대로 되질 않으며, 탈수가 제대로 되지 않아 다음 날 옷이 젖은 상태로 타는 불상사가 생깁니다. 빨래를 돌린 뒤 약국에 가서 각종 파스와 소염제, 진통제 등을 사고 식당에 가서 적당히 끼니를 때웁니다. 돼지고기 덮밥이었는데, 나온 지 정확히 5분 만에 다 먹어치웠습니다.


  편의점에 들러 내일 먹을 간식을 사고, 세탁방에서 옷을 찾아 숙소로 돌아옵니다. 유가읍 인근을 돌아다닐 때는 신고 온 운동화 대신 숙소에서 제공하는 얇은 슬리퍼를 신고 돌아다녔는데(숙소 주인의 허락을 맡았습니다. 어차피 사용한 슬리퍼는 버리니까 알아서 하라고 합니다 ㅋㅋ), 문득 길거리의 옷가게 쇼윈도에 비친 제 모습을 보니 거지가 따로 없습니다. 옷 한 뭉치를 들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수염이 듬성듬성 난 게 완전히 노숙자나 다름이 없더군요. 순간 부끄러움이 몰려와 숙소로 도망치다시피 돌아왔습니다.


  숙소에 돌아와 자전거에 이상이 없는지 다시 살펴보고, 옷을 말리기 위해 잘 널어놓은 뒤 약국에서 산 각종 진통제와 소염제, 파스 등을 사용합니다. 갑자기 몰려오는 갈증을 날리기 위해 물을 두어 병 원샷하고, 오늘 라이딩의 복기와 내일 있을 라이딩을 계획해봅니다.



* 오늘, 그리고 내일의 라이딩


약 177km, 적지 않은 거리를 달렸습니다.


  오늘의 라이딩 거리는 약 177km입니다. 어제의 라이딩 거리인 220km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국토종주 일정을 제외하고 본다면 평소보다 훨씬 많은 거리를 탄 것이 사실입니다. 이화령이나 소조령 같은 장거리 업힐은 없었지만, 중간중간 짧고 굵은 업힐이 제법 있었습니다. 게다가 어제의 220km 라이딩으로 인해 몸에 축적된 대미지가 강했기 때문에, 오늘은 원래 컨디션보다 한참 모자란 상태로 자전거를 타야만 했습니다.


  오늘 먹은 것들도 매우 부실했습니다. 아침에 빵 한 봉지, 음료수 몇 병, 그리고 점심에 바나나 두어 개와 컵라면 하나가 끝입니다. 저녁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긴 했지만 오늘 소모한 칼로리를 보충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양입니다. 내일은 좀 더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신경을 써야겠습니다.


  또한, 높은 악명 그대로 낙동강 코스는 지옥과도 같았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평화로운 시골의 강변길을 따라 달리는 것 같지만, 매우 긴 구간 동안 전혀 보이지 않는 편의시설은 사람의 진을 빼놓기에 충분했습니다.


  중간에 끼니도 제대로 먹지 않은 상태로 무모하게 자전거를 탄 탓에 잠이 쏟아지지만, 코인 세탁소 덕에 세탁 시간을 줄여서 저녁 시간이 충분하기에 내일 라이딩을 계획해봅니다.


  내일은 그 악명이 자자한 네 개의 업힐, 다람재 / 무심사 / 박진고개 / 영아지고개 를 넘어가야 합니다. 심지어 이 업힐들은 일정의 오전에 모두 소화해야 하는, 즉 일정의 초반부에 모두 몰려있습니다. 지금까지도 충분히 힘들었는데, 더욱 힘든 여정이 기다리는 셈이죠.


  이제 남은 거리는 약 180km입니다. 어제와 오늘처럼 한 번에 소화할 수도, 몇 번에 나눠서 달릴 수도 있습니다. 선택은 내일의 제 몫입니다. 특별한 업힐이 없었던 오늘도 이렇게 힘들게 숙소에 도착했는데, 국토종주 중 가장 힘든 네 개의 업힐을 넘은 뒤의 제가 과연 부산까지 도착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섭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이제 남은 여정은 1/3입니다. 안 되면 끌어서라도 도착을 할 생각입니다. 다리를 비롯한 몸 곳곳이 말썽이지만 오늘 했던 것처럼 끝까지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불어넣어봅니다. 신체 곳곳 아프지 않은 곳을 세는 것이 더 빠를 정도로 몸이 쑤시지만 번화가에 둘러싸인 숙소 주변에서 들리는 왁자지껄한 소리를 들으며, 어제와 오늘 달렸던 자전거 길들을 떠올리며 잠을 청해봅니다. 내일 있을,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 있는 국토종주 일정을 위해서 말이죠.


 -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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