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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라 Oct 11. 2020

#10. 국토종주 3일 - 끝을 향해

남은 거리 약 170km, 대망의 마지막을 향해

* 지난 줄거리


  길고 길었던 이틀 간의 라이딩을 마친 저는 무사히 달성군의 한 번화가에 숙소를 잡고 휴식을 취합니다. 누적 라이딩 거리 약 400km, 앞으로 왔던 거리의 1/3만 더 가면 도착입니다. 미처 출발 소식을 알리지 못했던 가족에게 '내일이면 부산에 도착한다'는 연락을 한 뒤, 내일 여정에 대한 걱정과 기대를 안고 잠에 듭니다.




#10. 끝이 보인다, 부산을 향해 달리자.


* 170km의 마지막 여정을 시작하다


  언제 잠들었는지도 몰랐는데, 울리는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깹니다. 새벽 5시가 좀 넘은 시간, 아직 밖은 그리 밝지 않습니다. 일어나기가 괴로울 정도로 싫지만, 온몸이 쑤시는 통에 잠을 더 잘 수도 없습니다. 이제는 당연한 듯이 일어나 몸 상태를 체크하고, 수분 보충을 위해 물은 연거푸 들이켭니다. 몸 컨디션, 특히 다리 상태는 어제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나아지진 않은 상황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포기하기에는 지금까지 달려온 여정이 너무 아깝습니다. 다소 고통이 있더라도 참아야만 합니다. 우선은 어제 샀던 진통제를 두 알 먹습니다. 벌써 약효가 올라올 리는 없겠지만, 체감 상으로는 훨씬 나은 기분이 듭니다. 덜 마른 옷들을 대충 챙겨 입고, 짐을 챙긴 뒤 자전거와 함께 숙소를 나섭니다.


  오늘은 국토종주 코스에서도 소문난 난코스인 네 개의 업힐을 넘어야 합니다. 일정의 오전에 네 개의 업힐을 모두 넘어야 하기에, 에너지 보충이 최우선 과제입니다. 그렇기에,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아침을 먹고 출발하기로 합니다.

  식당은 국토종주 자전거길 입구로 가는 길에 있는 설렁탕집을 들렀습니다. 다른 식당들도 많지만, 그렇지 않아도 피로가 많이 누적된 지금은 단 1m라도 아껴서 온전히 부산을 도착하는 것에 사용해야 합니다. 솔직히 뼈다귀 해장국이 너무나 먹고 싶었지만, 먹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 그냥 설렁탕으로 시켰습니다.


피곤함 때문인지 잘 넘어가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다 먹긴 했습니다.


  밖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식사를 하는 저의 모습이 흥미로웠는지, 사장님께서 이것저것 물어보십니다. 이틀 전에 서울에서 출발해 오늘 부산까지 갈 예정이라고 하니, 굉장히 놀라워하십니다. 아픈 곳은 없는지, 그간 밥은 잘 먹으면서 내려왔는지 물어보시더군요. 이렇게 아침에 식사를 하고 출발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라, 사실대로 말씀을 드렸더니 '밥값은 내지 않아도 된다. 공깃밥도 더 필요하면 얼마든지 달라고 해라.'며 저를 응원해주십니다.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호의에, 저는 넙죽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딱 한 공기의 밥만 더 먹고 식당을 나섰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한 그릇 정도야 쉽게 더 먹고 나왔겠지만, 피곤한 탓인지 입맛이 전혀 없어서 억지로 한 그릇을 더 먹었습니다.


  국밥집 사장님의 따뜻한 정을 느끼며 식당을 나선 저는 본격적인 오늘의 라이딩을 시작하려는 찰나... 주머니에 낯선 카드 한 장이 만져집니다. 아뿔싸... 묵었던 숙소의 투숙실 키를 들고 나와버린 것입니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이지만, 애써 출발지 가까운 식당까지 왔는데 다시 유가읍 시내까지 돌아가야 합니다. 처음부터 사장님의 정이 듬뿍 담긴 식사로 산뜻한 출발을 하나 싶었는데, 키를 들고 와버리는 실수로 결국 초기화(?)가 되었군요. '1m라도 아끼자'라는 다짐을 했던 좀 전의 제 자신이 어이가 없게 느껴집니다 허허...


  어쨌든, 약 5km 정도 왕복하여 키를 돌려주고 온 저는 진짜로 부산을 향해 발걸음, 아니 바퀴를 굴리기 시작합니다. 부디, 오늘이 일정의 마지막이 될 수 있기를!


남은 거리 174km, 이제는 저 숫자에 속지 않는다!


* 지옥의 업힐 사천왕, 다람재ㆍ무심사ㆍ박진고개ㆍ영아지고개


  역시나, 자전거에 올라타고 채 30분이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엉덩이와 다리를 비롯해 온 몸이 아픕니다. 오늘 업힐을 자그마치 네 개나 넘어야 하는데, 벌써부터 걱정이 앞섭니다. 지금 몸상태는, 이미 자전거를 최소 100km는 탄 것 같은 컨디션입니다. 아직 채 20km도 타지 않았는데 말이죠.


  하지만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대망의 첫 번째 업힐인 '다람재'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몸과 정신을 사정없이 괴롭혀 고민할 시간도 주지 않겠다.'는 낙동강 종주길의 악랄함이 그대로 느껴집니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정식 루트, 포장도로를 따라 직진하면 터널을 지나는 우회로입니다.


  저 먼발치에 보이는 산이 분명 다람재일 겁니다. 마침, 깨끗하게 잘 닦인 포장도로가 새로 만들어진 것 같은 깨끗한 터널로 이어진 것이 보입니다. 누가 봐도, 터널을 통하면 어렵지 않게 저 산을 지나갈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자존심이라는 것은 참으로 야속합니다. 정말 얄밉게도, '우회로'라는 표현을 써서 사람의 자존심을 적극적으로 건드리니 말이죠. '우회'라니, 마치 피해서 간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저는 결국 터널을 등지고 왼쪽의 정식 루트를 선택하기로 합니다. 다른 이유도 많겠지만 항상 결정적인 이유는 같습니다. 이번이 아니면, 또 언제 여기에 올지 모르기 때문이죠. 자존심 때문에 억지로 다람재를 올랐다는 건 비밀 아닌 비밀입니다.


다람재 정상은 무척이나 추웠습니다.


  예상대로, 다람재는 매우 가파른 경사입니다. 구불구불하고 가파른 경사를 아픈 몸으로 올라가려니, 중간에 자전거에서 내려 끌고 올라가고 싶은 생각이 수도 없이 듭니다. 하지만 국토종주를 하며 오르락내리락했던 수많은 업힐과 다운힐의 노하우 덕일까요, 의외로 올라가는 것이 그렇게 힘들지만은 않은 기분입니다. 다리 곳곳의 크고 작은 근육들, 상체의 근육들까지 골고루 섞어가며 최대한 피로를 분산시키는 느낌을 깨달은 것 같습니다. 쉽게 말하면, 요령이 생긴 것이죠. 다람재 정상에 올랐을 때, 너무나도 뿌듯했습니다. 좀 전까지의 부족했던 자신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다시 자신감으로 충만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몸도 살짝 풀린 것인지, 아니면 진통제의 효과가 올라온 것인지는 몰라도 컨디션도 훨씬 많이 좋아진 것 같습니다.


  벌레도 많고, 5월 말 치고는 너무 쌀쌀한 날씨 탓에 그리 오래 쉬지는 않고 얼른 다람재 정상에서 내려왔습니다. 내려가는 동안 업힐을 올라오는 라이더 한 무리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충만한 자신감으로 다시 길을 나섭니다. 땀이 식으며 서늘해지는 등줄기가 다시금 정신을 번쩍 뜨이게 해 줍니다.


다람재 꼭데기의 경치를 보며 자신감을 얻고 갑니다.


  다람재 다운힐을 내려와 도동서원 앞을 지나는 잠깐의 공도 주행이 끝나면, 다시 자전거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시간을 지체할 것 같아 사진을 남기진 못했으나, 중간중간 캠핑장이 자주 나옵니다. 절벽에 만들어놓은 괴상한 자전거길도 지나고,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심각한 경사의 자전거길도 더러 나옵니다. 그렇게 자전거길을 가다가 갑자기 공도로 빠지기도 하고, 그렇게 자전거길과 공도를 번갈아가며 왔다 갔다 하게 되면서 짧고 굵은 오르막과 내리막을 수도 없이 오르내리게 됩니다. 다람재와 같은 통짜 업힐도 힘들지만, 제게는 이런 낙타등 모양의 오르락내리락하는 코스들이 더 힘들었습니다.


  노면 상태도 결코 좋지 않았습니다. 출발 전에 인터넷을 통해 봤던 말들에 비하면 훨씬 나은 상태이긴 하나, 자전거길 자체가 도로 옆으로 난 곳들은 도로에서 나온 수많은 돌조각들과 플라스틱 조각 등의 날카로운 이물질이 쌓여 있어 펑크나 미끄러짐으로 인한 낙차 등을 매우 신경 쓰며 주행을 해야만 했습니다. 공도를 타는 중 옆으로 지나가는 일반 차량, 특히 화물트럭이 옆으로 지나갈 때는 돌풍이 심하게 불기 때문에 역시 주의를 요하였습니다.


  그렇게 길을 계속 가다 보면, 오늘의 두 번째 업힐인 '무심사'가 라이더들의 앞을 가로막습니다.


무심사를 우회할 수 있다는 친철한(?) 안내판.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우회로를 이용하면 매우 쉽게 합천 창녕보를 갈 수 있습니다.


  무심사, 정말 귀가 닳고 눈이 아프도록 듣고 본 이름입니다. 절벽에 난 절과 산길을 가로지르는 특이한 구성, 오르는 사람의 다리가 비명을 지르게 만드는 초반의 경사, 결국에는 자전거에서 내리게 만드는 순간 경사도 26%라는 미친 구성의 업힐이기에 사람들의 입담에 오르내리기에 충분한 유니크함(?)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람재에서 얻은 자신감 덕분일까요, 이번에는 사진만 얼른 찍고 무심사를 향해 돌진합니다. 사실, 이곳은 자전거를 끄는 한이 있더라도 꼭 지나가 보고 싶었습니다. 이유는 순전히 호기심 때문입니다. 대체 길이 어떤 모양이길래 사람들이 그렇게 입이 닳도록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했거든요. 게다가, 우회로는 공사 중이어서 지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저는 좋든 싫든, 아는 길이 무심사를 가로지르는 것 말고는 없으니 입 꾹 다물고 올라가야죠.



  그렇게 무심사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심상치 않은(?) 글귀들이 안내판 아래에 적혀있습니다. 대충 요약하자면 '어디 가냐, 뭐하러 여기 왔냐, 국토종주 왜 하냐, 이유가 뭐냐, 그러면 행복해질 것 같냐'는 투의 내용들이었는데, 사전에 무심사의 괴랄함을 경고하기 위함...일까요? 내용이 완전히 왜곡된(?) 것일 확률이 1000%이니,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직접 가서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


내리지 않고 오르느라 사진이 없어, 다른 사진으로 대체합니다. [출처 - 바이크미슐랭 https://bikemichellin.tistory.com/?page=7]


  그렇게, 무심사의 입구에 도착한 저는 재빨리 자전거의 기어를 풀 이너로 돌립니다. 즉, 가장 낮은 기어비로 내렸다는 것입니다. 그 경사를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기어를 내리지 않으면 절대 올라갈 수 없는 경사임을 직감했습니다. 길의 상태는 과거에 집 근처의 청계사에서 올랐던 빨래판 업힐처럼 울퉁불퉁했고, 좌우로 구불구불하게 올라가기 때문에 순간 경사도가 미친 듯이 솟아올랐으며, 그렇게 첫 번째 경사를 극복하고 절이 보이는 구간까지 가서 다음 경사를 보는 순간에는 정말 의지를 완전히 꺾어버리고 맙니다. 여기서 멈추면, 절대 다시 자전거에 올라타서 올라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든 저는 사진도 포기하고 일단 올라가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그렇게 한 세월이 가도록 페달을 억지로 밟으며 올라가기 위해 애를 쓰지만, 가장 낮은 기어비임에도 불구하고 페달이 쉽사리 돌지를 않습니다. 경사가 워낙 심해서, 상체를 살짝만 들어도 자전거와 함께 몸이 뒤로 완전히 넘어가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몸을 자전거에 완전히 바짝 붙인 채로, 몸의 무게를 페달에 실어가며 억지로 조금씩 올라가야 겨우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가장 환장할 것 같은 부분은, 그렇게 힘든 와중에도 무심사 전체에 울려 퍼지는 염불 외우는 소리입니다. 업힐은 당연히 힘들지만, 그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업힐인 무심사 업힐을 염불을 들으며 올라가는 기분이란... 문자 그대로 '고행'에 가까웠습니다.


무심사 옆을 지나면, 곧바로 그냥 산길이 나옵니다. 여기는 자전거길도 아닙니다...


  그렇게 약 십몇여 분의 업힐이 끝나면, 무심사 뒤로 펼쳐진 산길이 등장합니다. 최소한 무심사 안은 콘크리트로 포장이라도 해놓았지만 여기는 그냥 등산로였습니다. 정말 불행 중 다행이라면 무심사를 지난 뒤 잠깐의 임도는 평지였기 때문에, 이곳에서 잠시 자전거에서 내려 물을 마시며 좀 전의 황당했던 경험이 사실인지 잠시 생각에 잠겨봅니다.


  그렇게 약 30분 정도 산속을 지나서 가다 보면 갑작스러운 급경사의 내리막이 하나 등장하는데, 아래에는 엄청난 소똥 냄새와 함께 수많은 소 친구들이 무심사 여정을 마친 저를 반갑게 맞이해줬습니다. 차가 쌩쌩 달리는 공도를 지나다가, 낙동강 옆을 달리다가, 갑자기 염불을 들으며 절을 올랐다가, 산속을 자전거로 헤매다 갑자기 소들을 무더기로 만나서 소똥 냄새를 맡고 있자니 정신이 아득해집니다. '지금 이거 현실이지? 꿈 아니지?'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소들아, 혹시 무심사에 올라가본 적 있니?


  괜히 소들에게 가까이 가서 '무심사 가봤니?'라고 물어볼 뻔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린 저는 비탈길을 마저 내려가 자전거길에 다시 올라섭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으면, 합천창녕보 인증센터가 나타납니다.


날씨는 끝내주게 좋았습니다. 업힐도 끝내주게 힘들었습니다(?)


  인증센터에서 얼른 도장과 사진을 찍고, 업힐을 올라가느라 다 마셔버린 물을 채우러 잠시 건물 안에 들렀습니다. 점점 날씨가 더워지는 것이 느껴집니다. 구름이 서서히 걷히며 햇살이 쨍쨍해지고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데, 이제 본격적으로 여름이 다가오는 모양입니다. 그렇게 잠시 자리에 앉아 경치를 구경하며 양갱과 물을 마신 후, 시간을 확인해봅니다. 약 8시 30분, 식사 후 달성군에서 출발했을 때가 6시 반 정도이므로 2시간 경과한 상황입니다. 대충 30km 정도 되는 거리를 달려온 셈인데, 초행길인 데다 업힐 두 개를 넘은 것을 감안하더라도 2시간이나 걸린 것은 썩 좋은 기록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기록 자체를 신경 쓰며 자전거를 타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오늘 안에 부산까지 도착도 해야 하고, 부산에서 다시 고향인 대구까지 버스든 기차든 타서 집으로도 돌아가야 하니 시간이 많지는 않은 셈입니다.


  다음 목적지인 창녕함안보까지는 약 55km가 남았고, 그전에 점심식사를 위해 들릴 예정인 남지읍은 약 47km가 남았습니다. 적어도 정오 전까지는 남지읍에 도착해야만 합니다. 제게는 그리 오래 쉴 여유가 없습니다. 약 10분 정도 쉰 뒤, 다시 길을 나섭니다.


후... 절로 한숨이 나오는 순간입니다. 박진고개 앞에서 이화령이 떠오른 것은 왜일까요?


  어김없이 공도와 자도를 왔다 갔다 하며 약 1시간 반 정도 달리자, 뭔가 익숙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이것은 마치... 이화령 고개를 오르기 전의 그것과 매우 흡사합니다. 저 멀리 업힐이 보이고, 갑자기 왼쪽으로 업힐이 쓱 꺾이며 이후로는 경로가 보이지 않습니다. 순간, 저는 지도를 보지 않아도 이곳이 '박진고개'임을 직감했습니다. 주변에는 마땅한 우회로도 보이지 않습니다. 우회를 하려면 진작에 다른 길로 갔어야 했습니다. 이미 피곤에 찌든 채로 그냥 페달만 돌리며 왔기에, 우회로를 찾는 등의 치밀함 따위는 오래전에 없었습니다.


  이곳 역시 명성이 자자합니다. 듣기로는, 올라가는 곳의 외벽에 수많은 자전거 망자(?)들의 유언과 비명이 글로 남아있다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경사도가 그들에게 강제로 끌바를 하게 만드는 모양입니다. 이미 접한 정보들만으로도 공포감은 충분히 조성이 되지만, 가장 두려운 점은 사진에서 보이는 저 도로의 끝 부분 너머로 뭐가 있을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저 코너를 돌면, 대체 얼마나 긴 경사가 기다리고 있을까요? 대략 저 경사가 100m를 조금 넘는 것 같은데, 박진고개의 길이가 약 1.3km니까 1.2km를 더 올라가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온갖 복잡한 생각들이 다 드는 순간이었지만, 우선은 올라가며 눈으로 확인하기로 합니다.


  올라가며 눈으로 확인하자는 저의 생각은 굉장히 어리석었습니다. 눈으로 확인이고 자시고, 여기는 제가 국토종주를 하며 올랐던 그 어떤 업힐보다도 가장 힘들었던 업힐이었던 것 같습니다. 일반 차들도 거의 다니지 않는 이곳의 경사도는 평균 12% 정도입니다. 앞선 무심사의 최대 순간 경사도가 28%이니까 훨씬 낫지 않을 수 있냐 생각하실 수 있지만, 여기는 경사도가 처음부터 끝까지 꾸준히 12%입니다. 무심사처럼 중간중간 평지가 섞인 곳이 아니라는 소리죠.


  종합하자면, 다람재의 경사도와 이화령ㆍ소조령의 구불구불한 코스 구성을 종합한 고난도의 업힐인 것입니다. 지난 국토종주 업힐의 모든 경험들을 총동원해 최대한의 근성과 노력, 그리고 노하우를 끌어내어 올라가야만 했습니다. 이따금씩 오른편에 보이는 수많은 낙서들, '결국 끌고 올라간다'는 내용들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저도 내려가고 싶어 집니다. 하지만, 종합적으로 봤을 때 여기서 내려서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게 되면 시간도 많이 들고, 칼로리 소모도 더 심해집니다. 당장 힘들더라도 무조건 자전거를 타는 것이 이득입니다. 내리면 망한다는 생각으로 어떻게든 정상까지 올라갑니다.


박진고개 정상의 경치가 멋지긴 합니다. 하지만, 아름다운지는 잘 모르겠네요...


  정말, 지옥 같은 업힐이었습니다. 그 어느 순간보다도 심장이 거칠게 뜁니다. 어디든 앉을 곳이 있으면 앉아서 쉬고 싶은데, 마땅히 앉을 곳은 또 없습니다. 대충 아무 데나 주저앉아 물을 마시며 주변을 둘러봅니다. 힘들게 올라온 보람이 느껴지는 경치였지만, 아름다운 경치라고 적어놓은 안내판의 내용에는 쉽게 동감하기 어렵군요... 어서 빨리 낙동강 옆으로 자전거길을 만들어주시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여기는 다시는 오고 싶지 않습니다 ㅜㅜ


인증샷과 함께, 이곳에서 사망한(?) 수많은 라이더들의 유언을 담아봤습니다.


  마침 이곳에서 쉬던 부부들이 저를 보시더니, '여기를 자전거로 올라왔냐'며 혀를 내두르십니다. 수많은 동호인들이 이곳에 오지만, 여기까지 자전거를 끌고 도착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합니다. 튼튼한 체력, 강인한 멘탈을 소유한 자만이 이곳을 보는 모양입니다. 두 분의 말씀을 들으니, 다시 힘이 납니다. 마침 햇볕도 따갑고 점점 날씨가 더워지니, 다운힐을 가르며 시원한 바람을 느껴야겠습니다. 사진 몇 장을 남긴 후, 다시 길을 나섭니다.


영아지고개는 무심사 이상의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렇게 박진고개를 내려와 조금만 더 가면, 이내 곧 '영아지 마을'이라는 곳이 나타납니다. 그렇습니다. 이곳은 '영아지 고개'의 초입입니다. 이곳 역시 무심사와 마찬가지로, 우회로가 공사 중이었습니다. 다른 길을 찾아보면 되지만, 이미 영아지 마을 안까지 들어와 버린 저는 영아지 고개도 관통하기로 결심합니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길 옆으로 어르신들께서 열심히 밭일을 하고 계셨는데, 다들 저를 신기하게 쳐다보십니다. 하긴, 지금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했습니다. 그 길은 자전거 가라고 만든 길이 아니었으니까요...


  마을회관 앞에서 쉬시던 노인 한 분께서 제게 말을 거십니다. 저기를 자전거 타고 올라갈 거냐고 말이죠. 그렇다고 말씀을 드리니, 한숨을 푹 쉬십니다. 저는 더더욱 겁이 났습니다.


  그렇게 파랗게 그어진 라인을 따라 아주 조금만 더 가면, 노인 분께서 쉬신 한숨이 단번에 이해가 되는, 어이가 없는 경사가 나타납니다. 위의 사진에서 저 정도의 경사라면, 눈으로 보면 그냥 벽에 가깝습니다. 이곳의 경사도는 순간 최고 경사도 32%인 경천대 매협재보다도 더 높은, 무려 42%의 경사도입니다. 좀 전의 무심사는 적어도 몸을 앞으로 숙이면 어떻게든 자전거가 뒤로는 넘어가지 않는 경사도였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아예 자전거에서 완전히 일어나 몸을 앞바퀴 너머로 빼고 있는 힘껏 댄싱을 해야 겨우 올라갈 수 있는 곳입니다. 대체, 저 바깥의 좋은 낙동강 둘레를 놔두고 이곳에 자전거길을 만든 이유가 궁금해지는 순간입니다.

  정말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 초입부의 미칠듯한 경사도를 극복하면 이후로는 무심사와 유사한(?) 임도로 길이 바뀝니다. 평소, 무심사를 오르기 전의 저였다면 이 산길조차도 황당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미 무심사의 어이가 없는 산길을 한 번 지난 뒤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말도 나오지 않는 업힐 이후에는 그럭저럭 지나갈만한 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영아지 고개가 초입만 힘든 것은 아닙니다. 산길 속의 수많은 낙타등 코스를 계속 반복해서 지나야 하는 어려운 코스입니다. 주행에 많은 신경을 써야 합니다.


중턱의 작은 정자에서 잠시 물을 마시기 위해 쉽니다.


  그렇게 수백 미터를 지나면, 잠시 쉼터가 나옵니다. 여기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등산로와 같은 곳입니다. 그런 탓인지, 등산을 오신 분들이 더러 보입니다. 자전거를 타고 여기에 온 저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시선은 덤입니다. 저도 제가 산을 자전거로 오를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그분들에게는 당연히 제가 신기하게 보일만도 합니다.


자전거를 타고 오지 않았다면, 절대 볼 수 없었을 경치입니다. 가슴 속에 뭔가 뭉클한 것이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정자를 지나 조금만 지나면, 데크로 지어진 전망대에 도착합니다. 이곳에서의 경치는 뭐랄까요... 앞선 네 개의 업힐을 넘은 저에게는 큰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어제저녁까지만 하더라도, 몹시 피곤하고 아픈 몸 상태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 걱정은 자연스럽게 오늘의 업힐에 대한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저는 평지구간의 사진 촬영을 제외하면 한 번의 정차도 끌바도 없이 네 개의 업힐을 모두 넘었습니다. 솔직히, 이것이 가능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불과 자전거를 탄 지 2달도 되지 않은 초보가 국토종주를, 그것도 우회도 없이 모두 정상 루트를 통해 업힐을 모두 올라가면서 말이죠. 아직 종주가 채 끝나지는 않았지만, 가장 걱정이었던 네 개의 마왕 업힐을 넘은 뒤에는 많은 생각이 스쳐갔습니다. 자신감이 생긴 것이죠.


  그렇게 감상에 젖어 몇 분간 먼발치를 바라보다, 다시 길을 나섭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남지읍입니다. 남지읍에서는 밀면을 먹을 계획입니다. 저는 밀면을 정말 미치도록 좋아하는데,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이전에 먹었던 설렁탕이든 양갱이든 이미 소화가 다 되어 배가 꼬르륵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얼른 가서 점심을 먹기로 합니다.


다소 좋지 못한 길 상태, 그리고 예상치 못한 업힐을 마지막 난관으로 저는 남지읍에 도착해 밀면을 흡입했습니다.


  남지읍에 들어가기 전, 다소 고르지 못한 포장길과 예상치 못한 고난도의 짧은 업힐이 등장했습니다. 그 무수한 업힐을 모두 자전거로 오른 저였지만, 앞선 네 개의 업힐에서 힘을 모두 쏟은 탓인지 이 업힐에서는 도저히 힘이 나질 않았습니다. 다행히도 거리가 채 500m도 되지 않는 짧은 거리라 끌바를 했고, 이후에 남지읍에 들어선 저는 미리 찾아놓은 밀면 식당에서 밀면 곱빼기를 시켰습니다.


  주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밀면 한 그릇이 나왔고, 저는 곱빼기로 나온 밀면을 거의 게가 눈을 감추듯 순식간에 해치우고 나왔습니다.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오는, 제법 유명한 밀면집이었습니다. 물론 맛있었지만, 자전거를 탄 이후의 공복에 먹은 밀면임을 감안하더라도 제가 먹었던 밀면 중 최고의 밀면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제게 있어 최고의 밀면은 저의 고향인 대구 본가 근처의 모 밀면집에서 파는 밀면입니다.


  업힐 네 개도 넘었겠다, 배도 부르겠다 뭔가 여유와 힘이 생겨납니다. 아직 시간도 12시가 조금 넘은 시간, 살짝 여유(?)를 부려보기로 합니다. 잠시 카페에 들러 카페인도 충전할 겸, 티타임을 가집니다. 자리에 앉아 찍었던 사진을 보며 잠시 감상에 빠져도 보고, 인증수첩의 도장들을 보며 기쁨을 만끽해봅니다. 앞으로 도장 세 개만 더 찍으면, 이 여정은 드디어 끝이 납니다. 마치 벌써부터 종주를 마친 것처럼 기뻤던 것 같습니다.

  특이하게도, 이 카페는 스포츠용 고글과 선글라스들도 판매하더군요.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잠시 구경을 해봅니다.


후덜덜한 가격에 감히 살 엄두조차 못 내지만, 눈호강은 충분히 했습니다.


  그렇게 몇 분을 여유를 부리며 커피를 다 마셔갈즈음,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듭니다. 너무 시간을 많이 지체한 겁니다. 부리나케 스마트폰을 꺼내 지도 앱을 켜고, 남은 거리를 계산해봅니다. 다음 인증센터인 창녕함안보까지는 약 9km, 이후 양산 물문화관까지는 55km, 그리고 마지막 낙동강 하굿둑까지는 약 35km입니다. 대충 다 더해보면 100km 정도 되는 셈입니다.


  맞습니다. 아직 저는 국토종주를 끝낸 것이 아닙니다. 이제 겨우, 오늘 가야 할 거리의 절반도 채 오지 못한 것입니다. 순간 놓았던 긴장의 끈을 다시 붙잡게 됩니다. 이렇게 일정이 지연되면, 오늘 대구로 가는 버스를 타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버스 앱을 켜서 시간을 확인해봅니다. 대구로 가는 버스가 저녁 7시 20분을 끝으로 마지막이군요. 여유 부릴 때가 아닙니다. 다시 황급히 길을 나섭니다.



* 깨져버린 페이스, 멘탈을 놓아버리다.


겨우 9km밖에 되지 않는 거리인데, 도착에 30분이 넘게 걸렸습니다.


  부리나케 길을 나선 저는 얼른 남지읍의 유채꽃길을 지나 '창녕함안보 인증센터'로 갔습니다. 참고로, 이곳의 정식 자전거길은 코스 구성이 굉장히 비효율적입니다. 다른 길로 들어서기 위해 빙글빙글 도는 구간도 많고, 그 도는 구간에서 계속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며 힘을 다 빼버립니다. 물론 노면 상태도 굉장히 좋지 못합니다. 차량 통행량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어차피 종주를 할 예정이라면 바로 옆의 공도를 이용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어차피 공도를 타면 창녕 함안보로 이어지기 때문이죠. 당시의 저는 그것을 몰라서 굉장히 힘들게 창녕 함안보까지 갔습니다.


  10km도 채 되지 않는 거리인데, 도착까지 제법 많은 시간을 소비했습니다. 평소와 같으면 채 30분이 걸리지 않을 거리인데, 30분이 훨씬 넘는 시간을 써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는 길이 좋지 않아 체력을 많이 소비한 것은 덤입니다. 점점 날씨도 더워집니다. 물병 안의 물은 따뜻하게 데워져 있고, 점심때 먹은 밀면은 먹었던 것조차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금방 소화가 되어버렸습니다. 커피를 마셨던 기억도 사라졌습니다.


  다음 목적지인 양산 물문화관까지의 경로를 검색해봅니다. 지도 상으로는 그리 어려운 길이 없어 보이지만, 방금 전의 길을 떠올려보면 순탄한 길은 아닐 것 같습니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 긴장의 끈을 놓고 여유를 부리던 제 자신을 반성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잠깐 지났던 9km의 경험, 그리고 시간이 벌써 2시에 가까워져 감을 느낀 순간 마음이 급해집니다. 얼른 도장을 찍고 길을 다시 나섭니다.


날이 정말 더웠습니다. 무엇보다, 강을 따라 부는 역풍은 최악이었습니다.


  어려운 업힐 네 개를 넘고, 남은 길은 평이하다는 생각으로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저의 크나큰 착각이었습니다. 여전히 짧은 업힐은 존재했고, 낙동 사막의 명색이 무색하지 않게 쉼터가 충분치 않았습니다. 해는 점점 뜨거워져 30도를 훌쩍 넘기는 기온이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역풍이 매우 심하게 불기 시작합니다.


  가뜩이나 3일 연속된 장거리 라이딩으로 체력이 없는 상황인 데다, 오늘 오전에는 네 개의 어려운 업힐을 무정차로 넘은 상황입니다. 이런 장거리 라이딩 경험이 처음이라 현재 체력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를 견디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점점 평속은 떨어지고, 물과 파워젤이 바닥이 나고 있었습니다. 양갱은 예전에 다 먹었습니다. 주변에 그늘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길 한복판에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든 순간, 참을 수 없는 막막함이 저를 엄습해옵니다. 이 막막함은 곧 불안함으로 이어졌고, 불안함은 초조함으로 바뀝니다.


  결국, 초조함을 이기지 못한 저는 그동안 잘 붙잡고 있던 멘탈을 놓고 맙니다. 더운 날씨, 계속 불어오는 맞바람, 점점 더해지는 온몸의 고통. 제 몸을 비롯한 모든 것들이 이제는 말을 듣지 않기 시작합니다. 누적된 피로에 더해지는 무더위와 역풍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가다 서다를 수도 없이 반복하고, 슈퍼나 카페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끊임없이 달려도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을 때의 절망감에 수차례나 의지가 꺾입니다.


  그렇게 억지로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가던 순간, 너무도 역풍이 거세게 불어 입에서 육두문자가 마구 쏟아지기 일보직전인 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특히, 밀양 근처에서 강 건너의 길을 놔두고 10km 가까이 한참을 돌아갔던 구간에는 기어코 화가 폭발해서 소리를 꽥 질렀습니다. 바로 눈 앞에, 강 건너에 길이 보이는데, 저기로 가기 위해 한참을 돌아서 가야만 한다니... 중간중간 이정표가 잘못 그려져 있어 가다 서다를 반복할 때면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게 됩니다.


오후 5시가 다 되어서야 겨우 양산 물문화관에 도착했습니다.


  그렇게 3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이 되어서야 '양산 물문화관 인증센터'에 도착했습니다. 양갱은 당연히 다 떨어졌고, 이제 제게 남은 건 파워젤 두 개와 물 몇 모금이 전부입니다. 앞으로 낙동강 하굿둑까지는 약 35km. 당시의 시간은 오후 5시입니다. 지금까지의 페이스라면, 7시 20분 버스를 타는 것은 어려워 보입니다. 문득 느낀 사실이지만, 저처럼 내륙에서 부산 방향으로 라이딩을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아마도 역풍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습니다. 얼른 도장과 사진을 찍고, 주변에 간식을 살 곳이 없나 둘러봤지만 그런 곳은 없었습니다. 물문화관은 코로나로 인해 운영이 중단된 상황. 겨우 35km를 앞둔 상황. 저는 지금 이 순간, 그 어느 때보다도 막막합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어느 누구도 저를 하굿둑까지 데려다줄 수 없습니다. 제 힘으로 끝까지 도착해야 합니다. 그렇게 자전거에 올라탄 그 순간, 결국 사고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다리가 말을 안 듣습니다.


  다시 출발하려고 자전거에 올라탄 순간. 페달을 돌리기 위해 움직여야 할 페달이 돌지를 않습니다. 자전거의 기능 고장이 아니었습니다. 기능 고장은 제 왼쪽 다리에 난 것입니다.

  이틀 전, 이화령에서 느꼈던 극심한 고통이 다시 몰려오더니 이제는 아예 다리가 움직여지지도 않습니다. 다리가 다 펴지지도, 굽혀지지도 않고 엉성하게 구부려진 상태에서 잠긴 느낌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겠습니다. 제 평생 이런 감각과 고통은 처음 겪는 일이기에, 우선 절뚝거리며 벤치에 기대어 앉았습니다.


  주변에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당시 제게 남은 것은 진통제 네 알과 파워젤 두 개, 그리고 물 몇 모금이 전부였습니다. 아마도 장경인대 쪽에 문제가 생긴 것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얼른 다리를 스트레칭해줍니다. 정말 다리를 잘라내 버리고 싶을 정도로 무지하게 아팠지만, 이를 악 물고 스트레칭을 통해 인대를 풀어줍니다. 손으로 허벅지 옆을 만져봐도, 인대가 긴장한 게 느껴질 정도로 허벅지 옆이 긴장한 상태였습니다.


  황급히 물통으로 폼 롤러를 굴리듯 다리를 굴려서 풀고, 남은 진통제와 파워젤 물 등등 먹고 마실 수 있는 것들은 죄다 속으로 때려 넣었습니다. 그렇게 10분 정도 지나 진통제의 약효가 몸에 돌기 시작하자, 그럭저럭 통증은 사라졌습니다. 움직이지 않던 다리도 억지로 마사지와 폭행(?)을 가하니 다시 말을 듣기 시작합니다. 천만다행이었습니다.


  이제 저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많은 것 같지 않습니다. 버스는 둘째 치고, 파워젤과 진통제의 약효가 가기 전에 낙동강 하굿둑까지 가야만 합니다.



* 드디어, 부산. 그리고 또다시 1박.


부산 시내에서부터는 그냥 정신없이 페달만 돌렸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제 몸이 제 몸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떤 느낌이냐면, 저 높이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저를 내려다보는 기분입니다. 만약 영혼이 있다면, 이때 제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간 것은 아니겠죠...?

  그리고 다른 느낌이 있다면, 심장과 폐와 머리, 손과 발만 남은 느낌이었습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 부분들만 남기고 다른 부분의 감각은 지웠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고통이 너무 극심해서 견딜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저는 사실상 '좀비'에 가까운 상태였다고 생각합니다. 진통제와 카페인, 포도당과 정신력만 가지고 억지로 앞으로 조금씩 나아갔기 때문이죠.


  이후 부산의 자전거길에 접어들었고, 역주행하는 자전거와 사람들과 목줄 없는 개들을 무아의 경지로 피하며 침을 질질 흘리며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제가 부산에서 자전거를 탄 것은 저 때가 처음이지만, 대체로 부산의 자전거길은 좋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자전거길이 넓지도 않고, 나무가 양 옆으로 빽빽하게 자라서 길이 전반적으로 굉장히 어둡습니다. 게다가 옆의 나무들에서 뻗어 나온 뿌리가 자전거길의 우레탄과 포장 아래로 울룩불룩 튀어나온 곳이 많아서 노면에서의 충격이 주는 피로감이 상당합니다. 또한, 중간중간 끊어진 자전거길과 산책길들은 횡단보도로 이어져 있는데, 차들이 횡단보도 위에 당장 사람이 없으면 신호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구 달립니다. 이런 횡단보도도 제법 자주 등장하는데, 신호도 짧고 굉장히 위험합니다.

  게다가, 상술했듯이 사람이든 개든 자전거든 뭐든지 갑자기 튀어나오거나 역주행하거나 하는 등등... 신경 써야 할 요소가 한둘이 아닙니다. 가뜩이나 온몸의 신경이 곤두선 당시의 제게는 마지막 50km가량의 라이딩이 가장 힘들었던 기억으로 남습니다. 부산, 무서운 동네였습니다...


드디어, 여정의 마지막을 알리는 낙동강 하굿둑이 보입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앞으로 헤쳐 나가다 보면, 어느새 낙동강 하굿둑이 보입니다. 그것도 코 앞에 나타납니다. 이때의 감정은 뭐랄까요... 글을 쓰는 지금으로부터 약 5개월 전의 일이라, 그때처럼 생생하게는 표현할 수 없겠지만 '벅찬 감정'이라고 표현하면 맞을 것 같습니다. 몸에 붙어있던 온갖 찌꺼기와 무거운 족쇄들이 전부 떨어져 나가는 '해방감'도 느껴집니다.


좀 전의 감동이 무색할 만큼,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인증센터 기념비였습니다.


  앞선 감동은 낙동강 하굿둑에 도착하면 폭발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다리를 건너고 코너를 돌자마자 바로 기점 표시가 나타나니 뭔가 김이 좀 샜습니다. 저는 목적지인 낙동강 하굿둑에 도착하면 엄청난 감동과 성취감 등이 몰려오며 가슴이 뭉클거리는 벅찬 감정을 느낄 줄 알았습니다만, 그런 건 생각보다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더군요. 그렇게 김이 빠져버리니, 그냥 그런 생각만 들었습니다.


그래도 도착했구나. 여기까지 올 수 있구나, 자전거로.

  불가능이라 여겨졌던 일을 해냈다는 신기함, 그리고 그 신기함을 완전히 짓누르는 정신적ㆍ육체적 피로함이 저의 모든 감각을 지배합니다. 아 참, 깜빡할 뻔했네요. 기껏 도착해놓고 도장을 찍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겠죠? 우선은 도장부터 찍었습니다.


대충 바닥에 자전거를 눕혀두고, 얼른 도장부터 찍습니다. 드디어... 드디어!!!


  남은 힘을 짜내어 도장을 쿵 찍고 나니, 비로소 여정이 마무리된 느낌이 듭니다. 끝났다는 생각이 드는 그 순간, 온몸의 감각이 다시 살아납니다. 다리의 통증, 상체의 고통, 허기, 피곤함, 추위, 갈증 등등. 하지만 그 모든 고통의 감정보다도, 저 멀리 해가 뉘엿뉘엿 지는 노을의 아늑함에서 오는 성취감이 가장 컸습니다.

  이 감동을 만끽하기 위해, 잠깐 허기와 갈증을 달래고자 주변의 편의점에서 뭔가 먹으려 했으나 문을 다 닫았더군요. 그래서, 그냥 근처의 음수대에서 물을 두 병은 연달아 들이켰습니다.


  마침, 다른 라이더 분께서 저를 보며 웃으시더니 '사진 찍어드릴까요?'라고 물어보십니다. 이왕 도착한 거, 마다할 이유가 없죠.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사진을 찍기로 합니다. 그런데, 라이더 분께서 사진 욕심이 좀 있으신 모양입니다. 자전거를 머리 위로 번쩍 들고 포즈를 취해보라 하십니다. 정말, 단 1의 힘도 남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억지로 자전거를 들고 포즈를 취했습니다. 무릎, 허리가 구부정하게 휘었습니다. 팔도 완전히 펴지도 못했습니다. 무게중심이 뒤로 넘어가서, 뒤로 자빠지기 일보직전이었습니다. 그렇게 엉성한 사진 한 장(?)이 탄생합니다.


이 사진을 찍고, 저는 뒤로 넘어졌습니다. ㅋㅋㅋㅋ


  사진을 찍자마자 뒤로 넘어지고, 자전거에 깔렸습니다. 라이더 분께서 황급히 오셔서 저를 도와주셨고, 저는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분께서도 서울에서 부산까지 오신 분이셨습니다. 그분께서도 코로나 때문에 축소된 차편으로 인해 오늘 부산에서 1박을 하셔야 된다고 하시는군요.

  2박 3일에 걸쳐 부산에 도착했다는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경악을 금치 못하십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제가 대체 어떻게 2박 3일 만에 부산까지 갔는지 믿기지가 않습니다. 대체 저는 어떻게 한 걸까요...?


  그렇게 라이더 분과 짧은 대화를 마친 뒤, 저는 진짜 기념사진을 찍기로 합니다. 잉, 그런데 자전거 페달이 이상하네요?


대체 언제 부러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많이 아팠구나...


  왼쪽 자전거 페달이 부러진 상태였습니다. 대체 언제 부러진건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저도, 자전거도 성치 않은 상태로 이 길을 달려왔던 것 같습니다. 자전거야, 미안하다...


내 자전거야, 고생 많았다!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말자(?)


  그렇게 몇 차례의 기념사진 촬영, 인증 도장 찍기까지 완료하고 나니 정말로 몸에 힘이 하나도 남지 않습니다. 이미 차도 끊겼겠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기쁜 도착 소식을 알린 뒤 숙소를 찾아 나섰습니다. 다행히도, 을숙도의 동쪽으로 길을 건너면 모텔과 식당이 즐비한 부산 '하단역'이 있어 빠르게 휴식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부산에서 뜻하지 않은 1박을 하게 된 무렵, 갑자기 수년 전 부산으로 로스쿨 입학을 해서 공부 중인 대학 친구 한 명이 생각이 났습니다. 부산에 오지 않으면 만나기 어려운 친구라 오래간만에 연락을 했는데, 다행히도 오늘 시간이 괜찮은 모양입니다. 오래간만에 만나서 맥주와 피자를 맛있게 즐겼습니다. 물론, 부산에 어쩐 일이냐는 질문에 '자전거를 타고 왔다.'며 자랑스럽게 대답했죠. 미친놈(?)이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친구와의 즐거운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와 침대에 엎어져 정신없이 잠을 잤습니다. 이렇게, 길다면 길었고 짧다면 짧았을 저의 서울 - 부산 자전거 국토종주는 대장정의 막을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 최종화, 에필로그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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